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시
어느날 나는 별안간 사표를 내기로 마음 먹었다. 일백번 고쳐먹던 생각이 단숨에 정리되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걱정과 불안도 단숨에 없어졌냐고? 그렇지는 않았다. 다만 이제 더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더이상의 고민이 무의미했던 것 뿐이다. 나는 만 36세였다. 그리고 나는 정말이지 벼랑 끝 폭탄처럼 답답하고 위태로웠다.
꼬박 12년을 쉴새없이 달렸다. 준비하던 시험 낙방 후 '잉여인간'이 되기 싫어 허겁지겁 계약직으로 입사한 회사에서 1년, 번듯한 대기업 계열사에서 7년, 그리고 희망찬 비전에 홀리듯 들어간 스타트업 회사에서 4년.
나는 언제나 반토막난 양초처럼 스스로를 불태우고, 폭주하듯 몰입하여 일했던 것 같다. 그래서 심지 주위가 바닥까지 녹아 투명해질 때쯤이면--
시X 내가 뭘 하고 있는거지.
계속 이렇게 살아가는 건가.
10년 뒤에도, 15년 뒤에도?
난 천재가 아니어서 요절도 못하잖아.
이런 생각으로 도망치듯이 휴가를 떠났다.
'번아웃'이라는 말을 밥먹듯이, 아니 밥먹는 것보다 더 자주 입에 올렸다. 20대 사회 초년생 시절에는 이 단어가 그리 보편화되지 않아서, 나는 꼭 숨겨놓은 비밀을 간신히 꺼내듯 호소했다. "정신병 올 것 같아요." 하지만 그 때는 내가 그다지도 힘든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쥐 잡듯이 날 갈구다가, 상냥하게 간식을 챙겨주는 사수 때문일까? 유관부서가 퇴근했으니 내일 확인하겠다고 했더니 난리를 쳐 모멸감을 준 클라이언트 때문일까? 아니면, "회의"하자며 밤에 팀원들을 회의실에 모아놓고 새벽까지 아무 말없이 담배나 뻑뻑 펴대던 상사 때문일까. 수많은 이유를 생각했었지만, 정작 정답은 한 번도 떠올리지 못했다. 이제 나는 안다! 내가 죽을 것 같은 이유는, 너무 열심히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때 내가 이 답을 생각지 못한 이유도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면 모두 열심인 사람들 뿐이었다. 내가 그들보다 더 열심히 한다고 자부할 수 없었고, 그게 자랑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치기어린 20대의 패기로 이따금씩 생각했었다. '능력이 모자라서 저렇게 밤새 일하는거지.' 그러나 그러고나서는 어처구니없게도, 즉시 그 '치열의 허리케인'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치열함은 회사에서 나의 무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 사회가 내게 부여한 의무였다.
나는 여전히 만 36세이다.
오늘 나는 아침 9시가 되어서야 잠들었고, 정오 즈음에 눈을 떴다. 어제 오후에 시작한 나의 작은 프로젝트(이것에 대해서는 추후 적어볼 생각이다)에 온정신이 팔려, 동틀때까지 매진해버린 것이다. 지금 이 글을-- 바로 직전 문장을 쓰면서--비실비실 웃음이 나왔는데, 아무래도 뭔가에 꽂히면 걷잡을 수없이 불타오르는 게 결국 나인가 싶다. 사람은 고쳐쓰는게 아니랬는데, 정말 그렇다. 내가 그렇다.
오랫동안 잠을 못자면 얼굴에 기름기가 낀다. 그리고 눈 안으로 그 더러운 분비물들이 들어가면서 눈이 따가워진다. 나는 눈을 몇 번 비비다가, 밝은 햇살이 내리는 침실로 들어갔다. 내 침대 바로 옆에는 창이 나 있는데, 창밖으로 선반같은 것이 붙어있다. 이 길고 좁은 선반은 참새, 까치, 비둘기의 핫플이다. 그리고 6월은 도대체 무슨 자연의 신비가 이뤄지는지, 1년 중 조류 친구들이 가장! 나대는 달이다. 가족인지 크기가 제각각인 애들이 번갈아가며 날아와 앉아 짹짹 깟깟 구구구 떠든다. 같은 애들끼리 싸우거나, 다른 종끼리 푸드덕대며 싸운다. 종종 한 애가 선반에 앉아 소리를 지르고, 근처 나무나 지붕에 있는 친구들이 대답을 해준다. 분명히, 이들은 대화를 한다. 오늘 나의 조류 핫플에서는 참새파가 굉장한 소란을 피웠다. 고놈의 짹쨱거리는 소리가 어찌 그리 귀청을 찢어놓을것 같던지, 몹시 피곤한데도 잠이 쉽게 오질 않았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기분이 썩 좋았다.
