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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희구 Nov 15. 2020

셀링 선셋

: 이건 페미니즘 텍스트가 아닙니다

사진 출처: Ranny.com


<셀링 선셋>은 LA에 위치한 오펜하임 부동산 회사 직원들의 생활을 담은 리얼리티 쇼다. 이 간략한 소개만을 보았을 때, 당신은 열심히 매물을 소개하고 서류 작업에 열을 올리는 중개인들의 모습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출연진의 직업에도 불구하고 그런 장면은 프로그램의 극히 일부만을 차지한다. 배경은 LA요, 직원들은 모두 여배우만큼 아름다운 여성들이다. 이 쇼가 지향하는 바는 직장인들의 애환이 아닌 럭셔리한 집 안을 돌아다니는 아름답고 당당한 커리어우먼들의 전시다. 이에 더해 리얼리티 쇼의 오랜 전통인 여자들의 갈등은, 이 프로의 최대 셀링 포인트다. 예고편을 보면 이 모든 것이 한 번에 와 닿는데, 때문에 나는 이 프로그램이 넷플릭스 화면에 보일 때마다 진저리를 쳤었다. 예쁜 여자들이 서로 욕하면서 싸우는 광경을 굳이 시간 내서 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는데, 어느 날 홀린 듯이 이 프로를 틀고야 말았다. 주위에서 들려오는 재밌다는 아우성에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셀링 선셋>은 나의 길티 플레저가 되었다. 아주 오랜만에 몰입해서 프로를 보았다. 평소에 잘 안 하는 몰아보기를 하면서까지 말이다. 리얼리티 프로에서 다뤄지는 갈등의 묘미는 영화나 드라마 속 신념의 대립처럼 거창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타인과 마주하며 겪는 사소한 감정싸움과 더 비슷하다. 오펜하임의 중개인들은 일하는 방식이 맞지 않아서 부딪치지 않는다. 그들은 동료가 내 험담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혹은 내가 준 만큼의 애정을 되돌려 받지 않았을 때의 배신감 때문에 다툰다. 시즌1에서 오펜하임에 새로 투입된 에이전트 크리셸은 제작진이 기존 직원들에게 파장을 일으키기 위해 내던진 조약돌이다. 동료들과 친해지기 위해 애를 쓰던 그녀는 직장 내 가십거리를 대화의 소재로 삼는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다비나와 단둘이 얘기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녀는 동료들이 얘기하던 메리의 연애사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사실 본인이 질문을 유도하고 적극적으로 답했음에도 다비나는 다른 직원에게 크리셸의 질문들이 불편했다며 그녀의 인성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말을 한다. 이렇게 심겨진 갈등의 씨앗은 시즌 1 마지막 화에서 메리의 절친인 크리스틴이 크리셸의 인격을 모두 앞에서 깔아뭉갬으로써 폭발한다. 재밌는 건, 이때 당사자인 메리가 크리셸을 감싸준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이후 시즌 2에서 두고두고 이어지는 또 다른 갈등의 시발점이 된다. 메리가 자신의 편을 들지 않고 크리셸을 감싸준 데 분노한 크리스틴이 다비나와 어울리고 메리를 흉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대립 구도는 시즌3 촬영 기간에 터진 크리셸의 이혼 보도 소식과 함께 더욱 심화된다(그녀를 좋아하지 않는 동료들은 이혼의 책임 소재와 관련하여 크리셸에게 의뭉스러운 말들을 던진다).



