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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희구 Mar 06. 2022

창문의 안과 밖,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

책 '내 생의 마지막 다이어트' 


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최근 운동하는 여성들이 화두에 오르며 여성 신체에 대한 이미지가 다변화되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과연 그럴만하다. 작년부터 대중적 인기를 끌어모은 방송 「스트릿 우먼 파이터」와 「골 때리는 그녀들」은 각양각색의 신체 유형을 지닌 여성들을 등장시켜 이들의 ‘활동하는 몸’을 보여준다. 이제껏 미디어 속 움직이는 여성 신체가 주로 ‘보여지는 몸’을 위해 전시되었다면 두 프로그램은 여성들이 움직임 자체를 목표로 삼도록 한다. 말랐거나 뚱뚱하거나 혹은 키가 크거나 작거나 이 다양한 육체들은 특정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대중은 이들의 몸을 품평하기보다 그 몸에 묻어있는 노고에 응원을 보낸다. 그러나 이처럼 여성이 자기 몸을 기능적인 것으로 바라보게 하는 서사가 각광받고 있을지라도 우리 문화 속 여성의 이상적 몸은 여전히 마른 것이다. 아니, ‘관리되지 않은 몸’은 구박데기 신세라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일정 규격을 벗어난 몸, 다른 의미로 시선을 받지만 존중받지는 못하는 몸들의 투쟁 서사가 끊이지 않는 이유이다.


십 대 시절 지나친 다이어트로 35kg이 조금 안 되는 무게를 찍은 적이 있다(나의 키는 150cm를 조금 넘으며 원래 몸무게는 45kg을 넘지 않았다). 탈모와 생리불순, 마침내 대상포진이라는 병을 얻은 뒤에야 나는 두려움에 떨며 탄수화물을 섭취하기 시작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면역력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치를 떨었다. 대체 그깟 무게가 뭐라고 나를 이렇게 망가뜨렸던 거지. 나는 몸에 대한 이야기들에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궁금했다. 사회가 ‘아니’라고 말하는 신체를 지닌 여성들이 ‘아니, 이게 나야’라고 말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지. 어떻게 자신의 무게를 끌어안은 것인지.


갖은 서사를 접했지만 그중 기만적이지 않으면서 가장 진솔하고 내게 몸을 편하게 느끼도록 도와준 글은 린디 웨스트의 『나는 당당한 페미니스트로 살기로 했다』이다.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한 작가가 쓴 글들을 엮은 책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몸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지는 않는다. 하지만 뚱뚱하다는 말에 붙은 경멸과 수치를 지우고 본인을 뚱뚱한 사람이라 칭하는 그녀의 언어는 너무나 솔직하고 정의로워 그 에너지에 감화되지 않을 수 없고, 종국엔 내 몸에 들러붙은 외부의 시선을 분연히 떨쳐낼 용기를 쥐여준다. 특히 몸에 익숙해지려 자신과 비슷한 체형을 지닌 사람들의 사진을 계속 찾아봤다는 일화는 내게 깊이 각인됐는데, 응시하는 주체의 인식이 몸을 평가하는 게 아니라 응시당하는 몸이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기도 한다는 걸 새삼 자각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책을 접했을 때는 이미 내키는 대로 먹고 무게를 재지 않은 지 몇 년이 흐른 상태였지만 시선은 언제나 미디어 속 이상을 좇고 있었다. 웨스트의 글 덕분에 나는 마침내 스크린에서 눈을 떼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고, 내 고유한 몸의 형태가 세상의 다양성을 만드는 한 축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렇게 좋아하는 책이 드라마로 나왔다는 소식을 뒤늦게 접했을 때 나는 당연히 신나는 마음으로 트레일러를 찾아보았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스크롤을 내려 확인한 댓글창 때문에 기분이 더러워졌다. 코멘트들은 대체로 작품의 장점과 본인의 감상을 언급하는 글들이었지만 일부는 배우들의 외모에 대한 질 낮은 농담이었다. 새벽녘의 감성이었는지 뭔지 모르겠지만 평소에는 잘 안 쓰던 댓글을 남겼다. 영어로 썼던 글을 그대로 옮기자면 내용은 이렇다. ‘이 무례한 댓글들... 뚱뚱한 사람들에게 쪽을 주는 게 도와주는 거라 생각하겠지만 정신 차려. 당신들은 그저 헤이터들일 뿐이야!’ 놀랍게도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내게 댓글이 달렸다. 그인지 그녀인지 모를 외국인은 몹시 화 나 있었다. ‘어쩌면 사람들이 정신 차리라고 해주는 건지도 모르지. 병적으로 비만한 건 건강하지 않아. 너희는 진짜 뚱뚱한 게 건강한 척 거짓말 좀 그만해야 해. 아니거든그건 위험하다고. 비만은 심각한 건강 문제를 동반하고 너희를 더 빨리 죽게 해. ...... 그러니까 안 그런 척 좀 그만해.’


