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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희구 Oct 25. 2020

그들이 우리를 바라볼 때

: ‘우리’를 바라보는 ‘우리’는 누구입니까


사진 출처: IMDb

1989년 4월 19일의 저녁, 센트럴 파크에서 조깅을 하던 퍼트리샤 마일리가 폭행과 강간을 당한 뒤 그대로 죽도록 내버려진다.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그녀가 입은 처참한 피해와 개인적 신상(백인에 아름답고 능력 있는 젊은 여성)은 세간의 공분을 사며 미 전역을 들썩이게 한다. 언론의 집중 관심을 받으며 수사를 시작한 경찰은, 그러나 사건 현장에서 어떤 단서도 발견하지 못한다. 이때 성범죄 전담 검사 린다 페어스틴(펠리시티 호프먼)이 주목한 건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와일딩을 하다 경찰에 연행되어 온 짙은 피부색의 청소년들이다. 사건 용의자가 될 만한 노숙자나 게이 어디 없냐고 외치던 그녀에게 이들은 용의자, 아니 반드시 범인이어야만 하는 집단으로 낙점된다(와일딩은 젊은이들이 다 같이 모여 거리를 배회하며 노는 것을 의미한다. 때로 기물 파손이나 난폭한 행위가 도중에 일어나기도 한다. 하지만 와일딩이라는 단어가 있다 하여 떼 지어 몰려다니는 모든 비백인 청년들이 폭력적 성향을 분출하고 싶어하는 건 아니다. 무리지어 다니는 소년들에 대한 세간의 부정적 묘사는 얼마간 편견과 얽혀 있다. 이는 극중 친구들과 놀거나 구경만 하던 주인공들이 경찰에게 과잉 진압되는 장면에서 알 수 있다).



마일리를 위한 정의를 세우리라 공표한 린다는 할렘에 인력을 투입, 그날 공원에 있었던 불량해 보이는 청소년들을 모두 잡아들인다. 하여 최종 용의자로 추려진 아이들은 당시 열넷에서 열여섯 살이던 다섯 명의 소년들 –앤트론(카릴 해리스), 케빈(아산티 블랙), 레이(마퀴스 로드리게즈), 유세프(에단 헤리스), 그리고 코리(자렐 제롬)가 된다. 그저 공원에 있었을 뿐인 아이들은 퍼트리샤 마일리를 잔인하게 해친 용의자로 확정되어 취조를 받는다. 경찰은 그들을 부모와 떼어놓은 뒤 자백을 강요하고, 아이들은 백인이자 남성이며 어른인 그들의 주먹과 겁박에 속아 거짓 자백을 늘어놓는다. 그렇게 하면 집에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 다섯 아이들의 진술은 어디 하나 일치하는 데 없이 죄다 허점투성이지만 유죄 선고는 가차 없이 내려진다. 무고한 소년들은 각각 5년에서 15년을 구형받는다. 이 이야기는 실화다.