사진 출처: Netflix


쿡방과 먹방이 갖은 음식을 소개하며 시청자의 흥미를 돋우듯 부동산 예능(?)인 <셀링 선셋>은 아름다운 집을 보는 재미를 확실하게 선사한다. 하지만 시즌2로 넘어오면서부터 프로그램의 정체성은 더 이상 집을 파는 것, 혹은 집을 파는 여성 노동자들의 라이프스타일에 놓여 있지 않게 된다. 그보다는 감정싸움에 열을 올리는 여성들의 신경전에 더 집중한다. 특히 이혼 보도가 난 뒤 파파라치에 시달리며 감정을 추스르는 크리셸의 사생활이 전면 노출되는 장면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 ‘리얼리티’ 쇼의 본질이 결국 출연진의 사생활과 인격을 브랜드로 팔아넘기는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이런 뻔뻔한 셀링 포인트를 알아챘음에도 우리는 기어이 이 쇼를 쫓아가게 되는데, 이는 어느덧 출연진에게 과몰입을 하게 된 까닭이다. 소설과 영화, 드라마 속 주인공들의 삶에 이입하며 함께 울고 웃고 위로를 받듯이, 그들의 삶을 관전한 우리는 어느덧 그들의 감정 상태에 심하게 몰입해 함께 흥분한다. 회사 생활을 하며 얼토당토않은 기싸움에 휘말렸던 일화가 하나둘씩 상기되고 나에게 텃세를 부렸던 선배를 닮은 크리스틴을 보며 몸서리를 치게 된다. 그리고는 제발, 제발 바란다. 다비나나 크리스틴이 말싸움에서 제대로 지는 모습을 보게 되기를, 그도 아니라면 메리의 파트너 로메인이 한 번 더 다비나에게 행동과 책임에 대해 일갈하는 장면이 나오기를 말이다. 그러나 이런 과몰입이 정신건강에 유익할 리는 없으며 사회적으로는 무익을 넘어 해악을 끼친다. 이건 결국 제작진이 만들어낸 엔터테인먼트 쇼가 아니던가 말이다! 한 인터뷰에서 다비나는 자신의 연약한 면이 프로그램에 더 드러났으면 좋았을 거라 말했다. 미국에서 ‘뱀 같은 여자’로 낙인찍힌 다비나를 향한 인격 모독은 상상 이상이다. 그녀는 방송 이미지 때문에 실제로 살인 위협 메시지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처럼 한 일반인이 사회의 다수 구성원으로부터 받은 위협은 리얼리티 쇼에 대한 경종을 울리지 못하고 가십거리로 소비되고 만다. 다비나에 대한 기사를 접한 사람들의 반응은 ‘그럴 만도 하지’이다. 사람들은 방송이 대중의 흥미를 돋우기 위해 악의적 편집을 사용할 수 있음을 인식함에도 종종 그 사실을 잊어버리곤 한다. 특히 일반인이 출연하는 예능에서는 더욱 그러한데, 출연진들이 대중적 페르소나와 사생활을 구별해놓은 스타가 아니기 때문이다. 방송에 출연하는 일반인들은 자신의 재능이 아니라 인성과 굴곡진 인생 스토리로 셀렙의 자리에 오른다. 크리셸이 인기가 많은 이유는 그녀의 인생사가 굳세어라, 캔디이기 때문이다(물론 그녀는 배우로 활동한 전력이 있으며 지금도 간간이 하지만). 크리스틴이 인기 있는 이유는 그녀가 눈부시게 예쁜 악녀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들에게서 매력 있다고 생각하는 요소들은 어느 드라마 속의 연출된 것들이 아니라 리얼리티 쇼에 담긴 그들만의 것이다.



사진 출처: Netflix (위 사진의 인물은 아만자와 크리셸, 아래는 크리스틴)


대중의 관심을 얻은 이들의 삶은 프로그램 밖에서도 계속해서 노출되고 전시되는데, 이때 진짜 날 것이라고 생각되는 면면도 우리가 이미 목격한 그들의 개성과 놀랍도록 일치한다. 크리스틴은 매체 인터뷰에 응해 크리셸 부부가 이혼 전에 상담을 받은 것 같다고 말했고, 크리셸은 그녀가 아무것도 모른다며 거짓말이라고 일축했다. 프로그램 밖에서 이어지는 싸움에 사람들은 크리스틴에 분개하며 비난을 쏟아냈다. 나는 개인적으로 분노하기보다는 일상의 모든 것이 쇼가 되는 이들을 보며 다소 복잡한 마음을 느꼈다. 하지만 단 하나 확실했던 건 내가 크리셸이라는 유명인에게 어느 정도 마음을 빼앗겨버렸고 그녀가 행복하길 원했다는 것이다. 아, 나는 크리셸과 메리와 아만자가 잘 되기를 너무나 응원한다.    

 

