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모럴센스'
영화 <모럴센스>에 대한 부정적 의견은 대체로 ‘소재는 참신하나 스토리는 진부하다’로 수렴된다. 과연 펨돔(여성 도미넌트)과 멜섭(남성 서브미시브)이라는 구도는 <너는 펫>을 위시한 여러 연하남 로코물과 비슷한 맥락을 취한다. 사회적으로 능력 있으나 주변에서 ‘여성적 매력’이 부족하다고 폄훼 받는 주인공에게 어느 날 ‘당신의 바로 그 점, 똑 부러지고 칼 같고 어른스러운 점이 매력’이라고 말해주는 남성이 등장한다. 그는 젠더 감수성이라곤 조금도 없는 주변 남자들과 달리 정의롭고 헌신적이며, 다정하고 말랑말랑하다. <모럴센스>의 지우(서현)와 지후(이준영)는 연상-연하가 아니지만 (심지어 지후의 회사 내 직급이 더 높지만) ‘연하남’, ‘대형견남’ 등이 키워드로 등장하는 로코물 속 연인들과 비슷한 결을 지녔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아, 역시 크게 벗어나지 못했어’라고 느껴졌던 부분은 종반부, 주인공들이 회사 동료 때문에 아웃팅을 당하고 인사팀장과 면담하는 자리에서였다. 두 사람 관계를 꼬치꼬치 캐묻는 질문에 이어 지우에 대한 성희롱이 시작되자 지후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그는 지우를 향한 자신의 감정을 고백하고 건너편에 자리한 이들에게 분노를 토해낸다. 상황은 다르지만, 이는 연상-연하 커플이 주변의 반대에 부딪히던 숱한 장면들 속 구도와 유사하다. 두 사람을 향해 파도가 밀려들 때, 그들의 관계를 붙잡는 건 늘 멋있었던 어른 여성이 아니라 어린 남성이다. 마찬가지로 지후는 갑자기 용기를 내어 그녀를 보호하고 돌을 던지는 이들에 맞서 싸운다. 나는 이 지점에서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유는 섭 앞에서 늘 멋있었던 돔이 상황을 해결해주길 바랐기 때문이다. 지우가 무례한 이들의 쪽팔린 비밀을 공개하며 상황을 조정하긴 하지만 큰 소리를 내는 사람이 지후라는 점은 아쉬웠다. 색다른 취향을 다루기에 조금은 색다른 연인 관계를 보여줄 거라 기대했던 영화가, 기존 로코물 공식을 끝내 포기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의문이 들었다. 혹 내가 지나치게 기존 로맨스 서사를 중심으로 이 영화를 판단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실로 클라리스 쏜의 책 <S&M 페미니스트>를 읽자 생각이 바뀌었다.
BDSM을 성적 취향으로 인정하는 데 동의할지라도 정말로 잘 알지 못하면 의구심을 버리기 어려운 법이다. 혹자는 ‘진짜’ 도미넌트와 서브미시브라면 현실의 모든 영역에서 명령과 복종을 수행하기 원할 것이라 말한다. 또 누군가는 그들의 판타지가 과연 연출된 플레이로 충족될 수 있겠느냐 묻기도 한다(이는 실제 <모럴센스>를 본 사람들의 리뷰에서 볼 수 있는 의견이다). 스스로를 페미니스트이자 비디에세머로 정체화한 쏜은 단호하게 말한다. 일각에서 논하는 ‘진짜’ 돔/섭의 역할과 판타지란 허구적 관념일 뿐이며, SM플레이는 반드시 상호 합의에 기반해야 한다(하고 있다)고 말이다. 성적으로 도미넌트 혹은 서브미시브 성향을 지녔다고 해서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 가학적이거나 피학적인 경향을 드러내는건 아니다. 특히 섭이 돔에게 무조건적 복종을 맹세하며 인간관계의 권력구조를 굳건히 하는 데 일조한다는 (그래서 윤리적이지 않다는) 주장은 이들 관계의 복잡한 층위를 단면으로 잘라 확대 해석한 것과 같다. 돔과 섭의 관계는 어느 누구의 것과 마찬가지로 서로의 욕망을 타협하고 조정하며 고유하게 형성된다. 서브미시브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명백하게 요구할 수 있다. 이는 플레이에 드러나는 권력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동적이라는 의미다. 물론 여성이 서브미시브일 때 현실의 기울어진 성별 구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쏜의 정의에 따르면 합의를 벗어나 발생하는 폭력은 명백히 범죄다. 여성이 서브미시브로 참여하는 SM플레이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이들은 자신의 욕망을 억눌러야 하는가? 쏜은 이렇게 말한다. “‘복종은 여성의 역할’에는 아무 뜻도 없다. …모든 여성이 스스로 부여하고 싶은 의미 외에는.”(253)
