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첫사랑과 신내림
나의 첫사랑이었던 남자아이는 장난기 가득한 눈망울의 어른 남자가 되었다.
시장에서 만난 그는 수많은 색깔들과 사람들이 정신없이 움직이는 와중에도 혼자 스폿라이트를 받은 듯 돋보였다. 지나가는 여자들이 모두 그를 홀끔홀끔 볼 정도였으니. 그는 날 보고선 큰 소리로 우와, 라고 외치고 곧장 내게 다가왔다.
"오랜만이지? 예뻐졌네." 그가 웃으며 내 손을 잡고 흔들었다. 나는 그의 여전히 뽀얗고 깨끗한 피부에 감탄했다. 어쩐지 두근거리는 가슴을 손으로 눌러내리며 그가 재잘재잘 떠드는 것을 잠자코 들었다. 그의 아내는 여러 방송에도 나오는 유명한 댄서라고. 지금은 잠깐 휴식기를 가지고 있지만 머지않아 또 큰 공연으로 대박을 터뜨릴 사람이라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걷다가 내 첫사랑의 아내를 만나게 되었다. 스트릿우먼파이터의 가비였다. 나는 내 꿈이 나를 데려가는 대로 의식을 맡기는 편이지만, 까무잡잡한 피부와 고양이 눈매, 화려한 화장 때문에 그녀가 가비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가비가 명랑한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했다. "트레이시예요. 반가워요!"
나는 가비, 아니 트레이시와 뜻모를 이야기를 한참 나누다가 그녀에게 공연 아이디어를 제안하게 되었다. 춤을 추면 방이 한 칸씩 늘어나는 정사각형 방으로 이루어진 우주선을 만드는 거예요. 트레이시는 우주선장으로서 끊임없이 춤을 추는 거죠. 춤을 추지 않으면 우주선이 날아갈 수 없어요.
트레이시는 프로페셔널에게서 자주 보이는 골똘한 표정을 지으며 여기저기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해볼만 한 것 같아요, 그녀가 당당하게 얘기했고 나는 첫사랑과 함께 다시 시장으로 돌아갔다.
시장에서는 크고 알록달록한 전갈 구이를 팔고 있었다. 저건 정신착란을 일으킬 것 같은데, 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나의 잘생긴 첫사랑은 아직 죽지 않은 전갈에 다가갔다가 독침에 쏘이더니 허리가 뒤로 접히며 고꾸라졌다. 길바닥에 널부러져 경련하는 그를 보고 당황한 것도 잠시. 황당하게도 이번엔 내가 독침에 쏘여버렸다. 눈 앞의 세상이 휙 돌아간다. 나는 깜깜한 공허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까만색 대우주 속에서 형광등 같이 빛나는 내 첫사랑이 전갈을 입에 물고 나타났다. 그의 눈알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아주 나쁜 마약을 하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나는 경악하며 그에게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누구야. 누구야. 누구야." 그가 내게 도움을 요청하듯 간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 디딩이야. 디딩이!" 아주 잠깐, 여기에서 내 이름을 그에게 각인시킨다면 앞으로 나만을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를 짜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꿈 속의 나는 뭔가 매우 잘못 되었다는 것을 감지했다. 왜냐하면, 그의 목이 기괴하게 진동하면서 큰 소리를 내기 시작했기 때문에.
뭔가에 씌인 그도, 겁을 먹은 나도 악을 쓰기 시작했다.
"이름을 말해! 이름! 누구야!"
"홍디딩!"
"이름!"
"홍디딩!"
"이름!"
왜였을까? 세번째엔 답을 하지 않았다. 머뭇거리고 있자 파도에 덮치듯 세상이 밀려왔고, 나는 다시 복잡한 시장통 한가운데에 서있었다.
베이지색 삼베 원피스를 입은 중년 여성이 내게 친근하게 팔짱을 껴왔다. 꿈 속에서 나는 이 분이 나의 이모님이라고 인지했다. 그녀와 나는 어느새 사람이 없어진 어두운 시장 골목을 걸어가며 트레이시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네가 옛날부터 좀 눈치가 없었잖니. 사회생활에선 당연한 거를 넌 못해. 그래서 트레이시 같은 사람이 너랑 잘 안 맞구. 네 마음은 안그런데, 상대방이 받아들이기엔 건방지게 느껴질 수 있는거야." 대충 나의 말투 때문에 트레이시가 화가 났다는 말이었다. 이모님은 안타깝다며 혀를 찼다. 내가 또 뭔가를 잘 못했군, 하며 위축된 나는 이모님이 이끄는 대로 걸었다.
