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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희구 Jan 10. 2021

반쪽의 이야기

이것은 사랑 아닌 사랑이야기


사진 출처: IMDb (이하 모든 사진은 IMDb 출처이다)



영화 <반쪽의 이야기>에는 한 쌍의 장면이 있다. 각기 다른 시기에 제시되는 두 개의 장면이지만, 같이 붙여 놓아야만 비로소 의미를 발생시키는 한 쌍의 이미지. 먼저 처음의 장면을 보자. 주인공 엘리(리아 루이스)는 짝사랑하는 애스터(알렉시스 러미어)와 함께 합주실에서 노래 연습을 한다. 선생님의 지휘 아래 합주가 시작되자 일부 학생들은 악기를 연주하고 애스터를 비롯한 다른 학생들은 노래를 부른다. 분명 많은 학생들이 입을 열고 노래를 부르지만 영화 내에서 노랫소리는 애스터의 목소리 하나로 좁혀진다. 이때 카메라는 엘리의 얼굴에서 애스터의 얼굴을 오간다. 엘리에게만은 애스터의 목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러나 카메라는 애스터에게 몰두한 엘리의 감정을 잡는 데 길게 시간을 들이지 않고 문득 바깥으로 넘어간다. 합주실이 있는 건물 밖 운동장에는 애스터를 짝사랑하는 또 다른 아이, 폴(대니얼 디머)이 있다. 풋볼팀 소속으로 운동장에서 훈련을 하고 있던 그는 문득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건물의 창을 보며 미소를 짓는다. 예고편을 통해 줄거리를 대강 알고 있는 우리는 그가 애스터의 노랫소리에 반응한 것이라 여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폴은 정말로 애스터의 목소리를 듣고 웃은 걸까. 내게 있어 이 장면의 핵심은 엘리가 애스터에게 빠졌다는 진술이 아니라 의문을 일으키는 폴의 미소에 있다. 그는 애스터의 목소리를 들었을까.


폴이 애스터의 목소리를 듣고 웃은 것이라는 잠정적 추론에는 찜찜한 구석이 있다. 우리는 직전에 애스터의 노래가 엘리의 얼굴에 가닿고 엘리의 시선이 다시 애스터에게로 향하는 것을 보며 엘리가 애스터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것을 정확히 확인했다. 하지만 카메라는 창밖을 넘어 폴의 얼굴로 향할 때 애스터의 목소리를 대동하지 않는다. 그저 폴이 단체 노랫소리를 듣고 미소를 짓는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가 그 많은 목소리 중에서 애스터의 목소리를 판별해서 듣고 반응한 것이라 확신할 수 없다. 실로 폴은 애스터의 목소리에 대해 설명하지 못한다. 폴이 아직 엘리의 마음을 모르던 때, 엘리의 도움을 받아 애스터에게 연애편지를 쓰던 때, 두 사람은 애스터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때 엘리는 애스터의 목소리에 대해 누구라도 감동할 만한 묘사를 하는데, 그에 반해 폴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이러한 차이는 다독가인 엘리의 풍부한 어휘력에서 비롯한 것일 테지만, 폴이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에 대해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은 위에서 언급한 장면과 함께 특기할 만하다. 그는 사랑의 감정을 안다고 확언하지만 애스터를 알지는 못한다. 그는 애스터의 노랫소리를 듣고 반응한 것이 아니라, 그녀가 거기 있음을 상상하고 즐거워한 것이다.