<셀링 선셋>에서 유일하게 진실해 보이는 것이 있다면 그건 여성들의 우정, 정확히 말하면 크리셸과 메리, 그리고 아만자가 나눠 갖는 연대감이다. 이 셋은 그저 친한 동료일 뿐 아니라 이혼의 경험과 엄마로서의 삶에 대해 깊은 대화가 가능한 친구들이다. 크리스틴이 메리를 우스꽝스럽게 묘사하며 멍청이라 부를 때 크리셸이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는 장면이나 크리셸에게 쏟아지는 의혹의 화살에 메리와 아만자가 방패가 되어주는 모습은 인생에서 든든한 나의 편을 갖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가슴으로 느끼게 해 준다. 그러나 <셀링 선셋>이 이처럼 여성 친화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할지라도 이 프로가 궁극적으로 여성들에게 도움이 되는 문화 자원이 될 수는 없다. 혹자는 이 프로가 사회에서 성공한 여성들을 보여주며 이들이 서로 협력하고 우정을 쌓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페미니스트 tv쇼”라고 말하기도 한다. 여성들이 서로 싸우고 얄미운 짓을 저지르는 장면들에 관해선, 여성에게만 강요되는 높은 도덕적 기준에 저항하는 것이기에 페미니즘적이라고 한다. 크리셸 역시 <셀링 선셋>이 여성들에게 힘을 주는 empowering 모습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하지만 <셀링 선셋>은 포스트 페미니즘 텍스트이지 페미니즘의 가치를 말하는, 페미니스트들에게 필요한 프로는 결코 아니다. 크리셸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녀의 이미지는 그녀에게만 도움이 될 뿐 일반의 여성들에게 힘을 주지는 못한다.


성공한 여성들이 미디어에 자주 노출되는 것이 일반 여성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건 일부 사실일 것이다. 경제적으로 윤택한 삶을 누리는 여성의 모습은 다른 여성들에게 나도 저런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가능성의 실현이 매우 어렵다는 데에 있다. 유리 천장을 깨부술 수 있을 만큼의 능력을 기르는 것은 본인의 노력 여부에 달려 있다는 빤한 말은 말기 바란다. <셀링 선셋>의 출연진들은 능력에 더해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 가장 각광받고 있는 자원인 외모를 갖고 있다. 사실이 아니라 할지라도 이 프로를 보고 있노라면 LA에서 여성 중개인이 되려면 그만한 외모를 갖추고 극강의 여성성으로 자신을 치장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다. 자라나는 소녀들 중 누구라도 이 프로를 본다면 저들처럼 살기 위해선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가 아니라 예쁜 얼굴과 아름다운 몸을 지녀야만 하는구나, 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외모와 몸이 없는 이들은 어떡하는가. 자신을 깎아내고 깎아내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 건가. 그러나 애초에 그렇게 목숨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기회조차 없는 이들, 어떤 자산도 없는 이들은 어떡해야 한단 말인가(제이슨과의 인연으로 회사에 투입된 아만자를 보면 인맥이라는 자원 역시 중요해 보인다). 혹은 자신의 성을 표현하는 데 있어 하이힐과 드레스가 적합하다고 생각지 않는 여성들은?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결국 코르셋 속으로 자신을 욱여넣어야만 하는 건가. 실제로 <셀링 선셋>의 출연진들이 10cm의 하이힐을 신고 꽉 끼는 드레스를 입은 채 장시간 노동을 하는 것은 이들이 원해서일까, 아니면 특정 노동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타협인 걸까. 우리는 알 수 없다. 프로그램이 이들이 웃고 있는 모습만 보여줄 뿐 하이힐을 벗고 발목을 돌리는 장면 따위는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성공한 여성들의 이미지가 더 자주 노출되어야 하는 건 맞지만 모든 성공한 여성들이 현실의 여성들에게 도움이 되는 건 아니다. 어떤 이미지는 박탈감만을 안길 뿐이고 성공에 필요한 요소에 대해 잘못된 것들을 가르칠 수 있다. 그리고 더 심하게는 사람들로 하여금 역시 직장에서의 남녀차별은 사라졌다고 믿게 할 수 있다. 극히 소수의 여성들만이 그런 경제적 부를 누리고 있음에도 말이다. 


