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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희구 Oct 03. 2020

러시아 인형처럼

: 죽음의 문들을 달려 나가는 야생마

이미지: IMDb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는 한 여자가 있다. 36살 생일을 맞은 그녀를 위한 파티가 밖에서 한창 진행 중이지만 여자의 표정은 영 심드렁하다. 태어난 게 뭐 대수인가. 이 까짓 것, 그냥 술이나 진탕 마셔야지, 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 밖으로 나선 여자는 약을 피우고 술을 마시다 한 남자와 함께 집으로 향한다. 그는 그녀가 꽤 맘에 드는 듯 볼일이 끝난 뒤에도 질척이지만 남자의 관심이 고프지 않은 여자는 그를 얼른 내보낸다. 그리고 홀로 담배를 사러 가는 길, 집 나갔던 고양이 오트밀을 발견한 그녀는 급하게 길을 건너다 차에 치여 죽는다. 그 다음 화면은 다시 화장실. 앞에는 여전히 거울이 놓여 있고, 밖에서는 그녀의 생일 파티가 열리는 중이다. 여자는 자신이 환각을 경험했다 생각하지만 죽음의 경험은 너무나 생생하다. 이후로 그녀는 물에 빠져 죽고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죽고 계속해서 죽음을 반복한다. 죽음 이후의 시작은 언제나 그녀의 생일 파티가 열리는 친구의 집 화장실 안. 기묘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그 화장실 문 중앙에는 블랙홀 같은 문양이 있으며, 손잡이는 총 모양이다. 화장실을 나설 때마다 여자는 미스터리한 시공간을 감각하며, 자신이 쏜 총알에 죽음을 맞이하는 모양새다. 이 악몽은 왜 시작된 걸까.



드라마 <러시아 인형처럼>은 주인공이 똑같은 날을 계속 반복한다는 점에서 빌 머레이 주연의 영화 <사랑의 블랙홀>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시간의 수레바퀴에 갇혀 있다는 점만 비슷할 뿐, 두 이야기는 상이하게 다르다. <사랑의 블랙홀>이 하루를 수없이 반복하고서야 깨달은 일상의 소중함과 사랑을 이야기한다면, <러시아 인형처럼>은 자신의 죽음을 끝없이 반복하게 된 이의 미스테리한 상황을 전시한다. 물론 이 드라마에도 결국엔 치유가 있고 타인과의 접촉이 불러오는 아름다운 광경이 있지만, 1화부터 엔딩인 8화까지 작품 전반에 감도는 기운은 핑크빛 희망이 아니라 어둑한 밤거리와 자욱한 담배 연기가 전달하는 그 무엇이다. 이 드라마 는 이기적인 사람이 사랑을 통해 자신을 변화시키고 구원받게 되는 우주의 순진한 섭리를 믿지 않는다. 이 드라마의 블랙홀은 주인공들을 죽이고 죽이고 죽여서 그들의 가슴에 무겁게 내려앉은 죄책감과 강박의 돌덩이를 흔들어 뽑아낸다. 이것 역시 변화와 구원이 아니냐고? 그럴지도. 아니, 확실히 그러하다. 하지만 <러시아 인형처럼>의 주인공이 블랙홀을 통과해 맞이하는 변화는 전혀 드라마틱하지 않다. 과거의 상처에 조금 둔해진 것일 뿐이고, 그래서 다른 사람을 조금 더 마음에 둘 수 있는 공간이 생긴 것. 그뿐이다.





주인공 나디아를 연기한 배우이자 드라마 제작에 참여한 나타샤 리온은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드라마의 플롯 구조가 자신의 약물 중독 경험과 맞닿아 있다고 밝혔다(정확히 하자면, 그녀는 드라마의 대본을 쓰는 데 있어 자신의 경험을 빌어 왔다고 말했다. 더불어 이 드라마의 공동제작자인 레슬리 헤드랜드 또한 중독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한다). <가디언>의 리뷰 기사는 이 점에 주목, 드라마의 여러 설정들을 마약 중독자의 경험에 연결시키는데 그 내용이 꽤 흥미롭다. 그 기사에 따르면, 주인공이 죽음 뒤에 하필이면 화장실에서 다시 삶을 시작하는 것은, 많은 클럽이나 파티에서 중독자들이 화장실처럼 은밀한 곳에서 약을 주입하기 때문이다. 이후 환각 상태에 빠진 사람은 어제가 오늘이고, 내일이 곧 오늘과 같은 하루, 시간이 구분되지 않는 나날을 경험하다 약의 기운이 빠질 때쯤 어느 파티장에 이르게 되는데, 이때부터 다시 똑같은 패턴이 시작된다. 이는 극중의 나디아가 경험하는 하루하루와 비슷하다. 내가 저 남자를 만난 적이 있지 않았나? 나는 전에도 이 곳에 오지 않았었나? 아니, 그게 며칠 전(의 죽음 전)이었던가, 고작 몇 분 전(의 죽음 전)이었던가.