열이 솟구쳤다. 반박을 하기 위해 글을 썼다가 고치다가 말을 더 적었지만 아무래도 성이 차지 않아 한국어로 하고 싶은 말을 다 적었다. 갑자기 외국어로 반박을 하니 이상하다 싶었는지 상대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글을 쓰는 지금, 그 밑에는 또 다른 네티즌의 소심한 (소신) 글이 달려 있다. ‘뚱뚱한 건 좋지 않아...’


오늘날 뚱뚱함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가난에 대한 인식과 묘하게 닮아있다. ‘도달해야 하는 기준이 있고 미친 듯이 노력하면 닿을 수 있는데, 저들은 그걸 안 한다. 그러니 한심하다고 구박을 들어도 싸다.’ 하지만 정상의 기준에 몰두하는 이들이 죽어도 받아들이지 않는 건, 애초에 그 기준(그리고 그것이 약속하는 행복)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과 노력이 항상 정비례의 결과를 담보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마르지 않은 몸을 지닌 모두가 게으르거나 스스로를 파괴해도 좋다고 여기는 인생의 포기자는 아니다. 그 몸은 그저 하루하루 열심히 산 결과일지도 모르며 웨스트의 말마따나 타고난 것일 수 있다. 그러니 누군가는 뚱뚱하게 되길 선택하지 않고 그렇게 된 건지도 모르며, 누군가는 뚱뚱한 몸을 갖고 건강할 수 있다. 하지만 다이어트/몸 관리에 중독된 사람들은 이를 못 본 척 무시한다. 주식 열풍과 자산 불리기에 대한 얘기들이 오가고 있지만 계급의 유동성은 사라진 이 시대에 사람들은 몸에 더욱 집착한다. 어쩌면 우리의 몸뚱아리란, 계급보다 내 마음대로 움직이기 쉬운 대상이기 때문이다(물론 비장애인들에게 그러하다). 여전히 활개치는 다이어트 광고나 연예인의 몸무게를 전시하고 소비하는 미디어는 사람들의 그러한 심리에 기생한다. 이 모든 허상과 사기, 그리고 잘못된 믿음이 합쳐진 결과, 우리는 몸이 일종의 계급이 된 시대를 살고 있다. 관리한 몸과 관리하지 않은(/못한) 몸의 가시성이 두드러지는 시대. 전자에는 사회적 인정과 찬탄이 따르지만 후자에는 지적질과 훈수가 쏟아지는 시대. 게으름의 특성을 개인의 몸에 붙이고 함부로 말을 뱉는 시대.     


“몸이 변하지 않으면 새로운 삶은 어림없었다. 봉희에게 살찐 몸은 마치 낮은 신분과도 같았다.”     


권여름 작가의 『내 생의 마지막 다이어트』는 몸의 형상과 그에 따른 사회적 차별을 전면화한 소설이다. 여성의 외모에 대한 사회 압력을 드러낸 서사들(「아이 엠 프리티」와 「내 아이디는 강남미인」과 같은 서사들)이 종종 이성 연인의 사랑을 자신감 회복과 모든 문제의 해소로 여겨왔던 것과 달리, 이 소설은 사랑을 지우고 계급적/실존적 문제로서의 몸을 탐구한다. ‘유리 단식원’의 코치 봉희는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몸을 갖고 있지만 과거, 외모 때문에 사회 진입에 어려움을 겪었다. 여상에서 전교 1등을 놓친 적이 없던 그녀는 졸업을 앞두고 철석같이 믿었던 취업에 실패한다. 교무부장은 그녀의 옆구리살을 붙들고 말한다. “뒷심이 없어. 그러니까 살 빼라고 했잖아.” 취업 실패가 살의 문제로 귀결된 것. 동시에 살을 진작 빼지 못한 자신이 골칫덩이가 된 것. 이는 봉희의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결국 공장에 취직한 그녀는 고된 노동을 먹을 것으로 위안하며 생활하던 중 무게가 135kg에 다다르자 퇴사한다. 그리고 다이어트를 시작한다. 언젠가 대학에 가리라 꿈을 꿨지만, 그 몸으로는 젊은 여성 청년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았던 탓이다.