그러나 <셀링 선셋>은 현실의 여성들과 괴리된 환상 속의 여성들을 보여주기 때문에 문제적인 것만은 아니다. 사실 이 프로그램 내부에도 차별은 존재하며, 제작진은 그걸 굳이 감추려 하지 않는다. 오펜하임의 중개인들은 분명 나름의 성공한 삶을 살고 있지만 자신의 뜻에 따라 커리어를 이끌지는 못한다. 이들은 엄연히 회사 대표인 오펜하임 형제 밑에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밑에서 일하기 싫다면 스스로 독립을 하면 되겠지만 거기에 따르는 자원과 인맥을 형제만큼 쌓지 못한 여성들은 그들 밑에서 일해야만 한다. 얼핏 오펜하임 그룹은 사장과 직원들이 가족 같은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그 안에도 편애와 차별은 존재한다. 메리와 오랜 친구이자 잠시 연인 사이였던 회사의 설립자 제이슨은 그녀를 대놓고 편애한다. 회사에 들어오는 좋은 매물이나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는 거의 모두 메리에게로 간다. 다른 중개인들에게도 막중한 프로젝트가 주어지긴 하지만, 메리가 받는 대우는 다른 모든 직원들, 제작진, 그리고 시청자가 인지할 수 있을 만큼 남다르다. 이것은 불공평하다. 다른 직원들이 진지하게 독립을 생각하게 할 만큼. 결국 직원들은 메리가 받는 특별대우에 대해 몇 번 이야기를 하는데, 그때마다 들려오는 말은 같다. ‘메리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건 그녀가 일을 가장 열심히 하기 때문이다. 고로 기회를 원한다면 너희도 그만큼의 노력과 실력을 보여라.’ 그러나 이 말은 얼마나 기만적인가. 실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전적인 지원이 필요하지만 제이슨의 지원은 언제나 메리에게로 향해 있다. 처음부터 좋은 집을 양도받는 것도 구매력 있는 손님을 소개받는 것도 메리다. 다른 중개인들은 발로 뛰어야 하며, 이는 단연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메리에 비해 나머지 중개인들이 무능해 보이는 것이 누구의 탓인가. 


메리에게 주어지는 특별대우에 대한 변명을 듣고 떠올랐던 건 이 프로그램이 신자유주의의 구조 자체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최대한의 자유를 주는 듯 보이지만 위와 아래의 구별은 뚜렷하다. 위에 있는 자들은 아래에 있는 이들에게 너희도 올라올 수 있다고 하지만 선의만 베풀 뿐, 그들을 끌어올려주거나 무언가를 바꾸려 하지는 않는다. 각자도생 하는 이들의 아우성만 들릴 뿐이다. 아니, 사실 그 아우성은 속 편한 자들의 귀 막음에 의해 들리지조차 않는다. 고작 직장 내 편애에 따른 차별로 아우성까지 운운하느냐고 할 수 있겠지만, 나는 프로그램에서 그려졌던 노숙자 문제까지를 포함해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위 사진 속 인물은 메리, 아래는 그녀의 파트너 로메인.


시즌1에서 오펜하임 형제는 직원들을 대동해서 노숙자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봉사활동에 참여한다. 얼마나 길었는지 확인할 길 없는 봉사가 끝난 뒤 형제와 직원들은 다 함께 이런 활동에 참여하는 게 얼마나 뜻깊은 것인지 이야기한다. 제작진은 시청자들이 이 장면을 보고 출연진의 따뜻한 품성에 대해 감동하길 바랐겠지만 실제 내가 느낀 감정은 그와 정반대였다. 화면에는 노숙자들의 모습이 제대로 나오지조차 않았다. 나는 이것이 다분히 의도적인 생략이었다고 생각한다. 너무 적나라한 모습이 나온다면 몇천 달러의 명품 옷을 입고 몇백만 달러의 집을 중개하는 이들의 행색과 너무 비교될 테니까. 그러면 시청자가 문득 양심의 가책으로 불편해질 수도 있고, 집을 보는 재미가 반감될 수도 있으니까. 실로 이 장면 이후 노숙자들과 마주하는 봉사는 프로그램에 다시 등장하지 않으며 출연진들은 원래 자신의 삶으로 돌아간다. <셀링 선셋>이 그리는 세계에는 예쁘고 값비싼 집이 늘 주인을 기다리고 있고, 등장하는 대부분의 손님들은 그 집들을 살 여력이 있어 보인다. 이곳에 집 없는 자들이 틈입할 공간은 없어 보인다. 이들이 이 세계에 진입하려면 누군가의 온정주의적 손길이 있어야만 한다. 아, 크리셸도 어렸을 때 길거리 생활을 하지 않았느냐고? 그녀도 힘든 시절을 거쳤지만 결국 열심히 해서 지금의 자리에 오르지 않았느냐고? 맞다. 그녀와 같은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젊음과 외모라는 자원이 있었다. <셀링 선셋>은 크리셸이 계속해서 어린 시절을 언급하게 함으로써 세상을 바꾸기보다 당신도 변화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녀가 가졌던 운에 대해서는 함구한 채.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는 그냥 손 놓고 방관만 하는 게 아니라 실은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차별을 조장하고 은폐한다. 다시 말하지만 <셀링 선셋>은 이러한 구조를 그대로 닮아 있다. 가령 이 프로그램은 여성들의 근무환경에 대해 뛰어난 폭로전을 벌일 수도 있었다. 시즌1에서 마야가 고객으로부터 원치 않는 접근과 희롱을 받던 장면을 기억하는가. 심지어 그녀는 자신이 유부녀라고 계속 언급하지만 상대는 아랑곳 않고 좋은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지 않느냐고 묻는다. 제작진이 이 장면을 삭제하지 않고 그대로 내보낸 것은 여성 중개인들이 고객에게 희롱당하는 상황을 고발한 것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전체적인 맥락상 그것은 과잉해석이다. 이 사건은 그냥 가벼운 에피소드로 여겨지고 넘어가기 때문이다. 그보다 제작진이 고민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직원들이 일에 집중하지 않고 여고생들처럼 수다를 떠는 것처럼 보일까, 로 보인다. 


