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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설(2)

애월

by 박경민

2. 애월


눈보라는 멈출 기미가 없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흩날리던 하얀 눈송이들이 택시 앞유리를 하얗게 덮었다가, 와이퍼와 함께 쓸려나갔다. 차가 조심스레 속도를 늦추더니, 기사님이 말했다.

“조금 더 가면 숙소가 나올 겁니다. 길이 미끄러워서 천천히 갈게요.”

은주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바다는 이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하얀 눈발만이 허공에서 스스로 몸을 부서뜨리고 있었다. K는 은주의 손을 잡은 채, 말없이 그 풍경을 함께 바라보고 있었다.

택시는 해안도로를 벗어나 애월읍 금성리의 좁은 마을길로 접어들었다. 폭설로 인해 길가의 낮은 돌담 위에는 이미 흰 눈이 두툼하게 쌓여 고요하고 낯선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기사는 예약된 숙소 앞에서 차를 멈추었다.

"다 왔습니다. 여기네요."

K는 은주의 손을 놓으며 문을 열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다시 한번 따뜻했던 내부 공기를 휩쓸고 지나갔다. 은주는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 숨에는 차가운 공기뿐만 아니라, 이 만남이 현실이 되는 순간에 대한 망설임과 기대감이 섞여 있었다.

K는 트렁크에서 두 사람의 작은 가방을 꺼냈다. 눈이 흩날리는 아득한 풍경 속에서, 그는 펜션으로 향하는 돌담길을 따라 걸었다. 은주는 K의 등 뒤를 조용히 따랐다. 아까 택시 안에서 손을 잡고 나누었던 깊은 교감과는 달리, 지금 이 짧은 길 위에는 숨 막힐 듯한 침묵이 감돌았다.

돌담길 끝, 눈보라 속에서 펜션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났다. 하얀 직사각형 건물은 폭설에 잠긴 풍경 한가운데서 고요한 섬처럼 떠 있었다. 건물 앞 작은 외등 하나가 노란빛을 흔들며 그 아래로 떨어지는 눈송이들을 부드럽게 비췄다.

은주는 걸음을 멈추고 그 풍경을 잠시 바라보았다.
도시의 호텔이 주는 번잡함도, 여행자들이 북적이는 관광지의 불빛도 없었다. 오직 바람 소리와 눈보라, 그리고 이 조용한 건물만이 존재했다.

“여기… 맞네.”
K가 작게 중얼거렸다.

현관문 앞에 선 K는 비밀번호를 누르기 위해 몸을 숙였다.

그 순간, 그는 은주를 향해 살짝 고개를 돌렸다.

"괜찮아요?"

그의 질문은 단순히 추위에 대한 염려가 아니었다.

이 문을 열고 들어가는 행위는, 그들이 그동안 문자와 통화로 쌓아 올린 마음의 선을 현실에서 완전히 넘어버리는 것을 의미했다.

은주는 눈이 계속해서 쌓여가는 돌담과 그 뒤편의 잿빛 하늘을 잠시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뺨은 차가운 공기에 붉게 상기되어 있었지만, 눈빛은 흔들림 없이 K를 향했다.

"응." 그녀는 짧지만 단호하게 대답했다.

"괜찮아. 지금 이 순간이… 내가 원했던 거야."

K는 더 묻지 않았다.

그는 비밀번호를 눌렀고, 잠금장치가 풀리는 딸깍 소리가 세상의 모든 침묵을 깨듯 울려 퍼졌다.


문이 열리자 먼저 따뜻하게 데워진 실내 공기가 두 사람에게 전해졌다. 은주가 부츠를 벗고 숙소를 돌아보는 사이, K는 가만히 서서 김서린 안경을 먼저 닦아냈다.

지도상 외진 곳처럼 보였던 숙소는 낡거나 허름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도 단정하고 세련된 건물이었다. 매끈하고 하얀 벽,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의 은은한 나무바닥, 주인의 취향이 반영된 듯한 모던하고 심플한 가구들과 마샬 스피커까지.

잘 꾸며진 실내의 정갈한 느낌과 코끝을 맴도는 ‘새집’의 냄새가 묘한 만족감을 전해주었다.

‘사진보다 훨씬 깔끔하네.’

K는 급하게 고른 숙소였지만, 이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우와, 바다다.”

먼저 숙소를 둘러보고 있던 은주가 감탄하며 말했다.

K가 가방을 내려놓고 침대가 놓인 방으로 들어서니, 침대보다도 더 큰 통창 밖으로 끝없이 펼쳐진 애월 앞바다가 잔잔하게 물결치고 있었다.

“이런 바다를 보고 싶었던 거지?”

K가 은주의 뒤에 서며 물었다.

“응.”

은주는 살짝 고개를 돌려 K를 보고 웃었다.

K는 그 웃음을 보는 순간 잠시 말문이 막혔다.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가 나와 함께 있을 수 있는 걸까?’

은주를 바라보자, 순간 창밖에 내리는 눈송이보다 그녀의 얼굴이 더 아름답고 순결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찬바람에 빨갛게 달아오른 뺨, 그리고 마치 K를 끌어당기는 것만 같은 커다란 눈동자, 작고 오똑한 콧날과 그를 향해 올라간 입꼬리— 그 모든 게 현실보다 한 톤 더 선명한 느낌이었다.

K는 그 얼굴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심장이 한 번 크게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은주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자신의 입술을 그녀의 입술 위로 포개었다. 갑작스러운 키스에도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 잠시 숨을 멈출 뿐, 고개를 살짝 들어 조심스럽게 응답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마음속에서 끝없이 자라고 있던 서로를 향한 욕망을 숨기지 않기로 했다.

‘파혼, 모임, 고백, 출장, 제주’

그들이 주고받았던 문장들 너머에서 느껴지던 ‘지금 이 순간’에 대한 열망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로 했다.

K는 그녀의 허리 뒤로 손을 둘렀고, 은주는 그의 셔츠 자락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입술이 떨어지는 순간마다, 그들의 몸을 덮고 있던 옷들이 하나씩 벗겨지며 방 안의 공기가 조금씩 더 뜨겁게 흔들렸다. 둘은 말 대신 서로의 호흡과 체온으로 마음을 확인했다. 밖에서는 눈이 여전히 쉬지 않고 떨어지고 있었다. 유리창에 부딪히는 눈보라의 미세한 리듬이 방 안까지 고요하게 번져왔다.

그러나 그 안은 더 이상 외부와 같지 않았다.

눈보라가 전해주는 차가움과 쓸쓸함 대신, 두 사람의 거친 숨결과 뜨거운 체온만이 그곳에 존재했다.
창문 너머 겨울 바다는 깨어 있는 듯했고, 그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조금씩 더 깊이 스며들고 있었다.

하얀 눈보라와 따뜻한 실내, 바깥의 칼바람과 안쪽의 온기, 불확실했던 여행과 지금의 현실—

모든 것이 한 공간 안에, 조용한 균형을 맞춰 공존하고 있었다.


다음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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