도착지는 거대한 공연장이었다. 가비, 아니 트레이시가 교묘하게 가슴이 파인 우주복을 입고 스탠딩 마이크 앞에 서 있었다. 그녀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고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멘트를 외쳤다.
그 누구도 춤을 추지 않았다.
정사각형 방들이 한 칸 한 칸 합쳐져 멋진 우주선이 되었다.
"이제, 이 위대한 여정이 시작됩니다!" 트레이시의 가슴 벅찬 멘트와 함께, 우리는 일제히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우주선이 굉음과 함께 발사되었다. 언제 몰려들었는지 모를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울렸다. 트레이시는 내 손을 양손으로 부여잡고 고맙다며 웃었다.
이모님과 나는 공연장을 빠져나와 또 걸었다. 이번에는 이모님이 나를 잔뜩 치켜세웠다. 어쩐지 감동받은 나는 이모님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이모님이 항상 날 믿어주고 좋게 생각해줘서 고마워요."
이모님은 왠지 모르게 슬퍼 보였다. 그녀가 나를 잡아 이끌며 말했다. "너, 이제 받아들여야지."
꿈 속의 나는 이모님이 신내림을 말하는 것임을 알아채고, 퍼뜩 겁이 나서 움츠러들었다.
"왜요? 진짜 꼭 신내림 받아야 해요?"
"머리에 가시가 이만큼 섰어..." 이모님이 뜻 모를 말을 하며 큰 법당 앞에 섰다. 굉장히 낡은 오색 한복을 입은 여자가 부채로 입을 가리고 지나갔다. 그녀의 눈을 보니, 아주 길쭉하고 큰 눈 하나 뿐이었다. 그 길쭉한 눈 속 새까만 눈동자가 나를 기분 나쁘게 주시하고 있었다. 어느새 법당 안에는 삼베옷이나 알록달록한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제단 앞에 서 있었다.
"싫어요. 안하고 싶어요." 나는 이모님에게 호소했다. 이모님이 한없이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별안간 알겠다, 하고선 몸을 휙 돌려 사람들 사이로 걸어들어갔다.
천둥 같은 사물놀이 소리가 시작되었다. 이모님은 괴상하게 몸의 관절들을 꺾으며 제자리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호통을 쳤다. "네가 대신할거야?"
고개를 돌려 제단을 보니 황금빛 불상 대신 갈색의 쭈그러진 피부와 온몸의 털이 숭숭 빠진 흉한 모습의 노인, 아니 미라 같은 것이 나체로 앉아 있었다. 다시 이모님을 보니 춤을 추다가 기진맥진하여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다. 부채로 입을 가린 외눈박이 여자들이 이모님을 위협하듯 에워쌌다.
꿈 속의 나는 이모님을 희생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야! 이모. 이모 죽으면 안 돼. 내가 받을게요!"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몸이 저절로 제자리 뛰기를 하며 춤추기 시작했다. 사물놀이 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그 박자에 맞춰, 호통을 쳤던 목소리가 이번엔 신이 난 듯 우렁차게 외쳤다. "이 안에 하나, 둘, 셋이 있고!"
누가 봐도 잘생긴 내 첫사랑이 하나고.
프로페셔널한 가비, 아니 트레이시가 둘이고.
나를 가여워 하는 이모님이 셋이고.
꿈 속에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내 안에 신이 셋 있다는 건가봐. 이거 다 진짜인가봐.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힘들고 아팠던 건 다 이것 때문인걸까, 하면서 자기연민에 푹 빠졌던 것 같다. 그러다가.
승리감에 도취된 듯한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네 이름으로 조상신이 또 셋이구나!"
거대한 숫자 3 이 우주선 위로 드리워졌다. 뭔가 끔찍한 것을 깨달은 나는 극도의 공포를 느껴 괴성을 질렀다.
그리고 나는 잠에서 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