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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희구 Jan 24. 2021

브리저튼

코르셋의 시대에서 인종적 평등을 구현한다는 것


사진 출처 : IMDb (이하 동일)


만일 <브리저튼>이 우리에게 신선한 재미를 줄 수 있다면, 그건 단연 인종적 다양성에서 비롯될 것이다. 19세기 런던의 사교철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드라마는, 우리에게 난생처음 보는 진귀한 광경을 선물한다. 여왕을 비롯해 뭇 사교계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헤이스팅스 공작(레지 장 페이지)을 백인이 아닌 흑인 배우가 연기한 것이다. 왕이 흑인 여성과 사랑에 빠져 인종적 통합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극의 설정이다. 조금은 터무니없지만 이 뻔뻔한 설정이 극에 가져오는 활력은 결코 적지 않다. 다양한 피부색의 인물들이 인종으로 인한 한계는 없다는 듯 서로 어우러져 춤을 추고 사교계의 대소사를 논하는 모습은, 정형의 틀을 깬다는 점에서 기묘한 쾌감을 불러일으킨다. 관습을 부수는 것은 이뿐이 아니다. 드라마는 21세기 팝 음악을 클래식으로 만들어 무도회장에서 연주하기도 한다. 요컨대 드라마는 다양한 캐스트, 시대를 거스르는 음악 등을 통해 선언한다. 이것은 어차피 허구일 뿐이므로 신나게 놀아보자고. 결국 우리가 만들고 싶고, 당신들이 보고 싶은 건 섹시한 코스튬 플레이 아니냐고. 


하지만 드라마의 제안에 따라 갖은 걱정은 잊고 젊은 연인들이 ‘축! 결혼'에 이르는 과정을 온전히 즐기기 어려운 까닭은, 어느 순간 이런 코웃음이 쳐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심지어 인종적 다양성이 보장되는 세계에서도 성차별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단 말이지?’ <브리저튼>의 중심 플롯은 결혼을 제대로 해야만 하는 여성과 그것을 원치 않는 남성이 여성의 주도로 결합에 이르는 과정이다. 이 뼈대는 결혼이 아니면 세상에서 살아갈 방도가 마땅치 않은 여성들의 비좁은 환경 덕에 가능하다. 거실에서 구혼자들을 맞이하고 사교계의 조롱거리나 가십거리가 되지 않기 위해 애를 쓰며 연애하는 여성 주인공들의 모습은, 온전히 그들이 집 안에 묶여 있는 존재기 때문이다. 하긴, 지금 우리가 얘기하고 있는 건 코스튬의 시대가 아닌가? 




때로 여성들을 과거로 돌려보내면서도 여성주의적 가치를 작품 속에 삽입하는 데 성공하는 작품들이 있다. 근작 중에서는 <에놀라 홈즈>(2020)가 대표적이다. <브리저튼>이 코르셋에 대한 여성의 불만을 피상적으로 다루는 데 반해, <에놀라 홈즈>는 그것이 여성의 몸과 맺고 있는 사회적 의미에 대해 고찰한다. 그리고는 가볍게 그것을 조롱한다. 상대의 날카로운 칼날이 부드러운 살이 아닌 딱딱한 코르셋에 꽂히자 에놀라는 이렇게 말한다. “코르셋은 이럴 때 쓰는 거군요?” 이런 허구적인 시대극들이 여성주의 계열의 영화로 분류되는 까닭은 명징하다. 여성에게 가혹했던 시대에 스스로 자신의 영역을 개척한 여성들의 족적은 여전히 힘겹게 앞으로 나아가는 여성들의 발걸음을 끌어주기 때문이다. 즉 기록된 역사에는 보이지 않으나 과거에 분명히 살아 숨 쉰 존재들을 보여줌으로써, 여성들의 계보와 영역을 넓혀서 상상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브리저튼>은 이러한 작품들에서 동떨어져 있다. 비록 일각에서는 여주인공 다프네(피비 디네버)의 변화 및 각성에서 페미니즘 텍스트를 읽어내려 시도하지만 말이다. 


