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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희구 May 02. 2022

가난이라는 응급상황은 우리 모두의 문제다

책 ‘노동의 배신’

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작가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어느 날 「하퍼스」 편집장과 식사를 하던 중 ‘저임금 직장 종사자들이 받는 월급으로 생활이 가능할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전부터 계급과 자본주의에 대해 목소리를 높여왔던 작가다운 대화주제였다. ‘누군가 기자 정신으로 워킹푸어의 삶에 대한 진실을 전해야 해!’ 당연히 자신보다 젊은 저널리스트가 그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에런라이크는, 그러나 편집장 앞에서 아이디어를 낸 대가로 직접 취재에 나서게 된다. 그녀는 세 달간 각기 다른 지역에서 식당 종업원, 청소부, 그리고 요양사와 월마트 직원으로 일한다. 그 시간을 기록한 결과가 바로 책 『노동의 배신』이다.


이따금 트위터에서 그런 글을 본다.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의 특징’을 제목으로 달고 게으름에 해당하는 인격적 특징을 나열해놓은 글. 이런 트윗을 작성한 이들은 대체로 자신의 ‘노오력’ 덕에 계급이 상승했다는 간증을 덧붙이며 자신처럼 매몰차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인도하고 싶어 한다. 가난에 대해 이런 식으로 왈가왈부하는 자들이 정녕 계급 이동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이들이 가난이라는 ‘응급상황’에 대해 내비치는 비좁은 인식이다(『노동의 배신』에서 에런라이크는 가난을 응급상황으로 규정한다).


가난은 어깨를 한번 털면 떨쳐낼 수 있는 짐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그것은 삶의 조건이다. 부지런하지 않아서, 쓸데없는 소비를 해서 가난에 머물려 하는 사람은 없다. 한 사람의 생애에 닥치는 일들은 오롯이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지 않고 그가 속한 시대, 상황과 맞물려 벌어진다. 사실 인터넷에 떠도는 가난한 사람에 대한 묘사 중 진짜 가난한 사람에 가까운 건 없어 보인다. 사회 변두리에 서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생존을 위해 종일 노동하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취약한 이들의 입장과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살만한 사람들이 가난이라는 글자를 뒤집어쓰고 갖은 의견과 해석을 내놓는 상황. 비단 한국의 일만은 아니고 작금의 세태도 아니다.


<노동의 배신>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 3부까지는 에런라이크가 일하며 경험한 것들에 대한 기록이, 4부에는 그에 대한 해석이 담겨 있다. 책 전반에 걸쳐 에런라이크가 구성하는 문제의식은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된다. 먼저 최대의 효율을 추구하는 경제적 인간이란 없다. 사람들은 간혹 ‘왜 가난한 사람들은 더 나은 조건을 찾아 나서지 않는가?’ 질문을 던지곤 한다. 에런라이크 역시 이 질문을 내내 던진다. 왜 나의 동료들은 더 나은 임금과 복지를 찾아 나서지 않는 걸까? 그러나 그녀는 내심 그 답을 이미 알고 있다. 효율을 좇는 본성은 그것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에서나 드러난다는 것(“그것은 그들이 그만큼 절박하다는 뜻이었다”). 보다 나은 환경으로 가는 길에 필요한 건 의지뿐만이 아니라 실질적 자원이다. 자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빈곤은 고립을 낳고 이는 곧 비좁은 선택지라는 결과를 낳는다. 현재 다니는 직장에서의 개선도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기업들은 언제든 노동자들을 교체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니까 “자본주의 민주 국가에 속한 자유로운 노동자인 저임금 노동자들이 늘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선택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전혀 자유롭지도 민주적이지도 않은 공간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283).


에런라이크가 두 번째로 주장하는 바는 빈곤한 자들이 점점 더 비가시화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조금 길지만 모두 읽고 마음에 새겨두어야 할 다음의 글을 인용한다.         