블랙시네마의 새로운 기수로 떠오른 에이바 두버네이 감독이 제작하고 연출한 <그들이 우리를 바라볼 때>는 평범한 삶을 살아가던 다섯 소년이 어느 날 ‘센트럴 파크 조거’(Central Park Jogger) 사건의 용의자로 몰린 뒤 그 오명을 벗기까지의 긴 여정을 담은 드라마다. 사회의 악의적인 편견으로 쓰러지고 추방당하는 인종적 소수자들의 이야기는 실화이건 픽션이건 이제는 우리에게 익숙한 내러티브다. 하지만 아픈 이야기는 언제나 아픈 법. 관건은 이 아픔을 어떻게 전달하느냐이다. 다행히도 늘 이전보다 나은 행보를 보이는 두버네이의 손 안에서 이 아픔은 세심하게 조율되어 그려졌다. 주인공의 삶에 다가가는 두버네이의 접근법은 이 드라마에서 특히 빛을 발하는데, 놀라운 건 그녀가 악인으로 분류되는 이들에 대해서도 꼼꼼한 설계와 거리를 설정한 듯 보인다는 점이다. 오류를 눈앞에 두고도 모르쇠로 일관하는 경찰들의 모습은 공분을 일으키는데, 이때 두버네이는 이러한 풍경이 개개인의 모자란 인성이 아닌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된 것으로 묘사한다. 이 드라마를 보며 개인적으로 소름이 돋았던 건, 린다를 비롯한 모두가 서로 작당을 하되 작당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언론이 주목하고 있는데 그냥 빨리 용의자로 세울 사람 없냐’는 말을 하지 않는다. ‘저 아이들에게 죄가 없어도 그럴듯해 보이니 죄를 뒤집어씌우자’는 말 역시 하지 않는다. 그들은 진심으로 아이들에게 죄가 있다고 믿으며, 그 죄를 입증하기 위해 거짓말을 강요한다. 그리고 그렇게 받아든 자백을 틀림없는 증거라 주장한다. 이들은 심지어 나중에 증거로 발견된, 양말 한 짝에 묻어 있던 정액이 다섯 명의 것과 일치하지 않자 제6의 용의자가 밖에 있는 거라 태연하게 말한다. 이 맹목적인 믿음을 보고 있노라면, 이들의 눈에 무언가가 씌워져 있는 것이라고밖에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사건 기소를 맡은 또 다른 검사 레더러(베라 파미가)는 린다나 다른 경찰들과 달리 흔들린다. 다섯 소년 중 하나인 코리에게 거짓 자백을 강요하고 진술을 비디오로 녹화하던 때, 그녀의 눈빛은 소년을 보며 요동친다. 이미 남자 경찰들에게 구타를 당한 뒤 그 상황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이 원하는 걸 말해주는 것이라 세뇌당한 코리는 오로지 집에 가기 위해 거짓말을 술술 늘어놓으며, 그의 앞에 있는 어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역동적인 동작을 곁들여 가며 연기를 한다. 이때 흥분한 그의 눈과 목소리, 그리고 내뱉는 말들은 가히 가관이며 그래서 보는 이의 마음을 부서지게 한다. 소년은 카메라를 향해 “그게 제 첫 강간이었죠. 첫 경험이자 마지막 경험이 될 거예요”라고 한다. 무시무시한 말과 순진한 코리의 얼굴이 우리에게 안기는 감각은 너무나 기묘해서 말로는 표현이 안 되는데, 이때 레더러의 표정이 그러하다. 코리를 마주하고 있는 순간, 그녀가 그의 무죄를 몰랐을 리 없다. 실로 양말이 발견되었을 때 그녀는 린다에게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묻는다. 그러나 린다는 다시금 피해자를 위한 정의를 외치며 레더러의 정신을 흔들어 놓는다. “지금은 너무 늦었어요. 말씀하셨듯 전국이 보고 있다고요.” 찜찜함에 차게 식어가던 레더러의 표정은 이후 재판장에서 결의에 가득 찬 얼굴로 뒤바뀐다. 이 지점, 자신의 명예를 위해 타인의 눈물을 외면하는 지점에서 레더러는 린다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공모자가 된다. (여기서 우리는 다섯 명의 소년에게 부정의를 선고한 이들이 백인 남성이 아니라 백인 여성이기도 하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린다는 여성에 대한 성범죄에 분개하지만 그녀의 눈에 인종과 계급의 불평등은 그보다 중요하지 않거나 아예 보이지 않는다. 린다의 성 우선주의와 그로 인한 비극은 성과 인종과 계급 중 우선시될 수 있는 범주란 없으며 이 세 가지가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이 드라마의 흡인력은 주인공 다섯 명의 삶이 하나로 뭉쳐지지 않고 각각의 이야기를 지닌 고유한 것으로 취급된 데서 온다. 만일 앤트론, 케빈, 레이, 유세프, 그리고 코리의 개별적 사연이 소개되지 않았더라면 드라마의 러닝타임은 더 짧고 이야기는 훨씬 간결해졌겠지만, 우리는 지금처럼 그들의 입장에 깊이 공감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을 실제 삶의 무게를 지닌 개별적 존재들로서가 아니라 억울한 일을 당한 소년들로만 가볍게 인지했을 것이다. 만일 그랬더라면 이 드라마는 현실의 주인공들에게는 그들의 아픈 사연을 극화하기만 한 다소 부당한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억압당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극으로 다루는 데 일가견이 있는 두버네이는 영리하고도 윤리적이게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녀가 드라마를 만들면서 목표한 바는 사람들이 ‘센트럴 파크 파이브’의 주인공들을 실존 인물로 인식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작품의 제목이 “그들이 우리를 바라볼 때”인 이유다. 원래 드라마 제목은 역사에 기록된 대로 ‘센트럴 파크 파이브’였다. 하지만 두버네이가 보기에 센트럴 파크 파이브라는 용어는 인생이 무너지는 경험을 한 당사자들의 역사와 존재를 지나치게 축소시켰다. 반면 ‘그들이 우리를 바라볼 때’라는 제목은, 이 드라마가 그들에 의해 멋대로 규정되고 존재 지워진 이들의 경험 그 자체를 말하리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왜 주인공들의 삶, 그 곡선 자체를 전달하는 게 중요한지는 뒤에서 더 설명하도록 하겠다).