유리 단식원에 입소해 살을 뺀 봉희는 코치가 되어 수련생들을 이끈다. 개중에는 봉희의 단식원 동기이자 다큐 예능 ‘Y의 다이어트’ 주인공 운남이 있다. 방송이 큰 인기를 모으는 와중에도 묵묵히 운동하며 굶주림을 이겨내던 운남은 어느 날 자취를 감춘다. 봉희와 함께 그녀의 행방을 궁금해하던 독자는 소설 후반부, 그녀의 과거 한 토막을 듣게 된다. 명문대 장학생이었던 그녀가 어쩌다 학교 축제 무대에 올라가게 되었고, 그 무대가 부서지며 돼지라 불리게 되었다는 이야기. 누군가의 증언을 통해 스치듯 등장하는 정보지만, 단 몇 줄의 문장은 운남에게 가해졌던 인격적 살인을 짐작하게 하고 그로써 그녀가 내보였던 무력감과 절박함을 설명한다. 그녀는 봉희에게 “코치님, 나는....”이라는 끝맺지 못한 이메일을 보낸다. 봉희는 나중에서야 운남이 하고 싶었던 말이 “코치님, 나는 살고 싶었나 봐요”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소설은 몸 때문에 존재를 조롱당하고 거부당했던 이들의 좌절, 그리고 굶주림과의 서글픈 투쟁을 통해 질문한다. 우리는 왜 우리 자신으로 존재할 수 없는 걸까?


딸이 대학을 자퇴하고 단식원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운남의 엄마는 구유리 원장을 찾아간다. 그녀는 딸이 학업을 그만둔 것보다 굶주렸다는 사실에 더 마음 아파한다. 사라진 운남을 찾아 단식원 곳곳을 돌아다니며 “미친 곳이여” 말하는 그녀에게 구원장은 코를 치며 말한다. “요즘 세상에서 살찐 몸으로 사는 게 얼마나 비참한 일인 줄 아세요?” 이에 운남 엄마는 지지 않고 외친다. “요즘 세상이 그러믄, 그냥 내 세상에서 살면 되는 거지. 뭔 영화를 누리겠다고 억지로 먹는 걸 끊어.”


책을 읽다 위 문장과 맞닥뜨렸을 때 한참 페이지를 넘기지 못했다. ‘요즘 세상이 그러믄, 그냥 내 세상에서 살면 되는 거지.’ 운남과 봉희에게, 그리고 아마 독자들에게 전하는 메시지였을 문장. 허탈할 만큼 단순하지만 명료한 해답. 내용은 물론이거니와 저 말을 하던 운남 엄마의 기세에서 나는 크나큰 힘을 얻었다. 하지만 내 세상의 방어벽이 밖에서 쏟아지는 날카로운 말에 찢어진다면? 그 틈에서 내가 흔들린다면? 한번 비틀린 시야는 다시 바로잡히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내 생의 마지막 다이어트』가 천착하는 문제도 사실 이것이다. 내 세상을 지킬 수 없게 만드는 외부의 폭력적 언사들. 소설은 여성의 다이어트를 미(美)에 대한 욕망이나 허영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봉희와 운남이 각자 살과 관련해 겪는 절망적 순간은 다이어트가 ‘아름다움의 강제’라는 폭력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라는 걸 보여준다.     


소설에는 몸의 관리가 ‘내’가 아닌 ‘세상의 요구’로 시작되는 걸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운남이 사라진 뒤 ‘Y의 다이어트’는 새로운 주인공으로 아이돌 연습생 안나를 낙점한다. 다이어트에 성공하면 데뷔시키겠다는 소속사의 공언에 안나는 단식원의 일정이 끝난 뒤에도 요가실에서 춤 연습을 하며 칼로리를 태운다. 한데 특이한 점은 안나가 벽에 있는 거울이 아닌 창에 비친 모습을 보며 연습을 한다는 것이다. 봉희는 늦은 밤, 요가실 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그 이유를 짐작한다.