다시 <모럴센스>에 대한 얘기로 돌아와 보자. BDSM을 다룬 콘텐츠는 분명 더 많겠지만 비디에세머가 아닌 내가 그에 관해 지금까지 접한 건 영화 <세크리터리>(2002)가 전부다. 물론 SM을 재현하는 이미지는 영화와 드라마에 단편적으로 계속해서 등장했다. 극중 비디에세머들은 현실에서도 상종 못할 인간, 혹은 뒤틀린 욕망을 지녀서 우스운 변태로 그려졌고 종종 주인공들의 비웃음을 받으며 이야기에서 퇴장했다. <세크리터리>의 경우 오래 전에 본 작품이라 극의 세부적 사항들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모럴센스>가 시도한 만큼의 야심, 즉 두 사람의 욕망을 개인이 아닌 사회적 차원에서 조망하고 이를 주류 연애 서사 해체에 이용하는 대담함을 보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모럴센스>는 관객에게 지우와 지후의 관계가 합의에 의한 것임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BDSM이 권력을 이용한 착취라는 세간의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다. 두 사람의 플레이는 엄연히 계약서를 기반으로 진행된다. 지우는 지후에게 욕을 퍼붓고 채찍질을 가하지만 이는 철저히 요구에 응한 행동이다. 지후는 “짓밟혀지길” 원하지만 돔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수동적 인물이 아니다. 그는 안대를 벗지 말라는 지우의 말에 “아직 제 주인님 아니시잖아요”라 답하고 “저희 연애해요, 명령이에요”라는 말에는 “죄송해요. 연애는 안 해요”라 대응한다. 지우와의 관계 너머에서도 지후는 서브미시브에 대한 통념(-생활 전반에서 복종적인 면을 보일 것이다-)을 배반한다. 그는 지기 싫어하는 성격을 지녔고 할 말은 반드시 하고야 마는 사람이다. 홍보부 팀장이 리스크를 떠안고 일을 진행하자 그는 매서운 눈빛을 띠고 “이거 해결하고 갑니다”라며 으름장을 놓는다. 이 장면은 그가 지우의 애완견이 되었던 첫 플레이 이후 바로 등장한다. 그가 서브미시브라는 하나의 이미지로 일축되는 걸 막기 위한 영화의 전략이다. 무엇보다 지후를 징그럽다며 밀쳐낸 전 연인 하나가 “왜? 굴욕당하는 게 좋다며?”라고 막말을 내뱉는 모습이 지후의 악몽으로 등장하는 장면은, 그가 매 순간 비인격적으로 대우받는 걸 좋아하는 게 결코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앞서 언급한 지후의 자리 박차고 일어서기 또한 이런 맥락과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영화에 가해지는 또 다른 부정적 의견은 영화가 주인공들의 감정 연결에 신경 쓰기보다 별로 수위가 높지 않아 불필요한 성향씬으로 시간을 채웠다는 것이다. 이 영화가 주인공들의 감정선을 묘사하는 데 썩 훌륭하지 않다는 점은 동의한다. 가령 영화는 지후가 지우의 마음을 거절할 때의 두려움, 그 근원을 정확히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는 지우를 태양에 빗대며 가까이 있으면 자신이 타버릴까 무섭다고 말한다. 이 말은 서브미시브인 그가 도미넌트인 그녀 옆에 있으면 자아의 경계가 무너질까 두렵다는 의미일 테다. 하지만 나는 영화를 볼 때 지후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클라리스 쏜의 책을 읽은 뒤에야 그 의미를 깨달았다. 비디에세머들의 고민을 경험하거나 생각해본 적 없는 관객 중에는 나처럼 지후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아니, 하나와는 끝난 거 아니었어? 지우가 좋다는데 잘 된 거 아냐?’ 영화가 캐릭터의 감정을 족집게처럼 짚어내며 설명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모름지기 비디에메서를 향한 사회의 시선을 기입, 그들에 대한 이해를 시도하는 영화라면 응당 더 섬세했어야 한다.
