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무 Feb 26. 2024

지하철 2호선에서 만난 은인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작은 날갯짓

2호선 맨 끝 칸에 오른다. 가방을 앞으로 끌어안고 자리에 앉는다. 자리가 널널한 일요일 저녁이라 양옆 사람과 한 칸씩 떨어져 앉는 행운을 누린다. 주머니에서 에어팟을 꺼내려다 들을 만한 노래가 떠오르지 않아 팔꿈치에 껴놓은 책을 펼친다.


책 속에 한창 몰입해 있을 때, 다음 역에 닿아 조금씩 속도를 줄이는 열차 안에서 낯선 말을 듣는다.


“이번 역은 서울대입구역입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감사합니다.“


승강장에 도착하여 문이 열리기 직전까지 기사님께서 승객들에게 건네는 마지막 인사다. 참으로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


다음 역에 도착하면 또 기사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두 눈은 여전히 글자를 향해 있지만 한층 곤두선 청각에 집중력이 떨어진다. 뇌는 눈보다 느려져서 눈동자의 속도를 제때 따라가지 못하고 허겁지겁 쫓아간다. 어느새 눈앞의 문장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고, 귀를 쫑긋 세우곤 반가운 목소리를 기다리고 있다.


다음 역이 가까워지고 녹음된 안내 방송과 광고가 끝나자, 기다렸던 기사님의 음성이 들려온다.


“이번 역은 낙성대역입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 말이 이렇게 다정할 수 있는 말인지 나는 몰랐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과의 작별을 소중히 여기는 기사님의 마음이 보인다. 그 사소하고 애틋한 마음 씀에 감탄하며 서서히 책에서 눈을 떼고 창밖을 본다. 이따금씩 지나가는 미세한 불빛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깜깜한 터널 벽면을 비추는 그곳 외에는 마땅히 시선을 둘 만한 곳이 없다. 아침부터 푹 빠져 있던 책도 나에게 이 순간만큼 흥미롭지는 않다.


그렇게 열차는 제 길을 따라 가고, 사당 역에서 막 출발해 방배 역을 향하는 순간에도 나는 다음 방송을 기다린다. 그런데 이번에는 역에 도착하기도 전에, 성우의 안내 멘트와 광고가 나오기도 전에 예상치 못한 말이 들린다.


“살다 보면 행복한 날들도 있고, 불행한 날들도 있습니다.

지금은 불행하더라도 행복한 날이 올 것입니다.

무너지지 마십시오.

포기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끝내기 전까지는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남은 하루 행복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문득, 만난 적도 없는 그의 얼굴이 보고 싶어진다. 손을 마주 잡고 나도 고맙다고, 당신에게도 행복한 하루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짧은 순간에 다양한 생각이 스쳐간다. 한편으로는 용기 있는 저 희망과 격려의 말에 경탄하고, 언어의 이면에서는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자의 마음을 몸소 느낀다. 나는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사람을 변함없이 동경한다. 삶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그 마음을 숨김 없이 드러낸다. 그런 진심어린 마음을 마주할 때면 늘 경외를 표하며 나도 저런 삶을 살리라고, 저런 어른이 되리라고 다짐한다.


나는 기사님의 마음을 들여다본다. 그는 어떤 마음으로 저 글을 썼을까. 늦은 밤, 여느 직장인과 똑같은 퇴근길을 거쳐 집에 도착한다. 가족들과 아낌없이 인사를 나누고는 종이와 펜 한 자루를 가지고 고요해진 주방으로 향한다. 식탁 앞에 앉아 생각한다. 지하철에 올라타는 지친 몸들을, 자신의 언어에 마음 깊이 미소 지을 얼굴들을. 그렇게 고르고 고른 언어들을, 내일부터 자신이 운행하는 열차에 탄 사람들에게 매일같이 전하겠노라 마음 먹는다.


내가 좋아하는 일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은 나의 오랜 꿈이다. 나는 이것이 큰 꿈이라고 생각했으며, 나와 아주 멀리 있는 꿈이라고 생각했다.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지, 어떻게 하면 꿈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지 오래도록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왜 나는 반드시 거창한 목표를 이뤄야만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좋아하는 일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정말 ‘대단한’ 사람들만 할 수 있는 일일까?


‘감사합니다’라는 작은 말에도 나는 분명 따뜻해졌고, 진심어린 위로의 말을 듣고 나니 정말로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어떠한 거짓도, 꾸밈도 없이 전해진 마음이었다. 그 마음보다 대단한 것이 있을까? 나는 그 순간을 도시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으로 간직했다. 맞은편에 앉은 저 사람들도 나와 같은 마음을 하고 앉아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묘한 공동체 의식마저 생겨났다.


그날 열차 안에서 나는 기사님의 마음이 익명의 승객들에게 닿아 일으킨 기적을 보았다. 그것은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작은 날갯짓이었다. 누군가 용기 내어 건넨 말이 내 안에 움을 틔우고, 나도 그를 닮아가며 다른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일 것이다. 그렇게 조금씩, 아주 조금씩, 세상은 더 따뜻한 곳이 되어간다. 환대하고 환대받는 곳이 되어간다.


이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본다. 나는 무얼 할 수 있을까. 나는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울릴 수 있을까. 내가 가진 가능성을 하나둘 펼쳐본다.


스물다섯 살, 만으로는 스물세 살! 하고 싶은 일도 많고 할 수 있는 일도 많은 나이다. 나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펼치고 시험하며 후회 없는 20대 중반을 보내고 싶다.


나는 작은 일부터 시작하여 큰 사람이 될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로 크고 작은 행복을 전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지하철 문이 열릴 때마다 승객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는, 따뜻한 위로의 말로 무뎌진 심장들을 다시 벅차오르게 하는 멋진 2호선 기사님처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