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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희구 Feb 21. 2022

작은 불씨는 어디에나

중심에서 주변으로의 이동

사진출처: 교보문고



남자친구와의 부주의한 섹스 때문에 임신하게 된 렉시는 고민 끝에 낙태를 결심한다. 그러나 그녀가 사는 셰이커하이츠는 중산층 동네의 완벽한 표본으로, 그곳 학생들이 임신하고 추문을 뿌린다는 건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아직 10대이며 셰이커하이츠 내에서도 모범을 추구하는 부모를 둔 렉시는 몰래 수술을 받으려 한다. 그녀는 남동생 무디의 친구이자 자신과 막 가까워진 펄에게 보호자로 동행해줄 것을 부탁한다.


렉시가 10년 넘게 친한 친구로 지낸 세리나를 두고 자신에게 은밀한 부탁을 하자 펄은 의아함을 내보인다. 그러나 “세리나 말고 널 원해,” “너라면 비난하지 않을 것 같았어”라는 달콤한 말에 펄은 “일말의 자부심”을 느끼며 동행을 약속한다. 하지만 친밀함은 곧 서먹한 거리가 지켜주던 예의를 무너뜨린다. 진료카드에 이름을 적어야 하는 순간 렉시는 자신의 것이 아닌 펄의 이름을 써넣는다. 따져 묻는 펄에게 그녀는 말한다. “그냥 이름일 뿐이야.”


이 장면을 읽을 때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렉시의 행동에 묻어 있는 이기심이 분노를 유발했다. 펄이 결국엔 이름을 빌려주는 데 동의했을지라도 렉시의 행동에서 드러나는 속셈은 시커멓고 가시가 돋아 있다. 렉시에게 동행자가 펄이어야 했던 이유는 명백하다. 그녀가 전학생이고, 아버지가 없으며, 엄마와 단둘이 사는 집이 렉시 부모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렉시는 내성적인 펄을 보며 자신이 이끌고 도와줘야 한다는 의무감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그녀를 데리고 쇼핑몰을 돌며 패션으로 자기를 드러내는 방법을 알려주거나 자신이 쓰던 물건들을 빌려준다. 아무리 선의였다고 하나 무의식 중에 렉시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펄이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만약 펄이 이름을 빌려줄 수 없다고 했다면 렉시는 배신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녀의 엄마 엘리나가 펄의 엄마 미아에게 환대받지 못할 호의를 베풀고 상대의 미적지근한 반응에 기분 나빠했던 것처럼? 


페미니스트 작가 벨 훅스는 사회의 중심에 속한 자와 주변에 속한 자의 시야는 필연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페미니즘: 주변에서 중심으로』). ‘백인-이성애-남성-중산층’ 규범에서 멀어지는 건 사회의 변두리로 밀려남을 의미하는데, 그 과정에서 몸에 새겨지는 차별의 경험은 사회적 소수자에게 구조적 불평등을 인식하게 한다. 반면 중심에 속한 자들은 밀려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선 자리에서만 사고하게 되며, 부조리한 구조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좀처럼 상상하지 못한다. 아무리 열심히 주위를 둘러본다 해도 외부의 시선을 초청해 세상을 보지 않는 한 기존 질서에서 크게 벗어나 사고하지 못하는 것이다. (캐시 박 홍이 『마이너 필링스』에서 소개해준 개념에 따르면 ‘의도적 무시’라 할 수 있겠다) 『작은 불씨는 어디에나』가 그리는 여러 갈등은 분명 인물들의 복잡하고 고유한 성격 차에서 비롯한다. 엘리나와 그 친구의 경우처럼, 소설은 오만한 태도와 구차한 생각이 어떻게 관계를 기형적으로 형성하는지, 그리고 도저히 굽힐 수 없는 자존감과 자만심이 어떻게 관계를 영원히 망쳐놓는지 잘 보여준다. 하지만 모든 갈등이 서로 맞물리지 못하는 개인들의 오랜 시간 축적된 불만과 불평, 수동공격적 행동으로 진행되는 건 아니다. 그 기저에는 사회의 갖은 규범이 빚어낸 권리와 시선의 차이가 있다.  


렉시가 허락을 구하지 않고 펄의 이름을 대신 적어 넣은 건 우정에 기댔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디와 펄의 싸움은 짝사랑에 실패한 소년의 좌절이 아니라 성별 불평등이 낳은 편견으로 인해 악화된다(“네가 형과 그 짓을 하겠다고 동의하는 난잡한 계집애들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했어.”) 베베 초우가 매컬러 부부를 비롯해 세상과 벌이는 대결은 그녀의 인종, 계급, 성별과 직결되어 있다. 애초에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아이를 포기하게 만들었단 말인가.