<브리저튼>이 여성의 시각에서 결혼을 묘사함으로써 그것이 당대에 지니고 있던 본질적 의미를 꿰뚫은 것은 사실이다. 버브록은 다프네에게 직접 청혼하지 않고 그녀의 오빠 안소니와 ‘계약’을 맺는다. 이를 공작이 지적하자 그는 답한다. “말을 산다고 말에게 의견을 구하지는 않죠.” 이 끔찍한 말을 적시한 것은, 드라마가 적어도 당대 모든 결혼을 사랑으로 포장할 생각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드라마는 어느 순간에도 잊지 않는다. 결혼은 남성의 경제력과 지위, 그리고 여성의 노동과 섹슈얼리티의 교환이라는 것을 말이다. 사교철은 사랑에 빠지기 위한 기간이 아니라 서로의 힘과 미모를 탐색하는 시기일 뿐이다. 이런 와중에 다프네가 결혼에 매달려야만 하는 여성의 일생에 대해 한탄하고, 작가 지망생 엘로이즈가 넓은 세상을 꿈꾸며 불평하는 모습은 잠시나마 이 드라마의 정해진 일로에 어떤 혁명적 변화가 일어나는 건 아닐까, 희망을 품게 한다. 그러나 드라마가 인물들에게 허락하는 불평은 딱 거기까지다. 다프네에게는 ‘진정한 사랑’을, 엘로이즈에게는 ‘레이디 휘슬다운의 정체 밝히기’라는 책무를 선사함으로써 그들의 시선을 사회에서 개인의 영역으로 옮겨온다. 버브록에게 주먹을 날릴 만큼 용감무쌍했던 다프네는 그 용기로 공작과의 계약연애를 진정한 사랑으로 바꾸는 데 성공함으로써 완전한 가정을 이룬다. 엘로이즈는 세상을 꿈꾸었지만 어느덧 런던의 가십거리를 전해 나르는 레이디 휘슬다운을 존경하며 그녀의 정체에 집착한다. 바깥으로 튀어 오를 듯 진동하던 여성들은 어느덧 여성적인 기질들 속에 파묻히며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원동력을 잃어버린다(참고로 드라마 말미에 밝혀지는 휘슬다운의 정체는 <가십걸>의 가십걸이 댄 험프리였다는 사실만큼이나 캐릭터에게 부당한 처사다. 나는 아직도 댄이 가십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길 거부하고 있다. 왜 속물적인 그룹에서 배제된 아웃사이더가 자신의 변태적인 취미를 위해 가족도 해치는 사이코패스로 그려져야 하는 건가).          



물론 <브리저튼>은 ‘남의 사랑은 정말로 재밌다’는 요즘 세대의 격언을 충실히 구현한 오락물일 뿐이다. 무엇보다 출연진의 인종적 다양성을 확보함으로써 시대에 걸맞은 허구적 상상력을 뽐낸 시대극 로맨스다. 어쩌면 우리는 이 드라마의 폐쇄적인 구조(=코르셋)보다 그 구조에 틈을 파내고 들어선 새로운 활력(=인종의 다양성)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 점을 더 칭찬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그렇게 하기가 조금 꺼려지는데, 그 이유는 이 드라마의 장점이 과연 오롯한 장점이라 할 수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오해는 마시라. ‘화이트’ 스크린이 그리웠다는 뜻은 아니니까. 여왕 혹은 레이디라 불리는 흑인 여성들의 시중을 백인 여성들이 드는 광경은 생각만큼 이상하지도 않고 그 자체로 재미있다. 그러나 흑인 여성들이 백인 숙녀들과 함께 ‘여성’이자 ‘결혼’이라는 굴레에 갇힌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문득 소름이 돋는다. 아무리 인종적 통합이 이루어졌다 할지라도, 정말로 흑인 여성과 백인 여성의 차이는 아무것도 없고 오로지 여성이라는 족쇄에 갇혔다는 공통점밖에 없다는 말인가, 라는 의문이 들어서다. 이 드라마는 페미니즘의 교차성을 외면하고 있는가? 사실 나는 이 드라마가 교차성을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많은 여성학자들, 특히 인종으로 인해 주변으로 몰려난 자들이 한결같이 입을 모은 것은 인종차별과 성차별이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이 두 가지 차별 체계는 같은 전략을 이용한다. 바로 차이를 차별의 근거로 삼는 것. 인종이던 성이던 차이를 차별할 수 있다는 관념이 지속되는 한 어떤 종류의 차별도 사라지지 않는다. 이 말은 인종차별이 사라지지 않는 한 성의 완벽한 해방은 올 수 없다는 말이고, 성이 평등해지지 않는 한 인종 간의 불평등이 근절될 수 없다는 말이다. 페미니즘이 여성의 문제에서 시작해 인종으로, 환경으로, 섹슈얼리티 전반의 문제로 영역을 넓혀나간 까닭이다. 하지만 <브리저튼>은 이러한 교차성의 의식을 사뿐히 건너뛰고 성차별은 지속되나 인종의 평등은 이루어진 완벽한 상상의 세계를 그려낸다. 이제 모든 여성들은 계급만 낮은 게 아니라면, 인종으로 인해 어떤 불평등도 겪지 않는다. 백인이건 흑인이건 아시아인이건 그녀들이 고민해야 할 건 오로지 딱 하나뿐이다. 어떻게 하면 제대로 된 결혼을 할 수 있을까(혹은 안 할 수 있을까). 레이디로 신분이 상승했으나 옥죄여오는 코르셋 속에 들어선 모든 여성들을 보며, 벨 훅스와 패트리샤 힐 콜린스와 록산 게이가 했던 말들이 귀에서 웅성거리는 듯했다. ‘흑인 여성의 경험은 백인 여성의 그것과 분명히 다르다.’ 



