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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희구 Nov 22. 2020

윤희에게

달이 차오르는 이유는 새로이 온 봄

사진 출처: 네이버 무비


두 여성의 사랑을 그렸다는 점에서 <윤희에게>는 토드 헤인즈의 <캐롤>과 적잖이 비교되었다. 그러나 많은 면에서 두 영화의 결은 다르다. 사랑이 시작될 때의 설렘이나 자신의 마음에 대한 자각, 혹은 주위의 압력을 뚫고 끝내 이뤄지는 사랑이 여기에는 없다. 주인공 윤희와 쥰은 고등학생 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다. 둘은 각자의 마음을 숨기도록 강요받은 채 오랜 세월을 살아왔고, 이제 지나간 사랑을 되찾겠다는 열정도 없다. 영화가 사랑해서 상처받았던 두 여성을 등장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가 시작하면 화면에 비치는 것은 움직이는 기차 안의 창문이다. 규칙적인 기차소리를 배경으로 차창 밖 풍경이 열심히 흐르면 어느덧 창문의 오른쪽 하단에는 ‘윤희에게’라는 글씨가 새겨진다. 영화의 타이틀이 소개된 것이지만 언뜻 보면 편지봉투에 수신인의 이름이 쓰인 것으로 보인다. 실로 이어지는 장면은 마사코 고모가 쥰이 윤희에게 쓴 편지를 발견하는 모습이다. 부지런히 달리던 기차는 쥰이 옛사랑에게 발송한 마음이라 보아도 무방한 것이다. 흥미로운 건 이 기차가 윤희와 새봄이 쥰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올라타는 것이며,  글이 새겨졌던 창 옆에 당사자가 아닌 딸이 앉는다는 것이다. 왜일까. 얼핏 이해가 가지 않지만,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결국 쥰과 윤희가 세월과 망설임을 건너도록 만드는 건 그녀의 행동력이기 때문이다. 쥰으로부터 온 편지를 먼저 발견한 새봄은 그 안의 내용을 골똘히 들여다보다 엄마의 과거 사진들을 들춰보고 현재를 짚어보기도 한다. 그녀는 오랜 세월 엄마가 간직해온 비밀에 놀라지 않는다. 다만 엄마가 웃기를 바라며 그녀를 쥰에게로 이끈다.



영화의 공간이 쥰이 있는 곳으로 넘어가기까지, 윤희와 새봄이 서로를 마주보는 장면은 없다. 두 사람은 같은 공간을 점유하지만 마음을 나누지는 않는다. 식사를 할 땐 대각선에 앉아 그릇만 쳐다보고, 대화를 할 땐 새봄이 설거지를 하는 윤희의 뒷모습을 보며 이야기를 하는 식이다. 부엌만이 아니라 방 안이나 침대 위에서도 새봄은 언제나 엄마의 등을 바라보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윤희는 돌아보지 않는다. 이러한 비대칭은 두 사람의 서먹한 관계가 둘 모두의 문제라기보다 윤희가 그어 놓은 선에서 비롯된 것임을 짐작케 한다. “남은 생을 벌”이라 여기며 살아가는 그녀에겐 딸조차 들이지 못할 만큼 비좁아진 마음의 무게만으로도 충분히 피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밤 그녀의 뒤에서 흘러나오는, “난 엄마에게 짐이었네”라는 딸의 고백에 윤희의 마음은 흔들린다. 엄마에게 짐이 아니라 삶을 나누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새봄의 말 속엔 윤희의 역사에 대한 긍정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쥰의 편지를 보고 일렁이는 마음을 부여잡았던 윤희였지만 결국 그녀를 움직이는 건 잊지 못한 추억이 아닌, 저 울타리 밖에서 괜찮다며 그녀를 불러들이는 새봄의 손짓이다. 딸의 인정을 받아들이면서 윤희는 조금씩 변화한다. 그러자 초라한 모양새로 담배를 피우던 그녀 위에 떠 있던 갸름한 초승달도 서서히 차오르기 시작한다.