그러나 이 드라마는 본격적인 약물 중독자의 갱생기가 아니다. 드라마의 플롯을 중독자의 경험에 비춰볼 수는 있되, 핵심을 약물의 위험이나 그것에서 빠져나오려는 자의 절박함에 두고 있지는 않다. 나디아는 자칭 ‘누구보다 약을 많이 해본 사람이지만’ 그녀는 중독자처럼 보이지 않으며 극중 약물 중독의 위험이 설파되는 것처럼 보이는 장면 역시 나오지 않는다(어쩌면 계속 죽음을 반복하며 시간을 리셋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말했듯, 이 드라마는 죄책감의 해소/강박의 완화를 통해 약간의 변화를 추구할 뿐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질문을 되짚어보자. 이 수상한 타임 루프는 대관절 어찌 시작된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또 다른 인물 앨런(찰리 바넷)에 대해 얘기할 필요가 있다. 마찬가지로 죽음을 반복하는 그는 모든 면에서 나디아와 정반대다. 나디아가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영혼인 반면, 앨런은 자신의 일상에서 조금의 변칙도 용납할 수 없는 강박주의자다. 이러한 차이는 두 사람의 이미지에 확연하게 반영되어 있는데, 나디아는 붉은 곱슬머리를 풀어헤친 반면 앨런은 빳빳한 셔츠 단추를 목 끝까지 채워 놓았다. 이처럼 상이한 두 사람에게 단 하나 공통점이 있다면, 자신의 슬픔 혹은 분노에 지나치게 함몰된 나머지 다른 사람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모든 일이 처음 시작된 날, 나디아와 앨런은 서로를 도울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죽음을 맞이했다. 이 야속한 비극에 운명은 둘을 하나로 묶어 그들이 서로를 발견할 때까지 죽음을 계속해서 동시에 맞이하게 한 것이다. 이 상황을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인 나디아는 과학적으로 설명하려 한다. 운명을 공유하게 된 두 극단의 우정을 설명하는 용어로는 다소 차가워 보이지만, 생각해보면 과학은 필연적 인과관계를 찾아내는 학문이 아니던가. 신의 섭리를 가져오던 세계의 이치를 가져오던 둘의 만남이 운명이라는 점은 얼마간 뭉클한 구석이 있다.



이미지 : The New York Times (위) / The Atlantic (아래)



나디아는 앨런의 무너지는 자존감을 붙들어주고 그의 좌절이 어떻게 스스로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는지 기억하게 해준다. 앨런은 나디아가 애써 억눌러온 엄마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내도록 하며 그녀의 가시 돋친 방어가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숙고하도록 돕는다. 각자가 지닌 상처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세상은 좁아진다. 죽기 전에 어떤 깨달음을 얻고 삶을 리셋하게 되면 그 다음 삶에서는 원래 둘의 세상에 존재하던 물건들이 없어져 있는 식이다. 공간은 물리적으로 축소되지 않지만, 사소한 물건부터 친한 친구들까지 두 사람의 삶을 이루는 요소들이 사라져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드라마 제목을 소환할 필요가 있는데, 점점 간소해지는 나디아와 앨런의 삶이 러시안 인형 마트료시카와 닮아 있기 때문이다. 삶을 에둘러 싸고 있는 요소들을 벗겨낸 뒤 두 사람은 문제의 본질과 솔직하게 마주하는 시간을 갖는다. 나디아는 어린 시절 자신의 환영을 본다. 정신병을 앓는 엄마를 벗어나고 싶어 했다는 죄책감, 그 죄책감을 느꼈던 어린 자신을 가슴에 묻어 버렸던 나디아는 바로 그 소녀로부터 질문을 받는다. “이제 엄마를 떠나보낼 준비가 됐어?” 앨런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연인 비어트리스의 마음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제서야 처음으로 그녀의 존중을 얻는다. 이후 원래 삶의 두께를 되찾은 나디아와 앨런은 다시 기회를 부여받는다. 자신을 벗어나서 서로를 구할 수 있는 기회. 둘은 온 마음을 다한다.