다섯 사람의 사연 모두가 특별하지만 그중에서도 잊을 수 없는 건 앤트론과 코리의 이야기다. 아버지 바비(마이클 K. 윌리엄스)와 친구처럼 지내던 앤트론은 경찰의 수사를 받게 되며 그와 돌이킬 수 없이 사이가 틀어지고 만다. 배움이 짧아 자신의 권리를 몰랐던, 그러나 경찰의 협박 앞에 흑인이 당당히 맞설 수 없다는 사실만큼은 너무나 잘 알았던 바비는 아들에게 “저들이 원하는 걸 말해줘”라고 한다. 앤트론이 “거짓말을 할 수는 없어요”라고 하자 그는 의자까지 던지며 분노한다. “왜 말을 안 들어? 경찰이 우리 삶을 망쳐놓을 거야. 장난이 아니야. 진짜야......” 이 말을 할 때 바비는 자신과 아들에게 닥쳐올지도 모를 죽음의 위협에 떠는 한편, 본인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절박한 확신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 그는 필사적으로 경찰의 약속을 믿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의 순진한 기대와 달리 형사들은 앤트론을 재판에 넘긴다. 이때부터 바비는 가족에게서 멀어진다. 그 어느 때보다 그를 필요로 했던 순간에 자신에게서 등을 돌리는 바비를 보며 앤트론은 실망감에 눈물을 흘리고 치를 떤다. 이들의 관계는 앤트론이 성인이 되고 바비가 늙고 병약해져 제 몸을 가누지 못할 때까지 회복되지 못한다. 할리우드에서 더 많은 조명을 받아 마땅한 마이클 K. 윌리엄스가 초라한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온 아들 곁을 서성일 때, 아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애증의 공기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어색하게 서 있을 때 화면은 먹먹함으로 차오른다. 그리고 그를 눕히던 아들이 문득 눈물을 터뜨리자 더 세게 안아주지도 미안하다 말하지도 못한 채 그저 고개를 두 번 끄떡이고 마는 그의 모습과 아버지를 차마 용서한다고 말하지 못하는 앤트론의 모습이 나오는 장면은 눈물을 참기가 힘들다.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실제 주인공들과 두버네이 감독이 만났을 때 합의한 내용들 중의 하나는 ‘코리 와이즈의 이야기는 달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코리를 제외한 나머지 네 사람이 감독에게 당부한 내용이었다. 코리의 사연은 특별하다. 원래 그는 경찰이 할렘에서 수색을 벌일 때 용의자 명단에 없었던 인물이다. 한데 유세프가 연행되는 것을 보자 그를 염려하여 경찰서에 함께 동행 했던 것이다. 구석에서 한참 친구를 기다리던 그는 갑자기 경찰들에게 얻어맞으며 취조를 당한다. 네 명으로는 자신들이 구축한 범죄 내러티브가 아귀가 잘 안 맞는다고 판단한 경찰이 공범으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그를 지목했기 때문이다. 그 뒤의 상황은 더 없이 억울한데, 다른 친구들과 달리 유일하게 열여섯이었던 그는 소년원이 아닌 교도소로 보내졌던 것이다. 다른 이들도 후에 교도소로 옮겨갔지만 처음부터 홀로 성인들 틈에서 생존해야 했던 코리는 그야말로 죽음에 가까운 시간을 통과해야 했다. 수사적인 말이 아니라, 그는 정말로 죽을 뻔했다. 