하지만 감정 묘사가 설익었다는 생각과 별개로, 주인공들의 마음을 더 잘 표현하기 위해 성향씬을 덜어냈어야 한다는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이 없다면 이 영화가 무엇이 되겠는가? 지우와 지후가 서로에게 끌리는 건 각자의 인격과 외모 때문이지만 감정이 깊어지는 건 플레이를 진행하면서다. 영화는 BDSM을 사랑의 표현으로 인정한다. 즉, BDSM은 단순히 쾌락의 수단이 아니라 사랑의 표현일 수도 있다. 플레이를 할 때 살아있음을 느낀다는 지후에게 지우는 그의 전 연인 하나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해가 안 돼.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있다고 느낀다는 데 그것 좀 해줄 수 있지.” 지우에게 플레이는 사랑의 표현이 될 수 있다. 하이힐로 지후의 등을 짓누르고 집으로 돌아온 뒤, 지우는 그에게 닿았던 감촉을 떠올리며 상기된다. 이때 그녀의 몽롱한 눈빛은 단순히 성적 흥분의 여진으로 비치지 않는다. 그보다 복잡한, 감정적 여운을 흡수하는 것처럼 보인다.
알고 있다. 성향씬이 불필요했다고 하는 이들의 불만이 한편으로는 감정 묘사의 손실보다 섹슈얼 텐션의 ‘부족’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19금인데도 섹텐이 터지지 않는다는 요지의 평을 여럿 보았다. 고백하자면 나 역시 다른 로맨스 영화들을 볼 때 느꼈던 감흥을 크게 느끼지 못했는데, 이는 어쩌면 당연하다. 나는 BDSM을 사랑의 표현으로 보는 것에 생소하다. 나는 나와 같은 관객들의 감상이 기존 로맨스 서사에서 남성 도미넌트-여성 서브미시브 구도의 재현만을 반복 학습하게 된 결과는 아닐까 의심한다. 오늘날 대중문화가 그리는 멋있는 남성의 이미지는 과거보다 무해한 남성에 가까워졌지만, ‘덩치차이’라는 단어가 일러주듯 여전히 변하지 않은 부분도 있다. 바로 여성을 감싸줄 만큼의 커다란 몸과 그에서 뿜어져나오는 압도적인 정열이다. 관객은 그가 상대를 향해 직진하는 데서 매력을 느낀다. 여기에 잘못된 점은 전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주류 대중문화컨텐츠의 90% 가 이성애의 일대일 독점적 관계를 그리며 남성을 쾌락의 제공자로, 여성을 쾌락의 수여자로만 보여준다면 문제일 것이다. 나의 적지 않은 영화적 경험을 총합해보면 이성애 커플의 거의 모든 베드씬이 오르가슴에 달하는 여성의 얼굴을 보여주는 것으로 씬을 마무리했던 것 같다. 카메라는 남성의 몸을 훑기도 하지만 슬금슬금 이동해서 결국엔 여성의 얼굴에 정착한 뒤 그녀를 지켜본다. 성적 힘은 남성에게 있지만 쾌락의 얼굴은 늘 여성의 것이었다. 우리는 그녀를 보며 섹슈얼한 텐션을 느낀다. 남성의 얼굴을 보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다. <모럴센스>를 보며 가장 놀랐던 건 이 지점이다. 나는, 어쩌면 처음으로, 쾌락의 얼굴로 남성을 보았다. 그것도 자위를 하는 게 아닌 장면에서! (나는 BL물을 제외하고 말을 하고 있다).
앞에서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한 부분을 짚고자 한다. 남성을 성적 힘의 소유자로, 여성을 그 힘에 압도당하는 얼굴로만 그리는 게 문제가 되는 까닭은, 생식을 목적으로 하는 남녀관계만 허용 했던(/허용하는) 사회의 역사가(/현실이) 있기 때문이다. 이 맥락 안에서 SM플레이는 단연 성적 일탈로 간주되고 이성애를 벗어나는 모든 관계는 범죄가 된다. 일상적 규범이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고 억압의 기제로 쓰인다면, 그것에 대한 재고와 해체가 시도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 영화에 동성애 차별 문제가 언급되는 건 당연하다. <모럴센스>는 면면에서 기존의 로맨스 서사를 답습하기보다는 교란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그러한 목표가 명중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뉴 페이스의 얼굴은 축하할만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