소설의 가장 중심적인 갈등이라 할 수 있는 엘리나와 미아의 싸움도 마찬가지다. 겉으로 보기에 두 사람의 대립은 정착민과 유목민의 양립할 수 없는 성향 차이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잠재되어 있던 갈등이 표면으로 폭발하고 난 뒤 미아는 다음처럼 얘기하기도 한다.      


“당신은 상상할 수 없는 것 같네요. 왜 누군가는 당신과 다른 삶을 선택하는지. 왜 누군가는 넓은 잔디밭이 딸린 큰 집과 멋진 차와 사무직 말고 다른 무언가를 원하는지, 왜 누군가는 당신이 선택한 것과 다른 것을 선택하는지.” ...“당신은 두려운 거예요. 무언가를 놓쳤을까 봐. 자기가 원하는 줄도 몰랐던 무언가를 포기했을까 봐.”      


그러나 두 사람의 문제를 ‘내가 갖지 못한 삶에 대한 질시/두려움’으로 표현하는 건 갈등의 실체를 미화한 것이다. 엘리나는 미아보다 사회적, 도덕적 우위를 차지하고 싶어 한다. 그녀가 미아의 비밀을 파헤쳐 약점을 잡은 까닭은 자신이 누린 적 없는 인생이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초라하게 만들어서가 아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실천하는 자신에게 ‘감히’ 감사해하지도 않고 눈치도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 미아가 남편과 함께 자기 집을 가진 평범한 셰이커하이츠 주민이었다면 엘레나는 어떻게 행동했을까? 여전히 그녀의 비밀을 파헤쳐 도덕적 우위를 점하려 아등바등 노력했을까?  



책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드라마.  <빅 리틀 라이즈>때처럼 리즈 위더스푼이 제작에 참여했다.



작가 셀레스트 응은 교차하는 억압적 범주들의 존재를 의식하고 세밀하게 드러내되, 그 범주에 따라 인물의 옳고 그름을 결정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개인이 태어나는 위치가 그의 선함과 악함을 운명 짓는다고 보지 않는다. 엘리나에게는 사회 정의에 대한 열정이 끓어오르던 때가 있었다. 그 불씨는 결국 안락함과 의도적 무지에 대한 욕망에 의해 꺼졌지만 막내딸 이지에게 옮겨붙는다. 이지는 주위에서 일어나는 부조리함에 예민하게 반응하느라 늘 고요히 분노에 차 있다. 엘리나를 비롯한 가족 모두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미아만은 이지가 기다려왔던 질문을 던져준다. “그래서? 넌 그 일(너를 분노하게 하는 것)에 대해 뭘 할 건데?” 미아는 언젠가 “때로는 모든 걸 완전히 태워버리고 나서 다시 시작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이지는 엄마와 언니, 오빠가 미아와 펄에게 저지른 잘못을 깨닫고 집을 불태워버린다. 그리고 이미 떠난 두 사람을 찾아 나선다. 중심에서 주변으로의 이동. 의도적 무지의 상태를 적극적으로 벗어나려는 시도. 셀레스트 응은 이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미아가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안다(펄을 유산했다고 거짓말한 것과 관련하여). 나 역시 미아의 무결하지 않음에 대해 몇몇 문장을 쓰다가 지웠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지닌 문제를 개인적 차원의 이기심으로 볼 수 있는가? 그녀는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가? 애초에 그녀에게 기이한 선택지를 내민 사회가 문제였던 건 아닌가? 기구한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들이 가련한 모습으로 휩쓸려오는 풍랑들을 그대로 맞이할 때 사람들은 그를 위해 대신 싸워주고 싶어한다. 하지만 주인공이 파격적인 선택을 내리며 자신을 구할 때는 종종 약자의 선하고 도덕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 있다며 인상을 찌푸린다. 미아는 다만 “뭘 할 건데?”라는 질문을 자신에게도 똑같이 던지고 용감히 행동했을 뿐이다. 알고 있다. 이 말이 미아의 갖은 선택들이 지닌 층위를 납작하게 만든다는 걸. 하지만 정말로 나 역시 묻고 싶다.   그렇다면 당신은 무얼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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