“요가실 전면의 거울보다 창에 비친 그림자가 좀 더 살집이 있어 보였다. 요가 강사는 요가실 거울에 속지 말라고 자주 말했다. 봉희는 안나가 멀쩡하게 거울을 옆에 두고 창을 바라보며 춤을 췄던 이유가 어쩌면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방금 삐져나온 옆구리를 꽝꽝 때렸듯이, 더 엄격하게 자신의 몸을 바라보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아직 갈 길이 먼 자신의 몸을 미워하고, 그것을 동력 삼아 더 강렬하게 움직였을 것이다.”


요가 강사의 말과 창문은 사회다. 창문에 비친 부한 내 모습은 사회가 말하는 내 모습이다. 이는 당연히 기만적이다. 하지만 사회는 내가 그 기만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그러니까 창을 나서지 못하도록 붙들고 오히려 그 이미지를 보며 나 자신을 미워하라고 한다. 창문에 비친 부한 모양새의 내 모습과 그 너머 창밖의 세상. 그리고 그 세상과 창들에 둘러싸인 비좁은 공간. 외모에 대해 여성이 사회로부터 받는 압력을 이보다 더 잘 구현한 공간이 또 있을까. 물론 모든 다이어트와 미용수술이 외부에서 가해지는 압력에 의해 이뤄지는 건 아니다. 아무리 바깥에서 촉발되었다 할지라도 아름다워지기를 목표하는 데 개인의 욕망이 개입되지 않을 리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리고 이 소설이 보여주고자 하는 건, 아주 많은 여성이 자신의 눈과 기준이 아니라 세상의 시선과 잣대에 맞춰 스스로를 혐오하고 괴롭힌다는 사실이다. 창을 보며 살을 꽝꽝 때리는 봉희와 땀 흘리며 춤추는 안나의 모습이 섬뜩해지는 까닭은 이들의 문제가 단순히 요가 강사의 말을 멀리하거나 요가실을 나선다고 해서 사라지진 않으리라는 짐작 때문이다. 창문은 어디에나 있으므로. 


나오미 울프가 굶주림을 여성들 사이에 퍼진 병으로 묘사한 지 어언 30년이다(『무엇이 아름다움을 강요하는가』). 그러나 이 병은 사그라질 기미는커녕 여전한 전파력으로 여성들을 쓰러뜨리고 있다. ‘요즘에는 굶어서 빼지 않는다, 그럼에도 건강을 위한 몸 관리는 필요하다’ 등의 말을 하고 싶다면 잠시 숨을 고르고 그 말의 기저에 깔린 의도를 의심해보길 바란다. 정말로 건강을 염려하는 건가. 아니면 타인에 대한 우월감을 뽐내고 싶은 건가. 소설 속 미용산업을 건강관리로 둔갑시킨 구유리 원장이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녀를 떠받든 미디어와 대중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러한 미디어와 대중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까. 내 몸과 다른 사람의 몸을 강박적으로 훑으며 잣대에 따라 평가하고 여기저기에 말을 얹는 사람에서?


소설의 책장을 덮고 린디 웨스트의 몸에 대한 글을 떠올리다 생각했다. 아마도 이 소설이 우리를 인도하는 자리는 비좁은 방구석에서 자기 몸을 바라보고 있을 여성들과 마주할 수 있는 창밖이 아닐까. 봉희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한다. 만일 그녀가 다르게 행동했다면 운남과 안나에게는 다른 미래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봉희가 창밖에서 먼저 그녀들의 공간을 열어주었더라면, 그녀를 바라보는 운남과 안나의 생각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어디에 있을까?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창밖에 있는 걸까? 타인에게 먼저 손을 뻗어줄 수 있을 만큼 강인할까? 바라건대 그러고 싶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깡마른 나에서 멀어졌다고 생각하지만 아주 가끔, 내가 얼마나 벗어나 있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내 생의 마지막 다이어트』가 내게 남긴 마지막 질문은 이것이다. ‘너는 어디에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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