폴이 창밖에서 노래를 듣고 반응하는 모습은 뒤에 한 번 더 나온다. 예고한 대로 ‘한 쌍’에 속하는 나머지 장면이다. 어느 늦은 밤, 엘리는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른다. 평소의 말씨나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여리고 부드러운 노랫소리. 이 아름다운 선율이 창밖으로 흘러나가 당도하는 곳은 잠시 멈춰 서서 창을 올려다보고 있는 폴의 얼굴이다. 이때 그의 입가에 스치는 미소는 엘리가 거기 있음을 상상하며 즐거워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엘리를 듣고 보았기 때문에 웃은 것이다. 화면은 폴이 엘리의 목소리를 들었음을 분명하게 적시한다. 창은 열려 있고, 그 사이로 엘리가 보이며 노래를 부르는 사람 또한 그녀뿐이다. 그리고 그 노래에 반응하여 폴은 표정의 변화를 보인다. 자, 그렇다면 질문해보자. 영화는 왜 폴로 하여금 창밖에서 노래를 듣도록 한 것일까. 왜, 애스터와 엘리의 노래에 각각 다르게 반응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영화의 뒷이야기를 미리 끌어올 필요가 있다. 바로 폴이 엘리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다. 유의할 건 폴이 엘리의 노래를 듣고 한눈에 반하거나 한 건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천천히 엘리를 알아가며 그녀에 대한 정보를 받아들이고 정을 쌓아 올리다 마침내 사랑에 다다른다. 애스터에서 엘리에게로 향하는 폴의 감정을 고려해보았을 때, 두 감상 장면(폴이 창밖에서 노래를 듣는 모습)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들었다고 상상하며 기뻐하는 장면과 실제로 듣고 즐거워하는 장면의 대비는, 아마도 ‘진정한 사랑이란 어디에서 비롯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일 테다. 폴이 애스터에 대한 마음을 접고 엘리에게로 향하는 것은 수많은 하이틴 로맨스 장르에서 되풀이된 공식을 떠오르게 한다. 수수하고 눈에 띄지 않지만 알고 보면 사랑스러운 성격을 지닌 여주인공은 학교 제일의 미남을 짝사랑한다. 이 행운의 남자 앞에는 그를 유혹하는 절세미녀들이 있는데, 어느 날 여주인공의 매력을 발견한 그는 점점 그녀에게 빠져들다 가장 중요한 건 역시 내면이라는 걸 깨닫고 그녀를 택한다. <반쪽의 이야기> 속 폴의 마음의 행로는 대충 이런 스토리를 연상시킨다. 과연 영화는 그런 클리셰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가? 당연히 아니다. 폴은 최고의 미남은커녕 눈에 띄는 학생도 아니다. 무엇보다 엘리는 폴의 선택을 받고 황송해할 여자가 아닐뿐더러 그녀의 마음속엔 애스터가 있다. 영화가 설렘에 모든 걸 내맡긴 채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감정과 직접 부딪치며 몸으로 습득하게 된 사랑의 감정 사이에 저울질을 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영화는 두 감정을 이성애적 로맨스라는 측정기 위에 올려두지 않는다. 아, 이렇게 표현을 해보면 어떨까. 영화는 이성애적 로맨스라는 범위에서 측정될 수 없는 감정들의 무게를 재보려다 실패하고 깨달음을 얻는 이야기라고 말이다.




폴이 엘리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가기 전까지, 우리는 엘리에 대한 그의 마음을 이성애적 방향으로는 생각하지 못한다. 영화는 그가 설레는 애스터와 편안한 엘리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물론 폴의 감정 변화가 일어나는 것으로 추정되는 사건이 보이기는 한다. 자신이 개발한 타코 메뉴를 홍보하기 위해 엘리가 각 신문사마다 편지를 쓴 것을 알게 되는 때, 그는 적지 않은 감동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어떤 생각에 골똘히 잠긴 채 엘리 옆에서 밤을 지새운다. 영화 속에서 그의 마음이 애스터에서 엘리에게로 반전된 순간을 특정 지을 수 있다면 아마도 이때가 그때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정작 영화를 보면서는 ‘아, 폴의 마음이 변화하고 있구나’라고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가 저 순간을 폴의 마음이 변하는 분기점으로 여기는 것은 오로지 그가 엘리에게 입을 맞추었고 우리가 사후적으로 그 사건의 조짐을  찾으려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전까지는, 우리는 그 어떤 성적 긴장감이나 설렘을 두 사람 사이에서 느끼지 못한다(엘리의 성적 지향을 생각하면 이는 당연하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폴은 엘리가 자신의 키스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뒤로 빼자 외려 놀라는 눈치다. 그는 묻는다. “내가 키스하는 거 싫어? 왜?” 


