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
"내가 어떤 사람이면 좋겠어요?"
그녀가 물었다. 나는 잠시 생각해 보았다.
'어떤 사람이면 좋을까?'
얼굴이 예쁘고, 몸매가 좋은 사람? 부유해서 삶에 여유가 넘치는 사람? 능력이 너무나 좋아서 나에게 든든한 힘이 되어 줄 사람?
전형적인 타입들이 머릿속을 지나갔지만, 내가 원하는 '어떤 사람'의 범주에 속하지는 않았다.
"그냥 나쁜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짙은 눈썹 아래, 하얀 마스크 위, 그 사이에서 반짝거리며 빛나고 있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나쁜 사람? 어떤 사람이 나쁜 사람인데요?"
그녀는 여전히 호기심 어린 눈 빛으로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어쩌면 도발적인 눈빛 같기도 하다.
"글쎄요. 내가 생각하는 나쁜 사람은... 자신의 이득을 위해 남의 마음을 다치게 하는 사람?"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생각에 잠긴 듯 양 눈썹 사이 미간에 작은 주름을 만들었다.
자신의 과거를 반추하기라도 하는 것일까?
나는 내 머릿속에 있는 생각에 대해 말을 이어갔다.
"예전에는 그런 사람을 꿈꿨어요. 예쁘고, 마음씨도 곱고, 지적이며, 명확한 꿈도 가지고 있고, 그걸 이룰 열정도 가지고 있는 모 그런 사람. 그런데 지금까지 사회생활도하고 또 여러 사람들을 만나보고 하니, 그런 사람은 영화나 만화 같은 곳에나 존재하는 거 같더라고요. 사람들은 누구나 약점? 아니면 부족한 부분? 그런 걸 갖고 있으니까. 물론 저 또한 그렇구요."
나는 이야기를 하면서 나의 약점에 대해 생각해 봤다.
자신감 없는 모습, 내성적인 성격? 나에게 그런 것들이 약점인가? 난 그런 게 싫기도 했었지만, 지금은 좋은 것도 같은데...
나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니, 약점이라고 표현하는 건 안 맞는 것 같아요. 그냥 각자 가지고 있는 모습이 다른 거죠. 누군가는 사교적이고, 누군가는 내면이 단단하고, 목소리가 크고 의지가 강하거나, 신중하고 포용력이 뛰어나거나."
"어떤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그 점에 반해서 만난다 하더라도, 장점이라고 생각했던 모습이 단점이 되기도 하더라고요. 예를 들어, 친구들과 잘 지내고 주변 사람들을 잘 챙기는, 사교성이 좋은 사람이라 그 모습이 맘에 들어 만났는데, 만나다 보니 내가 항상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거예요. 항상 친구, 지인, 동료가 나와 가족들보다 우선인 거죠. 반대로 나만 바라볼 것 같아서 만났는데, 시간이 지나니 그게 너무 답답하고 지겨워지는 거죠. 나에게만 집작 하는 것 같고."
"그래서 '이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은 잘 안 들어요. '이런 사람이면 돼요.'라고 말했는데, 그 사람은 여전히 똑같은 사람이고 변하지 않았는데, 내가 변해서 그 모습이 싫어진다면... 그건 좀 비참하지 않나요?"
이미 사랑에 빠져버린 상태에서 그 사랑을 붙잡기 위해 원래의 나를 바꿔야 하는 상황이라면 좀 비참하지 않을까? 아니 그게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녀는 내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냥 나쁜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굳이 착하지는 않아도 돼요. 악하지 않으면 그걸로도 충분히 좋은 사람인 거 같아요."
이제는 정말 그런 생각이 들었다.
'평범한 사람.'
그런 사람이면 충분히 감사할 일이다.
그녀는 내 말을 곱씹는 듯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물었다.
"나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어요. 내가 선택한 무엇인가가 이 사람에게는 좋은 일이고, 저 사람에게는 나쁜 일 일수도 있잖아요. 그런 거면 이 사람에게는 좋은 사람이지만, 저 사람에게는 나쁜 사람이 되는 거 아니에요?"
그녀의 질문을 들으니 오늘 처음 봤지만 분명 한 번의 만남으로 끝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웃었다. 슬며시 웃음이 지어졌다. 저절로.
"그런 건 근데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해야 하는 경우니까... 내가 말하고 싶었던 건 나의 이득을 위해 다른 사람을 마음 아프게 하는 걸 말하는 거였어요. 내가 좋으려고 다른 사람의 권리나 착한 마음을 이용하는 사람. 예를 들어 사기꾼이나 성추행범 같은?"
"음. 일단 저는 그런 범죄를 저지른 것 같지는 않네요."
슬며시 웃음이 지어지는 얼굴이었다. 나는 그녀와 좀 더 있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럼 나는 어떤 사람이면 좋겠어요?"
시간은 이미 12시가 넘어있었다. 우리가 이 벤치에 앉기 전보다 지나다니는 차가 줄어들었고, 건물의 불빛들도 조금은 꺼져있었다. 저 앞에 보이는 버스정류장에 막차를 기다리는 사람이 몇 명 서있는 것이 보일 뿐 지나다니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음,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냥 조금 힘든 시간을 보냈고, 그 기분에서 벗어나보려고... 오늘 만나러 나온 거였거든요. 그래서 '이런 사람이면 좋겠다'라는 기대감은 사실 없었어요."
"그럼 어떤 거 같아요?지금까지의 나는? 나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나는 여전히 반짝거리고 있는 그녀의 큰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왠지 우리가 잘 맞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데..."
그날, 그 밤에 그렇게 그녀와의 만남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