물론 모든 여성의 문제가 이처럼 하나로 좁혀졌다는 나의 주장은 불완전하다. 드라마 속에는 여전히 일하는 시녀들이 있고, 계급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브리저튼>은 <다운튼 애비>가 아니라서 일하는 여성들에게는 좀처럼 시선을 주지 않는다. 그나마 카메라에 온전히 자신의 얼굴을 내비치는 여성들은 <레베카>의 댄버스 부인처럼 고압적인 면이 있거나 주인공 다프네에게 중요한 정보를 알려주는 전달자로서만 기능할 뿐이다. 그러나 상황이 이렇다 하여 이들이 존재하지 않는 척, 모든 여성에게 ‘여성의 신비’(베티 프리던)라는 문제만 남겨졌다고 말하는 건 부당할 테다. 다만 내가 짚고 싶은 건, 드라마가 중요한 역할을 맡은 여성들을 모두 한 곳에 밀어 넣음으로써, 그리고 로맨스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여성들은 뒤로 미뤄둠으로써 여성들 사이의 차이를 지웠다는 점이다. 이러한 지우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진보적이지 않다. 


혹자는 이렇게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인종적으로 차별받지 않는 인물들이 묘사되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말이다. 동의하는 바이지만, 나는 이에 대해서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나는 이 드라마가 눈으로 보이는 만큼 드라마 속 흑인 캐릭터들에게 호의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외려 이 드라마가 흑인에 대한 정형적 이미지들을 얼마간 이용하고 있다고 의심한다. 먼저 사이먼을 보자. 혹 드라마를 보며 그에게 지나치게 섹슈얼한 이미지가 부여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가. 극 중에서 그는 단지 주인공으로 섹시하게 묘사되는 것을 넘어서 성적으로 권능한 인물처럼 묘사된다. 그는 성에 관해 완전히 무지한 다프네에게 깨달음을 주는 지도자 역할을 하는데, 여기서 그는 단 한 번도 그녀를 실망시키는 법이 없는 정력의 화신임이 드러난다. 물론 이는 모든 (19금) 로맨스 남자주인공들에게 해당되는 설명일 테지만, 나는 그의 이력(결혼 전 화려한 성생활)이 안소니에게 부정당한 면에 주목하고 싶다. 안소니는 본인도 전혀 다르지 않은 생활을 거쳐왔으면서도 사이먼에게 자신의 동생에게서 떨어지라고 말한다. 그가 사창가를 드나들던 부랑자라고 말하면서. 이 부당한 비난에서 안소니의 두려움을 읽었다면 너무 지나친 망상일까. 오랜 기간 백인 남성들이 자기네 여성들을 흑인 남성들이 그 강한 섹슈얼리티의 힘으로 앗아간다고 호들갑을 떨었던 것처럼 말이다. 섹슈얼리티와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는 흑인 캐릭터는 사이먼만이 아니다. 마리나를 보자. 그녀는 누구인가? 순진하게 연인(백인 남성)에게 자신을 맡겼다가 덜컥 임신을 하고 홀로 남겨진 흑인 여성이다. 아, 이 구도는 다른 역사극에서 너무나 많이 보아왔던 것이 아닌가. 마리나의 임신은 결국 사랑의 산물이었으며 연인의 마음은 변치 않았었음이 드러나지만, 종국에 그녀는 사교계에서 모욕을 당하고 ‘생존’을 위해 사랑 없는 결혼에 들어선다. 다프네와 다르게 말이다. 왜 그녀에게 이런 운명이 부여되어야 하는가. 왜 하필이면 그녀인가. 사이먼과 마리나는 표면적으로는 피부색 때문에 어떤 불평등도 겪지 않는다. 하지만 작품 내적으로 이들은 오랫동안 이어져온 차별의 족쇄를 그대로 차고 있는 듯한 모양새다. 이렇게 생각하는 내가 이상한 걸까?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과연 인종적, 성적 평등을 구현한 허구의 역사를 그리는 게 가능할까 싶다. 적어도 <브리저튼> 같은 방식으로는 어림도 없다. 문득 흑인/여성 작가들이 SF로 진출하는 이유가 몸소 체험되는 것만 같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아예 세계를 창조하는 게 더 쉬워 보이는 것이다.      




*위 글은 본인 블로그(https://blog.naver.com/castleinthetrees)에도 올라온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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