전국을 떠들썩하게 한 유명 범죄자를 반길 재소자는 없었다. 그는 늘 구타를 당했고 죽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 살아야 했다. 살기 위해 독방에 보내 달라고 교도관에 요청한 그는 어두컴컴하고 숨 막히는 그곳에서 자신을 환상 속에 밀어 넣음으로써 삶을 지탱했다. ‘그날 유세프와 거리에 나가지 않았더라면, 여자 친구와 함께 식당에 남았었더라면...’ 어려운 형편 때문에 그를 보러 오지 못한 엄마가 마침내 나타났을 때 그는 차마 억누르지 못하고 그녀의 손을 잡아 온기를 느낀다. 면회 규칙 위반으로 끌려가면서는 눈물을 흘리며 절규한다. “저들이 나를 죽일 거예요. 제발 면회 좀 자주 오세요. 부탁이에요.” 그러나 매순간을 두려움에 부르르 떨면서도 코리는 가석방 심사 때마다 되돌아오는 질문, ‘당신은 유죄 판결을 받았던 당신의 죄를 인정합니까?’라는 물음에는 차마 ‘네’라고 답하지 못한다. 어느 순간부터는 가석방 심사 자체를 거부한다. 고통의 시간을 벗어날 수 있는 문을 스스로 걸어 닫고 무죄를 주장한 그의 마음을 표현할 단어와 문장이 우리에게 있을까.



흥미롭게도 이 드라마는 이야깃거리를 찾아다니던 제작자의 눈에 발굴된 것이 아니라 당사자 중 한 명인 레이먼드가 감독에게 직접 제안을 하며 만들어졌다. 두버네이가 감독한 영화 <셀마>에는 마틴 루터 킹의 업적뿐 아니라 그의 인간적 결점도 가감없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를 본 레이먼드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다룰 수 있는 적임자는 그녀뿐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레이먼드가 생각한, 오롯이 전달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진실’이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감히 짐작컨대, 나는 그것이 ‘센트럴 파크 파이브는 순진한 피해자였다’라는 식의 주장은 아니었을 거라 생각한다. ‘순진한 피해자’는 ‘와일딩을 하는 할렘의 소년들’만큼이나 개인의 인격을 프레임에 가두는 표현이다. 그가 원했던 진실은 아마 자신들의 삶이 몇 개의 단어로 포착될 수 없을 만큼, 그들의 삶을 시청하는 사람들의 것만큼이나 입체적이라는 단순한 사실이었을 테다. 극중 어느 기자는 유세프의 엄마에게 “트럼프가 당신 아들을 사형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묻는다. 이 장면, 그러니까 기자가 질문을 던지고 그 말을 듣는 유세프와 엄마의 얼굴은 방송국의 카메라맨이 찍은 이미지로 나온다. 그러나 이 숏 직후, 유세프의 엄마가 기자에게 정색한 뒤 뒤돌아서서 아들과 부둥켜안는 장면은 다시 원래의 화면에 담겼다. 이 씬에서 사용된 이러한 화면 전환은 언론이, 더 나아가 세상이 그들이 느끼는 감정을 배려하지도 이해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말하자면 <그들이 우리를 바라볼 때>가 담보하고 있는 진실은 사실 린다 페어스틴이 어떻게 행동했고, 그날의 진범이 어디 있었고, 우리의 주인공들이 얼마나 사건과 무관한 지를 역설하는 데서 나오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 경험이 그들의 삶에 어떠한 상흔을 남겼고, 그것에 그들이 어떻게 적절하게 혹은 부적절하게 반응했으며, 나아가 그들이 인간적으로 어떤 결핍을 가진 사람들인지를 보여주는 데에 이 드라마는 온 힘을 다하고 있다. 주인공들의 삶을 온전히 보여주는 것이 이 드라마의 최대 목표여야 했던 이유는 간명하다. 결국 이 모든 비극이 일어난 것은 그들이 단지 할렘의 흑인으로만 보였기 때문이 아니던가. 이들에게 입체성을 부여하는 것은 실존 인물에 대한 배려인 동시에 주제 의식의 표현 그 자체인 셈이다. 이것이 우리가 유세프의 엄마가 코리를 외면하고 레이먼드가 마약 거래로 다시 교도소에 들어가는 것까지 빠짐없이 보게 된 이유이다. 또한 드라마가 무죄가 밝혀진 뒤 주인공들이 삶을 건실하게 회복하는 해피엔딩을 그리지 않은 데 대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뉴욕주는 앤트론, 케빈, 레이먼드, 유세프, 그리고 코리에게 배상을 했지만 공식 사과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 드라마가 공개된 뒤 린다 페어스틴은 감독이 편향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었다며 자신의 무고함을 강조했다. 참으로 숨이 턱 막히는 결과가 아닌가. 하지만 실제 주인공들은 이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담담한 태도를 유지했다. 세상이 호락하지 않다는 걸 진작 깨달은 덕분이다. 하지만 그럼 앎이 몸에 새겨졌다 해서 아무렇지 않은 걸 결코 아니다. 오프라 윈프리를 비롯해 참여한 여러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그들은 한결 같이 말한다. 그들의 고통이 사라지지 않았다고. 다만 그들이 상처를 들춰내고 기억을 복기하며 계속 말을 하는 이유는 세상이 바뀌길 원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미래 세대를 위해 싸우고 있다고 말한다.





