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몸은 우습지 않습니다
뒤늦게 <거꾸로 가는 남자>를 보았다. 오래전 유튜브에서 짧은 소개 영상과 함께 그 밑에 달린 공격적인 댓글들을 보았던 기억이 있는 영화였다. 각설하고 말하면 이 영화는 웃기다. 근래 보았던 모든 영상물을 통틀어 가장 크게 웃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유쾌할 수만은 없었는데, 감상을 시작한 지 30분쯤이 지났을 때 머릿속에 퍼뜩 떠오른 어떤 생각 때문이었다. 이는 결코 나의 사생활에 관한 고민은 아니었으니, 바로 영화의 (비) 웃음이 향하고 있는 대상이 여성성 자체인 것 같다는 의심이었다. 나의 의혹을 설명하기에 앞서 일단 줄거리를 살펴보자.
주인공 다미앵은 넷플릭스 줄거리 소개란에 적힌 그대로 남성 우월주의자다. 여성을 성적 존재로만 바라보는 데서 즐거움을 누리는 그를 그보다 더 압축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용어는 없을 것이다. 직장에서 회의에 참석한 유일한 여성 동료가 의견을 밝힐 때 그는 어떻게 행동하는가. 그녀의 말에 귀 기울이고 성실히 답하기보다는 ‘저녁에 시간을 내주면 따로 설명을 해주겠다’며 공개적으로 조롱을 한다. 동료를 공적인 장소에서 연애 대상으로 축소시켜버리는 이러한 행동은 그 자신에게는 자연스러울지 모르나 타인에게는 폭력에 불과할 뿐이다. 지극히 마초적인 아이디어로 회사에서 칭찬을 받은 뒤 친구와 거리를 걸으며 역시나 다른 여성들에게 지분거리던 그는 그만 앞을 못 보고 머리를 크게 다치고 만다. 잠시 혼미해진 정신을 부여잡고 몸을 일으킨 다미앵. 그러나 그의 앞에 펼쳐진 건 전혀 다른 세상이었으니, 그곳은 남성과 여성의 성역할이 완전히 뒤바뀐 곳이다. 늘 먼저 느끼한 웃음과 작업 멘트를 날리는 데 익숙해져 있던 다미앵은 본인에게 꽃혀 드는 여자들의 훑는 시선과 성적인 멘트를 처음으로 경험한다. 그러다 여성 우월주의자 알렉상드라를 사랑하게 된 그는, 과거의 자신이 이용하고 지나쳤던 여성들의 위치에 놓인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니까 <거꾸로 가는 남자>는 페미니즘의 미러링 전략을 차용한 영화라 할 수 있다. 장르적으로 코미디를 지향하고 있는 이 영화의 유머는 여, 남 배우들이 뒤바뀐 성역할을 수행하는 데서 발생한다. 세상이 바뀐 뒤 출근 준비를 하던 다미앵은 자신의 옷장에 꽃무늬 셔츠밖에 없는 걸 보고 놀란다. 그렇다면 오늘은 스포티하게 입어볼까, 라는 생각에 흰 셔츠에 회색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자전거에 올라탄 그는 열심히 페달을 밟다가 엉덩이를 들어 올린다. 이때 화면에 비치는 건 그의 둔부에 핫핑크로 쓰여 있는 ‘HOT’이라는 단어다. 영화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웃음 폭탄기를 가동시킨다. 옷에 굳이 ‘섹시한’이라는 단어를 붙여 여성을 볼거리로 만들던 사회의 괴상한 전략이 남성의 몸을 통해 체현되는 순간, 적어도 여성 중에서 통쾌하게 웃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을 거다. 보는 이의 호탕한 웃음을 불러일으키는 순간은 이뿐만이 아니다. 함께 밤을 보내기 위해 다미앵의 집으로 온 시빌은 그의 가슴에 수북이 박힌 털을 보더니 구역질을 하고는 ‘도저히 못 하겠다’며 도망친다. 이후 다미앵은 다소 부당해 보이는 여성들의 니즈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죄 없는’ 털을 민다. 반면 여성들은 다리털 따위가 자라나서 정글이 되던 말던 신경 쓰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생리대를 회사 사무실 책상 위에 대량으로 쌓아 놓는다. 