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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희구 Feb 21. 2021

네 마음에 새겨진 이름

추락하는 새가 착지하는 곳

이미지 출처 : IMDb (이하 동일)


영화 <네 마음에 새겨진 이름>에는 혼란스럽게 매혹적인, 그래서 기이한 쇼트가 하나 있다. 주인공 자한(진호삼)이 후배들과 함께 군가 대회서 선보일 안무를 맞추고 있을 때 문득 위층 복도에서 소란한 소리가 들려온다. 소위 자한의 친구라는 남학생들이 게이로 의심되는 버디(증경화)에게 자한에게서 떨어지라며 시비를 건 것이다. 자한이 급히 달려가 말려보지만 복도는 이미 충돌하는 몸들의 활력으로 가득 차 있다. 그의 다급한 손짓은 무력하게 부딪치는 몸들의 운동을 증가시킬 뿐이다. 각설하고 말하면, 내게 이 장면은 무척 매혹적이었다. 길고 좁다란 복도 안에서 넘어지고 일어서다 서로를 붙잡고 내밀치는 손과 발, 그리고 몸에서 느껴지는 역동성이 좋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장면이 좋았던 이유는, 단순히 움직이는 몸들에서 발산된 힘이 느껴져서라기보다 그 소요의 한가운데서 새 한 마리가 퍼드덕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버디는 자신의 몸 끝자락을 잡아채는 손들을 물리치고 창문으로 올라가 창살을 붙들고 소리를 지른다. 그리고는 그 무리 위로 자신을 던졌다가 벌떡 일어서서 자신에게 뻗어오는 덩굴 같은 손아귀들을 돌파한 채 앞으로 뛰쳐나간다. 이 장면이 있기 전까지 버디에게서 명랑한 얼굴과 범상치 않은 행동들을 보아왔던 나는 그가 이전과 같이 세상을 조롱하며 유유자적하게 이 혼란을 빠져나갈 것이라 생각했다. 어쩌면 그는 저 남학생들의 책상이나 필통에 또다시 오줌을 갈길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흘러가지 않고, 위 장면의 쇼트는 한없이 매혹적인 동시에 한없이 서글프기도 하다는 사실이 곧이어 밝혀진다. 카메라를 벗어나 앞을 가로지른 새가 다다른 곳은 더 이상 길이 없는 난간이다. 버디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위로 올라선다. 모두가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는 가운데 버디만이 거침없이 손으로 날갯짓을 해 보인다. “날개를 꺾어버리겠어,” “어디 한 번 날아보지 그래?”라던 패거리의 위협과 조롱에 대한 반응이다. 이 위태한 동작은 교관의 자동차에 소변을 뿌리던 것과 같은 이치인 걸까? 모두가 숨을 고르고 “내려와, 미안해”라며 그를 다독이려 할 때 버디는 씩 웃고 그대로 뛰어내린다. 모두가 숨을 들이켜고 끔찍한 상황을 예상하며 밑을 내려다보는데, 의외로 버디는 멀쩡하게 착지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짐짓 여유로운 척 제 길을 간다. 이 걸음은 영화관 주인을 골리고 도망쳐 나왔을 때와 비견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일까? 하지만 카메라는 버디를 따라 밑으로 내려가 그의 얼굴을, 함박 웃고 있을 표정을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자한의 곁에 머문다. 패거리 중 하나가 그의 멱살을 잡고 외친다. “장자한, 저 게이랑 그만 어울려. 아니면 너도 게이라고 오해받을 거야!” 자한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버디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는다. 밑에서 그는 위에서 오고 가는 소리를 필시 들었을 것이다. 버디의 날갯짓은 추락이었을까, 착지였을까. 본장면을 볼 때는 몰랐지만 이후 전개되는 상황을 보며 알게 되었다. 추락을 가장한 착지처럼 보이지만 실은 착지의 외피를 두른 추락이었음을.




영화의 배경은 1987년, 계엄령이 해지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대만의 어느 고등학교다. 어느 때처럼 체육 수업을 듣던 자한은 수영장에서 전학생 버디를 만난다. 영화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꽂히는 순간을 특정해서 자세히 묘사하지 않는다. 그저 처음 만났을 때 오가는 눈길, 신부님이 들려주는 사랑 얘기에 생각을 거듭하다 그것의 종착지로 서로의 얼굴을 찾는 장면들로 두 사람이 서로에게 스며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늦은 밤 자한을 찾아가 그의 비좁은 잠자리에 파고드는 버디의 무모함과 그가 누울 자리를 마련하려 이불을 걷어 올리는 자한의 다정함도 둘 사이에 흐르는 기류를 관객에게 효과적으로 납득시킨다. 하지만 소년들이 살아가던 시기는 1987년. 퀴어에게 가해지는 차별에 평화롭게 피켓 시위를 하던 사람이 수모를 당하며 어딘가로 잡혀가던 때이자 학교에서 남학생과 여학생의 공간을 철조망으로 가르고 스캔들은 오롯이 이성애 교제를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다는 믿음을 전파하던 때이다. 소년들이 자체적으로 집단을 검열하며 충분히 남자답지 않거나 이상하거나 확연하게 다르다고 인지되는 아이들에게 폭력을 휘둘렀던 시기이기도 하다. 하여 자한과 버디의 사랑은 그들에게 밀려드는 사회의 강압 속에서 제대로 피어나기도 전에 흔들리다 꺾이고 만다. 자한이 본인의 감정을 깨닫고 용감해질수록 버디는 자신의 마음을 감추고 비겁해진다. 본래 자한은 평범한 아이였고, 버디는 특별한 아이였다. 자한이 또래 압력에 굴복해 패거리가 쥐어준 몽둥이로 어느 게이 남학생의 얼굴을 내려치길 고민할 때, 버디는 모두에게 사나운 눈빛을 쏘고 그 학생을 부축해 현장을 빠져나갔었다. 피켓 시위를 하던 남성이 끌려갈 때도 “깡패예요? 사람을 왜 잡아가요? 놔줘요!”라고 외친 건 버디였고, 그런 그를 붙잡고 말린 건 자한이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추락 장면 이후부터 버디는 자한과의 사이에 선을 긋고 그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한다. 추락한 새가 착지한 곳은 다름 아닌 “먼지투성이”인 그가 “숨은” 마음의 깊은 곳이었던 것이다.