폴의 당황하면서도 의아하다는 표정과 의문은 한 가지 사실을 전한다. 그가 엘리와 사랑에 빠졌을 뿐 아니라 자신과 그녀 사이를 이미 로맨스 장르로 구분 짓고 기정 사실화시켰다는 사실이다. 둘 사이에 진한 우정의 기미만 있었을 뿐, (이)성적 긴장감이나 케미가 없었음에도 말이다. 물론, 이때 우리는 ‘우정은 사랑의 다른 얼굴이다’와 같은 말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결론은 영화가 이성애자 남성과 동성애 지향의 여성을 친구로 등장시킨 까닭까지는 밝히지 못한다. 영화는 어째서 두 주인공 사이에 멜로 기류가 없었음에도 폴로 하여금 엘리에게 사랑을 느끼게 만들었을까. 왜 그가 그녀와의 사랑이 쌍방향이라고 믿도록 만들었을까. 이에 대해 나는 이런 추정을 한다. 아마도 영화는 남, 녀 사이의 사랑을 이성애적 로맨스 이외의 것으로는 상상해보지 못하는 빈곤한 상상력을 보여주려 했던 것이라고 말이다. 폴이 엘리에게 키스를 거부당한 뒤 당황스럽다는 듯 “싫어?”라고 묻는 것은, 그녀가 자신에게 보여준 우정의 징표(신문사에 연락하기)를 하트 시그널 이외의 것으로 읽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자. 만일 엘리가 남자였다면, 폴은 그의 우정에 깊은 감사를 표했을 것이다. 밤새 고민하다 그의 입술에 입을 부딪는 것이 아니라. 나는 <반쪽의 이야기>가 이성애적 로맨스에 잠식당한 우리 일반의 상상력이 놓치는 관계의 넓은 그물망을 조망한다고 생각한다.


‘우정을 사랑으로’가 아니라 ‘사랑을 우정으로.’ 그러니까 사랑을 여성과 남성의 성애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정 그 자체로 보겠다는 영화의 선언은 사실 첫 장면에서부터 나온다. 엘리가 작성한 사랑에 관한 에세이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인들은 사랑을 자신이 잃어버린 반쪽이라 여겼다. 인간의 몸은 본디 두 개의 신체가 하나로 합쳐져 있는 완벽한 상태였지만 신의 질시로 갈라지게 되었고, 외로움에 허기진 우리는 평생 자신의 반쪽을 찾아 헤매게 되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낭만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기에 남녀 사이의 로맨스가 반드시 들어서야 할 자리 같은 건 없다. 우리는 엘리의 설명을 들으며 나의 허기짐을 채워줄 사랑에 대한 환상, 즉 이성애에 관한 수많은 내러티브를 환기하지만 정작 잃어버린 반쪽이 반드시 이성이어야 한다는 말은 들리지 않으며 화면 어디에도 표시되지 않는다. 이것이 엘리가 이 영화는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고 한 이유이다. 만일, 당신이 사랑을 남녀 사이의 오가는 것으로만 한정 짓는다면 말이다. 영화는 사랑을 낭만적 환상이 아니라 삶에 필요한 현실적 조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으로 본다. 엘리가 고대 그리스인들의 사랑에 대한 믿음을 읊기 전, 화면에 “사랑이란 완전함에 대한 추구와 갈망에 붙인 이름일 뿐이다(플라톤 ‘향연’)”라는 문장이 떠오르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이 말은 얼핏 사랑을 위대한 형상에서 초라하고 작은 것으로 축소시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형태를 구분 짓지 않음으로써 더 거대한 사랑을 소환한다. 그러나 사랑이 그처럼 작고 거대한 것일 수 있음을 모르는 시절의 폴은 엘리가 애스터를 바라보는 눈길을 확인하고서야 그 마음의 행방을 알게 된다. 그는 말한다. “그건 죄악이야.” 