언젠가 여성주의자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만약 월경을 하는 게 남성이었다면, 그건 부끄럽고 감춰야 할 일이 아니라 매달 자랑을 할 일이 되었을 거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남성의 권력을 쥔 다른 세상 속의 여성들은 정확히 그 말처럼 자신의 생리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외려 자랑스러워한다. 다미앵의 여성 상사가 ‘이번 달은 양이 많아!’라고 호쾌하게 말하던 순간을 떠올려보라.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며 웃는 것이 어느 순간 섬뜩해지는 이유는, 여성의 상황에 처한다는 게 매 순간 저처럼 굴욕적이고 웃긴 것인가, 라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코미디는 단지 다미앵이 자신이 행했던 우월주의자로서의 만행을 그대로 되갚음 당한다는 사실에서 오지 않는다. 그가 여성적이라고 여겨지는 일들을 하는 것 자체가 코미디이다. 우리는 다미앵이 꾸밈 노동을 수행하고 대상화되는 걸 지켜보며 여성의 현실이 폭로된다는 사실에서 웃음을 얻기도 하지만, 주인공이 어울리지 않는 숏팬츠를 입는 것, 그런 옷을 입고 상대에게 교태 어린 표정을 짓는 것 자체에서 이웃음을 얻기도 한다. 다미앵이 사회적 약자로서 행하는 모든 일이 코미디로 전환되는 이 과정에서 우리가 질문할 수 있는 건, 과연 현실 속의 여성들이 하는 모든 게 그처럼 우습냐는 것이다. 당신은 매일 아침 출근하기 위해 부지런히 몸단장을 하는 여성을 보며 쓸데없는 데 시간을 보낸다고 쯧쯧 혀를 차는가? 혹 체제에 굴복했다고 경멸을 느끼는가? 아니면 매 순간 안쓰러움을 느끼는가? 안다. 여성에게 꾸밈 노동이 강요되고 있는 현실을 이 영화가 효과적으로 가시화시켰다는 것을. 하지만 영화가 여성적인 것에 대한 잘못된 시각을 교정하기보다 여성적인 것을 체화한 남성을 우습게 보기만을 고집할 때, 여성적인 것은 여전히 이차적이고 우습고 혐오스러운 것으로 남는다. 이와 관련해 제기할 수 있는 또 다른 질문은, 남성에게 여성적인 면은 허용될 수 없느냐, 는 것이다. 여성에게나 남성에게나 여성적인 특징이 수치스러운 것이라면, 여성스러움은 이 세상에서 추방되어야만 하는 것인가.
어느 모로나 이 영화가 찝찝함을 남길 수밖에 없는 궁극적인 이유는 평행 세계가 결국 어느 것도 해결되지 않은 곳이기 때문이다. 성역할만 바뀌었을 뿐 페미니즘의 가치는 전혀 실현되지 않은 곳이 성해방의 종착지일 수는 없다. 여성 우월주의로 구축된 세계는 사이다가 아니라 또 다른 지옥이다(그곳에선 분명 남성이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단어가 될 것이다). 생각해본다. 만일 다미앵이 떨어진 곳이 여성 상위의 세계가 아니라 페미니즘의 원대한 기획이 실현된 유토피아 세상이었다면? 이 또한 안다. 이는 어려운 상상이며 그로부터 어떤 유머들이 상상되기란 어려워 보인다는 것을. 하지만 이 영화가 그저 페미니즘을 차용한 게 아니라 진짜 그 가치를 실현하고자 했다면 지금처럼 섬세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나오진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영화 속에 나오는 여성들은 하나같이 무자비하다. 물론 이게 문제가 될 수는 없다. 스크린 속의 여성들이 언제나 여성주의적 인식론을 장착하고 나와야 하는 건 아니니까. 그러나 내가 궁금한 건 어째서 저 뒤바뀐 세상에서는 남성주의 인식론을 가진 캐릭터가 제대로 묘사되지 않느냐이며 왜 젠더에 대한 의제가 볼품없이 연애관계로만 수렴되느냐는 것이다. 요컨대 <거꾸로 가는 남자>는 세상을 거꾸로 바꾸면서 여성주의 의제를 증발시켜버린 것만 같다.