“내가 죽으면 어떡할 거야?” 시위를 하던 남성이 끌려가는 광경을 본 뒤 버디가 자한에게 한 질문이다. 이걸 기억한다면 뒤에 일어나는 버디의 변화는 급작스럽기보다는 슬프게만 느껴진다. 아마도 버디는 자신이 누구인지 일찍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남학생에게 손을 내밀고 남성을 위해 목청껏 항의를 해준 이유는 그가 연민이 많고 의로운 존재이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자한이 무심코 흘려듣는 말을 보라. “어차피 너와 난 아이를 가질 수 없잖아.” 여기에 “내가 죽으면 어떡할 거야?”라는 물음은 자신이 언젠가 그 남성처럼 끌려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비롯했을 것이다. 버디는 그의 마음의 행로를 알고 있었고, 그래서 오래도록 두려웠을 것이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영화가 현실보다 아름다우니, 그러니까 너도 나와 함께 영화를 만들자던 고백에서 나는 현실이라는 땅에 제대로 발붙이지 못한 채 이상을 찾아 떠도는 새를 떠올렸다. 하지만 의로움과 외로움이라는 짐을 양 날개에 얹은 채 계속 날아가기에 버디는 힘에 부쳤던 것 같다. 손아귀들을 뿌리치고 발악을 하며 한껏 조롱하는 미소를 지은 뒤 밑으로 내려간 것은, 일회성의 도피가 아니라 결국 비상에 대한 체념이었으니까. 영화는 자한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키며 버디의 감정선들은 일일이 카메라로 확인시켜주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영화 곳곳에 점점이 뿌려진 힌트들을 통해 그의 변화들을 이해하며 같이 아파할 수 있다. 무엇보다 카메라가 그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기에, 나의 마음은 계속 그가 아래로 떨어지는 장면에 머물러 있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장면이 있다. 식당에서 잠든 버디에게 입을 맞췄던 자한은 며칠 뒤 어떤 꿈을 꾼다. 이 장면에서 그는 침대 위에 엎드린 채 잠이 들어 있다. 이때 그의 위로 셔츠를 입지 않은 버디가 몸을 기대 온다. 그의 머리 위에 버디의 머리가 얹어지고, 그의 팔 위로는 버디의 손이 미끄러지듯 흘러내린다. 버디의 온몸이 눈을 감고 있는 자한에게 밀착된다. 이 장면은 내게 더없이 인상적이었는데, 이유는 상대에게 욕망의 대상이 되고 싶다는 자한의 마음이 더없이 잘 표현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자한은 호기심을, 혹은 마음 그 자체를 억누르지 못해 잠든 버디의 입술에 자신의 입을 가져갔었다. 그리고 꿈에서는 상대가 잠든 자신에게 온몸을 기대 오는 장면을 그려냈다. 내가 상대를 원하는 만큼, 상대도 나를 똑같이, 혹은 그 이상으로 원해주기를 바라는 마음. 자는 와중에도 자신의 몸에 얹힌 버디를 느끼며 옅은 미소를 짓는 자한의 얼굴에서 나는 그 마음을 읽었다. 이 마음은 사랑의 한 면이고, 간절히 바라지만 쉬이 확인할 수도 언제나 충족되지도 않는 것이다. 되돌려 받지 못하는 자한의 마음은 그래서 좌절한다. 둘 사이의 감정이 확연히 드러난 뒤에도 버디는 샤워실에서의 키스를 제외하고는 절대 먼저 자한에게 손을 뻗지 않는다. 영화의 엔딩은 해피도, 새드도 아니다. 하지만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정서는 아련함과 애틋함이다. 가장 밝게 타오르던 불꽃은 이미 사그라졌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나타난 과거의 정령들이 부르는 노래는 현재가 아니라 세월 뒤로 저만치 사라진 것에 대한 위로이다.    




*위 글은 본인 블로그(https://blog.naver.com/castleinthetrees)에도 올라온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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