추웠던 자기만의 겨울을 지나 새봄에게로 다가간 윤희는 그간 하고 싶었지만 담아두기만 했던 말들을 쏟아낸다. 딸의 흡연을 알면서도 모른 척 했던 그녀가 새봄에게 라이터를 달라고 하는 장면은 둘이 처음으로 마주보는 때이다. 이후에는 눈싸움이 벌어지기도 하고 새봄의 남자친구 경수의 존재가 드러나며 옛사랑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쥰이 잠시 언급되기도 한다. 윤희가 모든 일을 세세히 밝히고 쥰 앞에 자신을 드러낼 용기를 끝내 내지 못한 건 문제가 아니다. 새봄과 함께하는 시간 속에서 그녀는 이미 변화를 맞이했기 때문이다. 달이 둥글어지며 더 환해지듯 윤희의 얼굴도 점점 더 밝아진다. 새봄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 “예쁘다”며 사진을 찍는다. 카메라엔 “아름다운 것”만 담기 때문에 인물 사진은 찍지 않는다던 새봄에게 포착된 윤희. 영화 속 사진을 찍는 행위는 아름다운 순간을 포착해 추억으로 남기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오래전 윤희는 카메라를 즐겨 들었으며 쥰을 직접 찍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언젠가부턴 카메라가 고장 나도 그냥 방치해두었는데, 이는 그녀가 삶을 벌로 여기며 자신을 비롯한 주위를 둘러보는 일을 멈춰버렸기 때문이다. 사진을 찍는 것이 어쩌면 그녀에게 고통이었을지도 모르는 건, 그녀를 부정하고 감시하며 원치 않는 남편과 직장을 소개한 오빠의 직업이 사진사이기 때문이다. 오빠의 자그마한 사진관으로부터 멀리 벗어나 하얀 눈밭을 거닐던 윤희는 새봄이 안겨준 카메라를 내치지 않는다. 한 장, 그리고 한 장 더. 딸의 사진을 찍는 윤희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변화는 쥰에게도 찾아온다. 영화를 보면 그녀는 윤희보다 나은 삶을 살아온 것으로 보인다. 그녀에겐 강요된 결혼이 없었고, 이해해주는 고모가 있었으며 고요와 눈과 달과 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이 언제쯤 그치려나”고 말하는 고모를 타박할 때 쥰의 마음이 어떠한지 추측하기란 어렵지 않다. 문 앞까지 찾아온 윤희의 흔적을, 비록 그녀가 몸을 급히 숨겼다 할지라도 쥰이 보지 못하는 건 높이 쌓여 있는 눈 때문이다. 눈은 저 너머를 보지 못하게 하고 마음을 덮어 버리기도 한다. 흘러가는 기차는 상대에게로 흘러가는 마음과도 같지만, 쥰의 마을에 있는 기찻길은 계속해서 내리는 눈 때문에 폐쇄되었다. 눈이 그치기를 바라는 마음은 쌓인 눈을 치우는 반복 노동에 대한 지루함만이 아니라 보지 못하고 내보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초조함이기도 하다. 이 마음을 쥰은 쓸데없다고 표현하는데, 이는 그녀의 진심이 아니다. 애쓴 외면이다. 편지를 쓰지만 결국 부치지 못하는 것, 달을 의미하는 단어 ‘월(月)’을 자신의 고양이에겐 이름 붙이지 못하는 것, “숨기고 살아온 게 있다면 계속해서 숨겨라”라고 조언을 하는 것 모두는 쥰의 마음이 안녕하지 못하다는 증거다. 그런 그녀가 마침내 “눈이 언제쯤 그치려나”라는 쓸데없는 말을 내뱉는 건 윤희를 만나고 온 뒤이다. 눈이 멎기를 바라던 고모의 마음이 쥰에게도 새봄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윤희와 쥰의 만남은 어찌 보면 꽤 싱겁다. 두 사람은 산책을 하며 오랜만이다, 라는 인사를 나누고 카메라는 이들의 뒷모습만을 따라간다. 하지만 이 심심한 이미지 안에 담긴 감정은 극중의 인물만이 아니라 관객의 가슴까지 벅차오르게 할 만큼 농도가 짙다. 영화가 그리고자 한 건 연인의 사랑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인정이기 때문이다. 영화 내내 윤희와 쥰은 수동적인 편이며, 극중의 중요한 사건들은 모두 마사코 고모와 새봄에 의해 진행된다. 세상에 상처입고 스스로를 탓하며 살아온 이들에게 치유란, 자신의 정신력을 무장해 용기를 내는 것이기보다 그들을 괜찮다며 품어주는 타인의 배려이기 때문이다. 윤희와 쥰이 만났을 때 비록 뜨거운 포옹이 없어도 우리가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느끼는 이유는, 그들이 고모와 새봄으로부터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순간이 오기까지 그들은 얼마나 스스로 고독했던가. 그 순간 그들이 느꼈을 것들을 떠올리면 가슴에서부터 후, 하고 한숨이 터져 나온다. 영화가 사랑해서 상처 받았던 두 여인의 이야기를 끌고 온 까닭은 위로를 전하기 위해서이다. 당신은 그 자체로 괜찮습니다. <윤희에게>는 세상의 모든 윤희에게 보내는 새봄의 편지 같은 영화다.




*위 글은 본인 블로그(https://blog.naver.com/castleinthetrees)에도 올라온 글임을 밝힙니다.


** 한편 이 글을 발행하기 위해 키워드를 선택하던 중, 퀴어나 여성영화라는 키워드가 선택지에 없음을 발견했다. 키워드를 본인이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주어진 것 중 골라야만 한다니 애석하다. 물론, 주어진 언어들 중 퀴어와 여성영화라는 단어가 없는 점은 더더욱 애석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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