파란 잎사귀를 입에 물고 있는게 귀여웠다. 나도 모르게 웃으면서 사진을 찍은 후, 얼마 안있어 잠들었다.
정오가 조금 지나서 눈을 떴을 때, 새들은 훨씬 더 차분해져 있었다. 아침형인걸까. 침실 밖으로 나왔는데 거실의 시원한 공기가 이제 막 햇빛을 받아 데워지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래서 또 기분이 좋았다. 평온하고 안락한 내음이 났다. 잠시 소파에 앉았다가, 곧 일어나서 옷을 벗어 던졌다. 아니, 사실 그냥 아무렇게나 던지지는 않고 빨래 바구니에 넣었다. 그리고 따뜻한 샤워를 하며 기름과 각질이 쌓였을 피곤한 얼굴을 벅벅 닦았다. 개운보다도 개안한 느낌이었다. 인간의 안구는 어쩜 이리 예민한지.
샤워를 마치고 거울을 본 나는 놀라워서 잠시 굳었다.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나는 분명히 아주 조금은 예뻐져 있었다. 자고 일어난지 얼마 안되었지만, 여러모로 흡족한 하루다.
나는 점심이자 첫 끼로 배달음식을 고려해 보았다. 아침까지 작업하면서 위장이 굶어 죽겠다며 사정한 것이 기억났다. 금융어플을 열어 지금까지의 월 지출을 확인해보았다. 음, 난 더 적게 쓰고 싶어 정한 예산이 있었는데, 이미 훌쩍 뛰어넘었네. 사실 시켜먹는다 해도 먹고싶은 메뉴도 없다. 어차피 내게 큰 효용이 없으니...
그래, 그러니까... 요리를 하자.
나는 열흘 전 산 다섯 개의 토마토 중 남은 두 개를 꺼내 씻었다. 냄비에 물을 끓이기 시작하고, 통밀 푸실리 파스타 봉지를 열었다. 어떤 요리를 할지 아직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결과물은 매우 만족스러웠기 때문에, 이 글의 말미에 기록할 예정이다.
요리 또한 분명히 노동이다. 불은 뜨겁고, 시간과 간보기 등 이것저것 신경쓸 것도 많다. 요리가 맛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면 입 짧은 나는 몇 입 못먹고 음식물 쓰레기봉지를 집어들 것이다. 운이 좋게 맛이 괜찮아서 식사를 하고 나면, 1인분을 해먹었는데도 설거지거리가 한가득 나온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기분이 썩 좋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백수의 토마토 파스타 스튜" 1.5인분
재료: 토마토 2개, 푸실리(아니면 그냥 짧은 스타일의) 파스타 1인분, 냉동 닭가슴살(어른 남자 주먹 하나에 들어갈 정도?), 버터(스틱형에서 스틱 1개), 올리브유, 소금, 라면스프(꼭 필요하지는 않지만, 맛을 세 배 정도 업그레이드 해준다.)
1. 파스타를 끓는 물에 넣는다. 물에는 소금을 넉넉히 넣어 짭짤하게 해준다.
2. 토마토를 엄지손가락 크기로 쑹덩쑹덩 썰어준다.
3. 파스타가 반쯤 익었을 때, 냉동 닭가슴살을 투하. 해동 필요없다.
4. 닭가슴살이 다 녹아 익기 시작하면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다.
5. 닭가슴살에 투명한 부분이 없으면(거의 다 익은 것으로 보이면) 냄비에서 면수를 빼준다. 전부 빼지는 않고 파스타와 닭가슴살이 자박하게 잠길락말락할 정도로 남긴다.
6. 올리브유 한 스푼, 버터, 토마토 썰어놓은 것을 모두 투하.
7. 재료들이 고루 섞이고, 토마토 물이 빨리 나오도록 계속 저어준다.
8. 토마토가 흐물흐물해지면, 국물 맛을 본다. 좀 더 자극적인 맛을 원한다면, 라면스프를 첨가한다.
9. 원할 때까지 끓인 후,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