사실 모든 출연진이 카메라 앞에 서 있는 매 순간 일을 하고 있는 셈이지만, 카메라는 그들이 오펜하임의 중개인으로서 일하는 모습은 담지 않는다. 사무실에 모여 회의를 할 때나 업무 전화를 받을 때 등 그녀들이 일하는 풍경이 등장하긴 하지만, 카메라는 그들이 조용히 일에 열중할 때나 서류 작업에 한창인 모습은 보여주지 않는다. 대부분 화려한 출근복을 입은 모습을 전신으로 훑거나 서로의 사생활을 이야기하며 잡담을 나누는 모습에 집중한다. 웃긴 점은, 사무실에서 직원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눌 때 카메라가 한 번씩 제이슨이나 브렛의 얼굴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 장면들은 마치 신성한 일터에서 사장 눈치도 보지 않고 떠드는 철없는 저 여성들 좀 보라지, 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이 프로그램의 지류에 흐르는 핵심인 여성 친화적 특징들-끊임없는 수다&자매애 등-은 모두 긍정적으로 그려지지 않고 한 줌의 부정적인 기운들과 뒤섞인 채 등장한다. 그리고 그 부정적인 기운은 특정한 장면만 내보내는 제작진이 뿌리는 것이다. 여성 친화적 특징들이 대중문화에서 언제나 긍정적으로 그려질 필요는 없으며, 현실에서 그것이 이상적인 형태로 구현되는 것 또한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화면에 웃고 떠드는 직원들의 얼굴과 제이슨의 무표정한 얼굴이 갑자기 등장할 때 우리는 제작진의 의도를 간파한다. 저들은 우리가 저 여성들을 비웃길 바란다. 사실상 제이슨이 화를 내거나 어떤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그저 무표정을 짓고 있음에도, 우리가 그녀들을 한심해하길 바라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페미니즘 텍스트가 아니다. 



저널리스트 앤디 자이슬러가 지적한 바 있듯, 미디어 재현에서의 성평등이란 똑똑하고 도덕적인 여자들이 많이 등장하는 게 아니라 똑똑하지 않은 여자들이 그처럼 똑똑하지 않은 남자들만큼의 권리를 누리는 것이어야 한다(<페미니즘을 팝니다>). 나는 이 말에 더없이 동의하는 바인데, 얼핏, 아주 얼핏 보면 <셀링 선셋>은 그러한 자이슬러의 말에 얼마간 들어맞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저기 허점투성이인 여자들이 큰 걱정 없이, 특히 남성 파트너에 대한 의존 없이 잘 먹고 잘 사는 모습이 그려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프로는 위에서 기술한 이유들처럼, 더없이 여성 혐오적이기도 하다. 주요 캐스트가 모두 여성임에도, 이 프로는 모든 여성 출연진을 오펜하임 형제의 남성성의 대척점에 있는 존재들로 구성한 다음 희화화시키고 조롱한다. 거기에 더해 성녀와 악녀로 구분한 다음 싸움을 붙이고 시청자들이 던지는 돌에 맞게 내버려 둔다. 이들을 보면서 모든 페미니스트들이 ‘오, 이게 바로 오늘날 우리 여성들이 처해 있는 상황이야. 우리는 하이힐 신고 드레스 입고 일하느라 너무 힘들어. 우리는 상사 말도 들어야 하고 여자들끼리 경쟁도 해야 해서 힘들어. 이 프로는 우리의 고민들을 그대로 드러내 주고 있어!’ 따위의 말들을 할 거라는 건 착각이며, 그래서도 안 된다. 우리가 미디어에서 보고 싶은 건 현재의 비좁은 구조 속에 내던져진 여성들의 왜곡된 이미지가 아니라 그 구조를 넘어서는 여성들의 파괴적인 이미지이다. 유해한 프로그램이 유익한 프로보다 더 재밌고 더 잘 팔린다는 건 편견이다. 우리는 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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