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또한 순간순간 흔들리는 정신머리를 꽉 붙잡고 힘들지만 평범한 일상을 살아낼 수 있을 테니까.
내가 학생이었던 90년대의 교실 풍경은 모두가 똑같은 교복을 입고 짧은 스포츠머리를 한, 남자라고 하기엔 아직 모든 것들이 서툴고 어설픈 아이들이 줄줄이 늘어선 책상에 다닥다닥 나란히 붙어 앉아 칠판을 바라보고 있는 뒤통수들의 모임이다. 누군가는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수업에 집중하고, 누군가는 고개를 숙이고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고의 차이가 있을 뿐. 물론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이 되면 난장판이 되긴 했지만, 학교에 머무는 대부분의 시간은 그런 모습이었다.
(난 키가 크기도 했고 선생님의 눈을 피해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거나 몰래 무협지나 만화책을 보기 위해 항상 제일 뒷자리에 앉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잠깐의 난장판이 되는 시간 중 10분의 쉬는 시간, 60분의 점심시간 외에도 정규 수업을 마치고 종례 시간 전 잠시 동안 주어지는 청소 시간도 있었다. 지금과 다르게 그때는 학생들이 직접 책상을 옮기고 교실을 쓸고, 닦고 다시 책상을 정리하는 일들을 했다. 기억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초등학교 시절에는 따로 교무실에 선생님 자리를 청소하러 가는 아이도 있었던 것 같다.
나이가 아주 어렸던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청소 시간이 되면 모두가 손걸레와 왁스를 챙겨 들고 자기 자리만큼의 교실 바닥을 윤이 나도록 닦았다.
- 바닥은 도끼다시 재질이었는데 고사리 손으로 왁스를 치덕치덕 바르고 문지른다고 한들 과연 어떤 효과가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선생님이 시키는 일이었으므로 한 명도 빠짐없이 머리를 책상 밑으로 숙이고 열심히 왁스칠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도 누군가는 열심히, 바닥이 맨들맨들 해지도록 문질렀을 것이고 누군가는 대충 닦으면서 주변 눈치를 보며 시간을 때우는 아이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나이가 조금 더 늘어났을 즈음의 청소 시간은 어느 정도 자율이 주어졌다. 1 분단, 2 분단, 3 분단, 4 분단 이렇게 돌아가면서 청소를 했던 적도 있고, 번호순으로 혹은 교실에 존재하는 어떤 단위로 번갈아 가면서 청소를 했다. 청소 당번이 아닌 아이들은 교실 뒤에 모여 수다를 떨거나 운동장으로 달려 나가 공을 찼다. 그리고 본인이 청소 당번이었음에도 청소를 하지 않는 소위 문제아(?)라고 구분되는 아이들도 많지는 않았지만 생겨나기 시작했다. 반면에 본인이 청소 당번이 아님에도 친구를 도와 함께 청소를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 이후 나이가 더 차고 고등학교 시절의 청소 시간은 완전 자율로 진행되었다. 당연하게도 대부분의 아이들이 청소 시간을 노는 시간으로 활용했다. 공부를 잘하는 모범생도, 공부와 담을 쌓고 사는 듯한 아이들도, 그리고 나 또한 그러했다. 청소는 자율에 맡겨진 상태였으므로 전처럼 1 분단이어서 오늘은 우리가 청소를 해야 한다 같은 의무가 없었기 때문이다. (변명 같지만 힘주어 책상을 한 번에 밀어붙이는 것이 재미있어 자주 책상을 밀어주었으며, 가끔은 빗자루를 들어 청소를 돕곤 했었다.)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묵묵히 바닥에 먼지를 쓸고, 마대 걸레를 빨아서 바닥을 훔치고 다시 책상을 가지런히 정리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아무런 이득이 없는데도 매일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그 일들을 해내었다.
한 번은 반장이면서 공부도 곧 잘하지만 노는 것 역시 좋아하던 녀석이 묵묵히 청소를 하던 친구에게 "무얼 그렇게 열심히 하냐,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데?"라고 물었다. 그 말속에는 성적이 좋아지는 것도 아니요, 선생님이 알아봐 주고 칭찬해 주는 것도 아니요, 어떤 종류의 평가에도 영향을 주지 못하며 오히려 남들은 그 시간에 공부를 더 하거나, 신나게 떠들고 뛰노는데 넌 왜? 본인에게 손해인 짓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었을 것이다.
대답은 특별한 것이 없었다.
"그냥"
그 친구에게 청소 시간에 청소를 하는 일이 옳은 일이고 당연한 일이었으므로 나에게 이득인지, 손해인지 따질 필요 없이 '그냥' 청소를 했던 것이다.
나는 그때 어떤 사람이었을까?그때 청소를 손해라고 생각했던 반장 녀석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또 묵묵히 교실을 청소하던 친구 녀석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만약 청소라는 활동에 어떤 타이틀이나 이득이 있었다면 상황은 변했을 것이다. 청소를 거들떠보지도 않던 친구들이 보상을 바라고 열심히 쓸고 닦고 하는 모습을, 묵묵히 해야 하는 일이기에 스스로 청소를 했던 친구들이 그들에게 빗자루를 뺏기고 복도 밖을 서성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나는 아마도 여전히 대부분의 시간을 즐겁게 노는 것에 할애하고 가끔 기분이 내킬 때면 청소를 돕지 않았을까? 전에도 그랬듯이.
요즘 자기 자신의 이해득실만을 따져가며 상식을 파괴하면서까지 살아가는 이들을 보고 있자니 문득 가만히 청소를 해내던 '그때 그 아이'가 떠오른다. 공부를 잘했던 모범생도, 운동을 잘하거나 키가 큰 멋쟁이도 아니었던 평범했던 그 아이는 지금 어떤 어른이 되어 있을까? 부디 어딘가에서 본인이 하는 일을 묵묵히 끈기 있게 해내어, 셈에 밝았던 그 누구보다, 부잣집 아들이었던 그 누구보다, 학생회장이며 반장이었던 그 누구보다도 훨씬 더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었으면 좋겠다.이해득실을 따지는 것이 아닌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는, 그리고 보통의 상식 선에서 옳음을 택하는,그런 보통의 사람들이 더 행복하고 더 나은 인생을 살고 있다면 좋겠다.
그런 이들이 그러한 삶을 살고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나 또한 순간순간 흔들리는 정신머리를 꽉 붙잡고 힘들지만 평범한 일상을 살아낼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