분명 고무적인 말이지만 한편으론 한숨이 새나온다. 그들이 말하는 싸움이 조만간에 끝날 것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더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의 다음 다음 세대를 넘어서까지도 종식되지 않을 것이다. 드라마가 공개된 뒤 미 전역은 다시 한 번 들끓었다. 1989년 4월부터 무죄가 밝혀지고 2014년에 법정에서 승소하기까지 주인공들이 겪어야 했던 부정의에 많은 이들이 놀라고 분노했다. 미국만이 아니라 넷플릭스를 통해 드라마가 공개된 많은 나라에서 화제가 되었고 인터넷은 쏟아지는 리뷰와 당시 사건을 분석한 기사로 넘쳐났다. 오프라 윈프리는 이 작품을 통해 세상이 조금 더 나아졌다는 듯이(적어도 그건 보장된 미래라는 듯이) 드라마의 성공을 축하했다(<오프라 윈프리와의 대화: 지금 그들이 우리를 바라볼 때>). 하지만 우리가 올해 목격한 것은 무엇인가? 경찰에게 짓눌려 목숨을 잃어가는 한 흑인의 얼굴이었고, 그가 그렇게 죽은 건 그럴 만해서였다는 혐오의 메시지들이었다. 아카데미에 대한 #OscarSoWhite(오스카는 하얗다) 해시태그운동부터 그러한 흐름을 업고 등장한 <블랙팬서>의 성공, 그리고 <그들이 우리를 바라볼 때>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문화 속에서 분명한 차이를 목격하고 있지만 세상은 여전히 더디다. 끔찍한 건 대중문화에서 그려지는 흑인들의 성공한 이미지가 때로 누군가로 하여금 이제 인종차별은 없다고, 조지 플로이드 사건은 예외라고 선언하게끔 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이제 흑인들의 이야기, 정치적 올바름에 입각한 스토리들은 그만하면 됐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최근에 들었던 가장 끔찍한 말은 백인이 저지른 잘못에 왜 아시아인들이 신경을 써야 하느냐는 말이었다)    



이 글을 어떻게 끝맺어야 할지 모르겠다. 드라마 리뷰에 너무 거창한 말들을 끌고 들어온 것 같다. 하지만 요즘 같은 때에, 하필이면 이 드라마를 보고 인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고만 하는 건 뭐랄까, 영혼이 없는 말처럼 느껴진다. 이 드라마는 조지 플로이드 이후에 나온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나왔다. 때로 메시지는, 그것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그것을 몸에 각인한 사람들에게만 찾아가는 듯하다. 싸움을 하는 사람도, 바라보는 사람도 지치는 일이다.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할 말을 찾아서 글을 마치기로 한다. 그렇지 않다면, 말을 잃어버리고 그대로 놓아버린다면 체념을 하는 일이 될 테니까. 사실 난 패배주의를 상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분노하기 위해서 이 드라마를 찾아보았다. 한 사람의 삶이 이미지 하나로 축소될 수 없다는 걸 되새기기 위해서 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한 편의 영화나 드라마가 세상을 바꾸리라는 건 순진한 꿈이다. <그들이 우리를 바라볼 때>는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을 막지 못했고 그 뒤에 따라오는 더러운 말들도 막지 못했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적어도 이 드라마를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었다. 이건 위로이고 교훈이며 뒤에 전해질 역사다. 이 드라마에 대한 상찬을 쓴다고 세상이 달라질 리 만무하지만 한 명의 관람객으로서 우리가 이 드라마에 보이는 열의가 세상에 어떠한 목소리를 더할 거라고는 생각한다. 그래서 이 드라마가 진지하게 기록되고 기억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작가 리베카 솔닛은 세상은 결국 세상을 바꾸려는 소수에 의해 움직인다고, 그러니 세상의 모두가 변하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러니까 이건, 세상의 변화를 염원하는 이들을 위한 드라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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