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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희구 Mar 07. 2021

그녀의 조각들

이 한 그루의 사과나무가 되기까지

사진 출처 : IMDb (이하 동일)


여자는 집에서 아이를 낳고 싶었다. 다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아이가 나오고 싶을 때 그렇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동의했다. 두 사람은 가정분만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했고, 수업을 들었으며, 마음이 맞는 조산사도 미리 점찍어 두었다. 하지만 양수가 터지고 진통이 시작된 날 저녁, 그들에게 오기로 되어 있던 조산사는 다른 사람의 아이를 받느라 오지 못한다. 예상과 다르게 진행되는 상황에 여자는 불안하지만 몸을 훑고 지나가는 고통이 너무나 크고 부부의 집에 도착한 새로운 조산사가 진심을 다해 그녀를 도울 것을 약속하기에, 출산은 예정대로 집에서 이뤄진다. 신음과 비명. 긴장과 혼돈. 아이의 심박수가 필요한 만큼 들리지 않는다는 진단. 앰뷸런스를 부르고 다시 이어지는 신음과 비명. 그리고 환희. 조산사는 숨을 돌리고 부모는 감격에 젖은 눈으로 아이를 감싸 안는다. 하지만 사이렌 소리가 저 멀리서 들릴 무렵, 아이는 난데없이 숨을 멈춘다. 이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여자와 남자는 어떻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직접 보기 전까지 나는 이 영화가 법정 드라마일 거라 생각했다. 실수를 저지른 조산사와 벌이는 진실 공방이 이 영화의 핵심 줄기일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의심을 품고 조산사인 에바가 처음 등장할 때부터 약간의 미움과 의심을 담아 그녀를 바라보던 나는 출산 장면이 끝날 즈음 어안이 벙벙했다. 주인공 마사(바네사 커비)가 진통을 시작할 때부터 사이렌의 비극적인 소리가 울리는 지점까지의 이야기는 기나긴 롱 테이크로 이루어져 있다. 카메라가 인물들의 움직임을 끊지 않고 한 번의 긴 호흡으로 담아낸 까닭은 상황의 긴박감을 전달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출산 장면의 롱 테이크는 단지 현장감만을 구현하는 게 아니라 인물들의 부산한 움직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카메라의 초점은 에바와 마사, 그리고 남편 숀(샤이아 라보프)을 계속해서 오가고, 프레임에는 세 사람이 계속해서 들어왔다 나간다. 카메라가 언제 고개를 돌려도 그곳엔 에바와 숀이 있고, 이들은 프레임 속을 유연하게 오가며 각자의 일을 한다. 그러니까 이때의 롱 테이크란, 단지 그 비극적 사건에 대한 몰입도를 높이기 위함이 아니라 그날 밤 모두가 제자리에서 최선을 다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에바가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을 마사와 숀은 알고 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에바에게 분노하고 마사의 엄마 엘리자베스가 소송을 준비할 때도 그들은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숀은 변호사를 만나 서류를 준비하지만 진심은 아니다). 분노할 대상이 없는 부부에게 남겨진 것은 무력감과 공기를 희미하게 부유하는, ‘왜 가정분만을 택했을까?’라는 질문에서 비롯한 죄책감이다. 하지만 이 죄책감은 선명히 표출되지 않고 마사와 숀이 서로를 할퀴는 날카로운 손톱이 되지도 않는다. 그들은 어찌하면 좋을지 모른 채, 어떻게 하면 상처를 덮을 수 있는지 모른 채로 각자 애도하고 침몰한다. 그리고 이 다른 방식이 두 사람 사이에 깊은 고랑을 만든다. 영화는 법정이 아닌 가정 안에서 스쳐 지나가듯 끝나버린 만남에 저마다의 방식으로 부서져가는 부부를 응시한다.