영화 속에서 성차별은 구조적 문제임이 자명하지만 극 중의 인물들에게 화두는 연애관계 속 여남의 역할에 대한 것이다. 늘 바람을 피우고 가정에 정착하지 못하며 남자를 물건 취급하는 여자. 영화가 제기하는 문제가 이에 국한될 때, 여남 차별은 마치 한 젠더의 타고난 인성적 결함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여자는 원래 그러니까 너그러운 마음을 갖고 태어난 네가 이해해’ 이거나 ‘좋은 여자를 만나야 해’가 된다. 다미앵이 알렉상드라의 정복하는 습관에 기함을 할 때, 직장 내 성차별과 임금차별, 그리고 돌봄 노동의 분담, 더 나아가 강간과 성희롱의 문제는 수면 위로 떠오르다가 가라앉고 만다. 실제로 성폭력 문제는 다미앵 주변에서 몇 번 심상치 않게 이야기가 들려오는데, 놀랍게도 그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그는 친구 아들이 원치 않는 성행위를 해야 했다고 고백하자 원래 자신의 마초적 기질에 따라 그냥 털어버리라고 조언한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강간을 당했다는 옛 일화를 말할 때는 정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그는 그 얘기를 듣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영화는 알려주지 않는다. 영화는 젠더 약자로 사는 이들의 애환을 정성 들여 보여주지 않는다. 그냥 그들을 우습게 내보일 뿐이다. 영화 종반부에 이르면 다미앵은 남성주의 행진을 나선다. 이 장면이 뜬금없어 보이는 이유는 그가 단 한 번도 자신의 마초적 기질을 버린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알렉상드라가 그와 사랑에 빠지는 이유는 그가 다른 남자들과는 다르게 저항을 했기 때문이다. 대충 이런 거다. 나에게 이렇게 한 남자는 네가 처음이야!
이제 가장 곤혹스러운 부분에 대해 말할 차례다. 이 이야기의 결말. 영화를 보며 내내 생각했다. 원래 세계로 돌아간 다미앵은 희롱했던 알렉상드라에게 사과를 하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보다 애를 쓰며 살아갈 거라고. 물론 그가 개과천선한다고 세상은 바뀌지 않겠지만... 이 결말보다 최선이 있으려나? 그러나 마침내 기다리던 결말이 다가왔을 때, 나는 정말 예상치 못한 어퍼컷을 한 대 맞은 듯 멍해져 버렸다. 감독은 조악한 위로를 건네기보다는 공포를 선사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여성 상위 세계에 있던 알렉상드라를 우리의 현실로 넘어오게 하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여성들과 권리 행진에 나선 수많은 여성들을 보며 혼돈에 빠진 알렉상드라의 표정이다. 아마존을 처음으로 벗어나 인간 세계에 왔던 다이애나(원더우먼)의 심정이 이런 것이었을까. 아니, 알렉상드라의 혼란이 다이애나보다 훨씬 컸을 거다. 어차피 다이애나는 인간이 아니었으니까.
이 결말이 뜻하는 바를 유추하기란 어렵지 않다. 결국 어떤 젠더도 자연스럽게 상위에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 점에선 이 영화의 결말이 나의 빤한 상상력보다 백배 천배는 낫다. 하지만, 그럼에도, 영화의 엔딩이 그 영화의 모든 것일 수는 없다. 나는 이제야 <노예 12년>과 <헬프>와 <장고: 분노의 추적자>에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던 록산 게이의 심정을 이해할 것만 같다. 옳음을 말하기 위해 약자의 고통을 전시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뒤바뀐 세상이 주는 통쾌함도 좋지만, 혁명이 완수된 세상의 해방감도 맛보고 싶다는 것이다. 거꾸로 가는 남자 말고, 전진하는 여자와 남자도 보고 싶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