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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설(3)

뇌설

by 박경민

3. 뇌설


관계가 끝난 뒤, 둘은 한동안 말없이 누워 있었다. 깨끗하던 하얀 침구는 어느새 축축하게 젖은 채로 구겨져 있었다. 통창으로 흐린 빛이 스며들었고, 그 너머로는 쉬지 않고 넘실거리는 바다가 보였다. 창문 밖에서는 여전히 굵은 눈송이가 흩날리고 있었고, 벌거벗은 K와 은주는 서로의 체온만을 의지한 채 조용히 숨을 골랐다.

커다란 눈송이가 이리저리 부유하며 시야를 어지럽히고, 그 뒤로 희끗하게 일렁이는 파도와 잿빛 하늘이 한 덩이로 포개진 풍경이 계속 이어졌다.

그때였다.
저 멀리, 수평선 근처의 두꺼운 구름 사이에서 순간 번쩍하는 빛이 스쳤다.

은주는 숨을 살짝 들이마신 뒤 말했다.

“봤어?”
K도 시선을 창밖에 둔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응. 번개 같았지?”

“번개?... 눈 오는 날에도 번개가 쳐?”

은주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살아온 날들을 반추하며, 지금까지 겪었던 눈 오는 날들을 떠올려보는 듯했다. 눈이 오는 날에는 조용히 떨어지는 눈에만 정신이 팔려, 천둥 치는 하늘을 올려다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네.’

K는 눈 오는 날에 치는 번개에 대해 알고 있었다.

뇌설, 영어로는 thundersnow.
“쳐. 매우 드문 경우기는 하지만… 치긴 해.”

은주는 그의 말에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밖의 바다는 잿빛으로 일렁이고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이상할 정도로 따뜻했다.

K는 천천히 설명을 이어갔다.

“보통 천둥번개는 적란운처럼 높고 단단하게 쌓인 구름에서 생긴대. 높고 두텁게 쌓인 구름.

그런 구름은 가장 윗부분과 아랫부분의 차이가 극심하데. 온도인지, 기압인지 아니면 무슨 차이인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그 차이 때문에 위에서 아래로 거대한 흐름이 생기면서 번개가 친다는 거야. 장마 때 하늘을 보면 완전 먹구름이잖아. 그게 구름이 엄청 빽빽해서 햇빛이 통과하지 못할 정도의 두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 거야. 그래서 번개도 치는 거고.”

은주는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 조용히 그의 호흡을 들었다.

“근데 눈 구름은 그렇지 않아. 눈 구름은 넓게 퍼진데. 눈 오는 날은 보통 장마처럼 어둑하지는 않잖아. 아마도 구름의 두께 때문에 그럴 거야. 넓게 퍼진 구름은 적란운처럼 위와 아래의 차이가 극심하지 않고 안정적인 거지. 넓고 얇게 퍼져있으니.

근데 이렇게 눈보라가 치는 날엔… 구름 속이 갑자기 불안정해지면 드물게 번개가 치기도 한대.”

은주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럼 방금 전 번개가… 좀 특별한 거구나.”

“응. 뇌설이라고 부른대.”

K는 ‘뇌설’이라는 두 글자를 조용히 또박또박 발음했다.
천둥 ‘뇌(雷)’, 눈 ‘설(雪)’.
서로 섞이지 않을 것 같은 것들이 만나 생기는 현상.


은주는 그 단어를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어 보았다.
뇌설.
눈과 함께 내리치는… 번개.
함께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것들이 한 번에 찾아오는 순간.

“나는…”
은주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이불 끝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나는… 적란운 같아.”

K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적란운이요?”

“응.”
은주는 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겉으로는 멀쩡한데, 안에서는 계속 뭔가 들끓어.

위랑 아래가 자꾸 부딪히는 느낌.

그래서 번개가 자주 치는 구름.”

그녀는 창밖의 눈보라를 바라보았다.

바다 위로 쉼 없이 거친 눈보라가 내리치고 있었지만, 그보다 더 복잡한 눈보라가 그녀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내가 조용하고, 차분하고…

눈 오는 날처럼 고요할 거라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마음속이 늘 불안정해.

누구를 좋아하면 번개가 치고, 상처받으면 또 번개가 치고… 참으려고 해도 마음이 저절로 요동쳐.”

은주는 말하다가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 다음 문장은 조심스럽지만 피할 수 없는 고백이었다.
“그래서… 집에서도 자주 번개가 쳤어.”

은주의 등을 쓸던 K의 손이 잠시 멈췄다.

은주는 K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말을 이어갔다.

“그 사람과 나는 어쩌면 비슷한 사람이었나 봐.

사람들은 그 사람을 맑은 하늘처럼 보지만… 실은 아니야.

그 사람도 속에서 계속 뭔가 부딪히고 있었어.

근데 방식이 나랑 완전히 달라.”

은주는 손끝으로 K의 가슴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나는 번개가 바로 드러나는 적란운이라면…

그 사람은 구름 속 보이지 않는 부분에 끊임없이 요동치는 소용돌이를 가진 사람이었어.

겉에서 보면 조용한데, 안에서는 꽉 막힌 공기가 언제든 터져나올 것처럼 불안이 계속 쌓여 있는 사람.”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오래된 피로가 묻어 있었다.

“나는 터져서 번개가 되는 쪽이고,

그 사람은 터지지 못해서 먹구름이 더 두꺼워지는 쪽이었지.

불안이 바깥으로 나오는 대신, 안으로만 계속 쌓이는 사람.

둘 다 불안정했는데… 서로를 보면서도 몰랐지. 서로를 이해할 수도 없었고.”

은주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런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집은… 늘 폭풍이 몰아쳤지.

숨조차 쉴 수 없을 만큼 강한 돌풍이 불거나, 모든 걸 뒤흔드는 천둥번개가 치는 날들.

그렇지 않은 날도 있긴 했지만, 그런 날도 폭풍이 몰아치기 전의 고요하지만 불안한 하루하루일 뿐이었어.”

그녀는 크게 한 번 숨을 들이쉬었다.

그 안에는 체념과 슬픔, 그리고 어쩐지 묘한 평온이 함께 섞여 있었다.

“근데 넌 좀 다른 것 같아.”

K는 다시 은주의 등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바람이 불어도 모양이 크게 변하지 않는 구름 같달까.

색도, 온도도 갑자기 달라지지 않고… 안정감을 주는 사람.”

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계속해서 K의 가슴을 쓸었다.

“네가 말한 그 눈 구름처럼, 쉽게 요동치지 않고… 천둥번개를 품지 않은 사람. 그래서… 그때 나는 너에게 그렇게 쉽게 끌렸던 것 같아.”

그녀의 손이 천천히 아래쪽으로 흘러내렸다.

마치 오랫동안 폭풍을 견뎌온 사람이, 드디어 찾아낸 고요하고 따뜻한 대기를 욕망하는 것처럼.



다음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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