이 이야기가 펼쳐지는 공간인 스쿼하미시는 개방적 사고를 지닌 이들에겐 헬쿼하미시로 불릴 만큼 보수적인 마을이다.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학생들이 결혼을 약속하고 부모는 그를 장려한다. 굳건한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에 대한 믿음은 거의 모든 마을 사람들이 참석하는 교회를 중심으로 탄탄히 유지되는 것으로 보인다. 폴 역시 주말마다 교회에 참석해 정상이라고 일컬어지는 관념들을 흡수한 청년이다. 그의 균일하고 안정적이었던 세계관은 엘리로 인해 혼돈을 맞이한다. 자신이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이 어울려서는 안 되는 죄인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폴은 그녀를 내치지 못하고 외려 동성애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한다. 그녀를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이는 그가 선천적으로 마음이 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를 이미 보았기(들었기) 때문이다. 버틀러와 지젝이 말하듯, 우리는 눈 앞에 마주한 대상에 대해서는 추상적 관념에 근거한 폭력을 쉬이 저지르지 못한다. 폴에게 엘리는 그가 보고, 듣고, 부딪쳤던 실재하는 사랑의 대상이다. 그는 그녀를 멀리하기보다는 자신의 고정되어 있던 관념을 틀어 그녀를 받아들인다. 교회에서 한차례 이어지는 그의 스피치는 얼핏 애스터에 대한 조언 같지만, 실은 엘리를 향한 사과이다. 이때 그가 엘리의 성적 지향을 인정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무지를 사과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사죄는 그가 엘리에 대한 정을 거둬들이지 못해 어쩔 수 없이 하는 허용이 아니라, 그녀를 있는 자체로 계속 사랑하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대목이 십 대들이 등장하는 다른 어떤 영화보다 사랑과 인간관계에 대한 넓은 상상력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폴의 엘리에 대한 지속적인 사랑의 약속은 그가 자신을 레즈비언에게 이용당한 불쌍한 남자애의 자리에 위치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며, 그가 사랑하는 남녀의 관계가 반드시 이성애로 귀결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실패한 첫사랑과 친구로 남는 십 대들의 이야기는 봤어도 이성애주의를 내파시킨 다음 서로 사랑으로 굳건히 결속하는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는 이제껏 본 적이 없다.





영화에는 심금을 울리는 한 쌍의 장면이 하나 더 있다. 엘리와 폴이 기차역에서 마지막 인사를 나누던 장면. 레즈비언이 주인공인 영화를 다루며 영화의 엔딩에 애스터가 아닌 폴이 나온다는 점에 혹자는 불만을 가질지도 모르지만, <반쪽의 이야기>가 다루고자 하는 건 두 십 대 여성의 사랑이 아니라 어느 두 영혼이 여러 장애를 뚫고 서로의 반쪽이 되는 이야기다. 이때의 반쪽은 반드시 성애의 대상이 될 필요는 없다는 것이 요지이고 말이다. 여하튼, 영화의 엔딩은 대학으로 떠나는 엘리를 폴이 배웅하는 장면이다. 엘리가 탑승하자마자 기차는 출발하고, 폴은 달리는 기차를 따라 뛰기 시작한다. 울지 말자던 엘리는 창 밖의 모습을 보고 눈물을 참지 못한다. 그녀는 울음을 터뜨린다. 폴의 달리는 모습을 보며 우리가 떠올려야 할 장면은 앞서 그와 엘리가 함께 영화를 보던 때이다. 두 사람이 보던 영화 속에서 남자는 여자가 탄 기차가 움직이자 같이 달리기 시작한다. 이 장면에서 엘리는 어차피 따라잡을 수 없는 기차를 따라 달리다니 남자가 멍청하다고 말했다. 반면 폴은 남자는 그저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고 싶을 뿐이라 했었다. 이 대화를 기억한다면 폴의 달리기 장면은 애틋하다. 그는 뛰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보이니? 내 마음이야.’ 씩씩하게 떠나던 엘리가 그를 보며 울고 마는 건 그 마음을 수신했기 때문이다. 사랑에 관한 많은 영화들 중, <반쪽의 이야기>는 내가 가장 부러워할 만한 사랑을 그린 영화다.      




*위 글은 본인 블로그(https://blog.naver.com/castleinthetrees)에도 올라온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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