마사와 숀의 다름은 영화에서 그들이 처음 등장하는 방식에 이미 드러나 있다. 영화의 포문을 여는 건 다리를 건설하는 공사장에서 인부로 일하는 숀이다. 그는 현장 사람들에게 일을 똑바로 하라면서, “이 다리를 맨 먼저 걷게 해 준다고 딸한테 약속”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차로 향하는데, 이때 카메라는 그가 만드는 일직선의 움직임을 롱 테이크로 잡는다. 반면 마사는 처음 등장할 때 롱 테이크는커녕 자신의 얼굴도 먼저 내비치지 않는다. 그녀가 나오는 씬은 회사에서 열린 출산기념 파티로, 이때 카메라는 그 장면을 여러 커트로 나눠서 보여준다. 몇 개의 쇼트가 지나간 후에야 마사의 얼굴이 등장하는데, 그녀는 꽤나 지쳐 보인다. 아이에 대한 언급도 없다. 영화 속에 마사와 숀이 등장하는 씬에는 아이가 얽혀 있지만, 그들이 그 씬에 개입된 방식이나 행동하는 양상은 상이하다. 숀은 자신이 딸을 언급하며 앞으로 활기차게 움직이지만, 마사는 출산을 축하받는 가운데 타인들의 움직임 속에 파묻혀 있다. 이 대비를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숀에게 아이는 그가 일을 하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동력이지만, 마사에게 아이는 밀려드는 세상으로부터 지켜야 할 그녀만의 조각이라고 말이다. 마사에 대한 묘사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이 장면을 상기해보라. 그녀가 영화에 처음 등장하고 엄마의 도움으로 자동차를 구입하는 장면까지 지나간 후에, 그녀는 홀로 아기 방을 정리한다. 벽에 아기 사진을 걸고 그 앞에 의자를 끌고 와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는데, 카메라는 그런 그녀를 방문 밖에서 바라본다. 비좁은 프레임(방문이 만든 또 하나의 프레임) 속에 자리한 아기와 마사. 일련의 쇼트들을 지나 마침내 오롯이 함께 있는 두 사람. 세상에 오직 둘 뿐인 듯한 이 순간. 단 몇 초가 지속되었을 뿐이지만 이 이미지는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밀려드는 쇼트들을 넘기고 넘겨서 결국 도달한 작은 안식처에 딸을 품은 엄마의 모습, 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건이 있은 뒤 숀과 마사는 다르게 행동한다. 앞으로 나아갈 동력을 잃은 숀은 제자리에 멈춰 서서 울부짖고 퇴행한다. 일을 관두고 끊었던 술을 다시 마신다. 마사는 자신의 안에 있던 것이 사라지자 시선을 외부로 돌리고 밀려드는 일상에 몸을 맡긴다. 눈과 표정을 비운 채 회사로 복귀하고 담담히 자신의 몸에 남은 딸의 흔적들을 처리한다. 눈물을 쏟아붓는 숀과 그런 그를 무심하게 바라보는 마사의 시선을 보며 관객은 얼마간 그녀보다는 그에게 연민을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코르넬 문드럭초 감독이 애도의 다름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갈등을 그린 까닭은, 그저 모두가 진통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역설하기 위해서도, 숀의 고통에 집중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슬픔을 타인의 품 안에서 이겨내려다 퇴행하는 그와 달리 끝내 홀로 일어서서 세상을 마주 보는 그녀의 의지를 빛내기 위해서이다(그게 아니라면 나는 감독이 그를 물리적으로 완강하게 영화 밖으로 밀어낸 이유를 잘 모르겠다). 물론 타인의 위로에서 슬픔을 잊어보려는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니다. 다만 숀은 적절한 위로를 받지 못했을 때 무고한 자들에게 분노한다. 몇 달이 지난 뒤, 그는 마사의 손을 자신의 몸으로 가져오며 “날 만져줘”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선뜻 응하지 않는 마사를 거칠게 탐하다가 이내 뜻대로 되지 않자 욕을 하며 나가버린다. 다리로 가서는 돌아오지 않을 딸에게 원망 섞인 그리움을 내비친다. “왜 살고 싶지 않았던 거니? 왜!” 그는 이 위태한 시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불륜과 약에도 손을 뻗는다. 아내에게 폭력도 저지른다. 그녀가 자기 안의 텅 빈 곳을 보지 않으려 애를 쓸 때, 그 하나를 간신히 해내려 하고 있는 동안에 말이다.


(한편 숀이 왜 그토록 바깥에서 자신을 찾으려 했는지에 대해 영화는 얼마간 힌트를 준다. 그는 마사에 비해 가진 것이 없는 남자다. 가족과 돈과 직장이 그러하고, 고상하지 못한 습관과 성품이 그러하다. 하여 엘리자베스는 그를 탐탁지 않아하며 숀 역시 자신의 기울어진 처지를 인지하고 있다. 아마도 그에게 딸은 그를 나아가게 하는 동력인 동시에, 그가 세상(=마사와 그녀의 가족)에 접속할 수 있도록 해주는 다리였을 것이다. 나는 숀이 마사에게 모든 걸 맞추려 하는 데에서, 그리고 그녀를 다급하게 찾는 손길에서 그의 절박함을 느꼈다.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과 어떻게든 남겨진 것만은 간직하고 싶다는 마음. 비록 떠나는 것은 그가 되었지만, 그가 뒤돌지 않고 되돌아가기로 한 것은 다리가 끊겨졌음을, 자신의 발이 디딜 곳이 없어졌다는 걸 받아들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절박함이 그의 행실에 대한 변명으로 허용될 수는 없다. 다시 말하지만 감독은 그를 아주 완강하게 이야기 밖으로 내보냈다.)


시간이 흘러 다리가 완공될 즈음 마사는 텅 빈 곳과 자신이 남겨두고 온 것을 마주하게 된다. 변호사의 인정사정없는 질문 앞에서, “(내 딸에게서) 사과 향이 났어요”라는 말을 내뱉고 나자 그녀는 불현듯 자신의 안에 차오르는 한 존재를 느낀다. 그제야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미소를 지으며 적극적으로 에바의 무죄를 주장한다. 그리고 밀쳐두었던 딸의 조각들을, 다리 위에서 흩뿌려준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한 그루의 사과나무 위에 한 여자 아이가 올라가 사과를 따먹는 모습이다. 후에 마사가 이 소녀를 데리고 집 안으로 들어가는 이미지는 사뭇 감동적이다. 둘의 관계를 쉬이 유추할 수는 없지만 이미지가 발산하는, 죽음을 건너 싹 피운 생명의 연쇄와 연대가 어찌 감동적이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보다 더 인상적인 건, 이 싱그럽고 커다란 사과나무가 엔딩 크레딧의 배경으로 쓰인다는 점이다. 바람에 사부작이는 잎사귀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크레딧 자막이 올라가고 나무는 그 자리에 그대로 붙박여 있다.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이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끝까지 보여주겠다는 감독의 결심. 한 자리에 붙박인 채 사방으로 널리 가지를 뻗은 나무의 견고함. 그 굳건함과 묵직함. 마사가 가진 아픔의 결실. 그것의 형상화가 이토록 대단하고 굳은 의지를 보여준다는 사실. 그것이, 바로 그 의지가, 가슴을 울렁이게 한다.      





*위 글은 본인 블로그(https://blog.naver.com/castleinthetrees)에도 올라온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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