이 드라마를 이야기하면서 리온의 매력을 언급하지 않을 수는 없다. <러시아 인형처럼>의 장점은 여럿이지만, 그중에서도 으뜸은, 적어도 내게는, 화면에 비치는 매순간 매력을 발하는 나타샤 리온의 무심한 얼굴이다.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의 니키와 상당 부분 겹쳐 있는 듯하지만 <러시아 인형처럼>의 나디아는 실질적으로 자유인이라는 점에서, 현실의 삶의 무게에 정복당한 음울한 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훨씬 분방하다. 물론 그녀는 타임 루프에 갇혀 있으며 죄책감을 간직하고 살아왔다. 하지만 그녀는 어느 순간에도 다른 무언가에 의해 주저앉거나 짓눌리지 않는다. 내가 앨런을 구하지 못했구나, 라는 깨달음 뒤에 그녀는 자신의 과오에 놀라거나 자책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내가 엄마를 버렸어요, 라는 고백 뒤에도 오열하지 않는다. 다만 ‘넌 살려고 했을 뿐이야’라는 위로를 덤덤히 받아들인다. 사건에 결부되는 감정들을 과잉하여 발산하지 않음으로써, 그녀는 연민과 동정의 시선을 거부한다. 한마디로 나디아는 일전에 보았던 어느 여성 캐릭터보다도 강하다. 그녀는 결코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해 사과하거나 미안해하지 않는다. 존과 그의 딸을 더 알아가려고 하지 않은 점에 대해서도 그녀는 과도하게 미안해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에게 무엇이 가장 좋은 지 명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다. 이 미덕이 그녀의 실질적 ‘자유’(니키와 다르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 눈치를 보거나 감시당하는 일 없이 거리를 마음껏 쏘아 다니고 술을 마시는 것. 물론 죽는 건 빼고 말이다)와 만나 빚어내는 감흥은 시청자에게 엄청난 만족감을 안겨준다.     



이미지 : The Times



굉장히 뜬금없지만 나디아를 생각하다가 문득 그 장면과 대사가 떠올랐다. <섹스 앤 더 시티> 시즌 2에서 캐리(세라 제시카 파커)가 결혼식을 올린 빅을 뒤로 하고 걸음을 내딛으며 하던 독백. “내가 빅을 길들이지 못한 게 아니다. 그가 나를 길들이지 못한 것이다. 어떤 여자들은 길들여질 수 없다. 그녀들은 자유롭게 달려야 한다. 그를 찾을 때까지. 거침없이 달릴 사람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 대사는 냉소를 부를 수밖에 없는데, 드라마 사상 가장 자유로운 여성을 묘사했다고 평가 받는 캐릭터조차 ‘자신과 잘 맞는 남자’를 찾아야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캐리의 대사는 결국 그녀가 자유롭다는 말이 아니라 함께 할 남자를 찾을 때까지는 외롭게 혼자 삶을 살아야 할 것이라는, 그렇지만 견뎌내야 한다는 의미가 함축돼 있다. 안다. 이 드라마가 세기말에 시작되었던 오래전 작품이라는 것을. 하여 시간을 거슬러 남자를 찾지 않는 진짜 야생마 같은 캐릭터가 우리 앞에 당도했다는 점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물론 나디아는 마치 캐리가 그러했듯, 남자들을 골라 자신의 집으로 인도하지만, 백마 탄 왕자님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녀는 그런 건(연애지상주의가 퍼뜨린 낭만에 대한 환상) 믿지 않는다. 그녀의 말을 보라. “내 목표는 죽을 때 같이 누워줄 사람을 찾는 거야. 내가 늙어 꼬부라지면 챙겨줄 사람. 그래서 짝을 안 찾고 60대 후반까지 버티다가 낚아챌 계획이야.” 사실 생각해보면 나디아는 이 드라마에서 백마 탄 왕자 같은 존재다. 앨런에게 말이다. 두 사람 중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먼저 앞서가며 뒤에 남겨진 이에게 손을 내미는 건 다름 아닌 그녀다. 이 드라마의 시즌 2를 기다리는 이유는 단 하나다. 긴 코트를 입고 붉은 머리를 휘날리며 거리를 제멋대로 걷는 나디아의 모습을 더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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