고도로 양극화되고 불평등한 우리 사회의 시각적 특성 때문에 빈민들은 경제적 우위에 있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다. 빈민들은 부자들을 텔레비전이나 잡지 표지 등에서 쉽게 볼 수 있지만 부자들은 빈민을 볼 기회가 거의 없고 일부 공공장소에서 마주친다 해도 가난하다는 걸 눈치채기가 쉽지 않다. 중고품 위탁 판매점과 월마트 같은 상점들 덕분에 빈곤층은 실제보다 더 여유 있는 계층처럼 보이도록 치장하는 데 능숙하기 때문이다. 40년 전에는 도심과 애팔래치아 산맥에 흩어져 있는 빈곤 지대를 다룬 ‘빈곤의 발견’이 가장 인기 있는 기사 주제였다. 오늘날에는 빈곤 지대의 ‘사라짐’에 관한 기사를 볼 가능성이 더 높은데, 이는 이른바 ‘인구 통계학적 현실’ 혹은 중산층의 상상력 부족 때문이다. p290     


우리 문화 전반에서도 빈곤층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tv를 틀면 변호사, 의사, 혹은 백수인 재벌들이 등장해서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사회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의 이야기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물론 서민을 대표하는 인물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이들의 생활 조건을 진지하게 탐색하고 재현하는 컨텐츠는 드물다. 매일 명품 옷을 바꿔입으며 통장 잔고를 걱정하는 인물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여기에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으로 대표되는 과시적 전시 습관은 일상 속의 작은 사치가 누구나 부릴 수 있는 한 줌의 여유로 여겨지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요즘 같은 시대에 집에 컴퓨터 한 대 없는 가정이 어디 있느냐는 질문을 던져 코로나 시대 교육의 사각지대에 놓인 아이들의 처지를 허구로 만들기도 했다. 나는 생각한다. 단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어떤 존재를 상상하지 못하는 건 결코 무해한 무지가 될 수 없다고. ‘요즘에 (…)도 없는 /(…)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는 말은 그 빈칸을 채울 여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힌다. 그리고 상처는 때로 분노와 절망을 낳는다.


그러나 우리는 단지 ‘나의 무지가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기 때문에’ ‘그 상처가 나에게 분노로 되돌아올 것이기에’ 지금의 상상력 부족을 벗어나려 해서는 안 된다. 책 속 에런라이크의 주장을 더 적극적으로 해석해보자면 우리는 사회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의 삶을 알고 그들과 연결되어야 할 책임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궁핍을 견딤으로써 인플레이션이 떨어지고 주가가 올라”가며 “워킹 푸어의 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 모두를 위해 익명의 기증자, 이름 없는 기부자가 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296). 나의 안정이 누군가의 취약함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에런라이크의 글을 읽으며 느꼈던 지극히 개인적인 ‘기분’에 대해 설명하고 싶다. 고백하자면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에런라이크는 육체노동자로 일한 경험을 기록하는 내내 자신의 원래 계급적 위치를 의식한다. 단지 일의 힘듦을 묘사하는 것을 넘어 원래의 안락한 삶에서 떨어져나와 ‘그들’의 터전을 체험하고 있는 ‘자신’을 많이 내세운다. 여기에 동료들에 대한 의문(왜 더 나은 직장을 갖지 않는 거지?)을 “노예 근성”과 같은 날카로운 언어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 책을 읽은 많은 독자들이 저임금 직종의 고단함을 보며 많은 걸 깨달았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책 속에 묘사된 많은 부분을 나는 직접 보면서 자랐다. 에런라이크가 도전한 직종은 모두 나의 엄마가 했던 일이다. 엄마가 겪었던 부당함과 내 인생의 많은 부분에 자리했던 무력감을 나는 뚜렷이 기억한다. 그래서 책을 읽는 동안 마음이 불편했다. 나는 힘들다고 외치다가 뒤돌아 동료들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작가보다 글에 등장했던 ‘그들’과 동일시가 더 잘 되었기 때문이다. ‘노예 근성’이라니? 너무 한 거 아니야?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지 않느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계급 문제에 있어 에런라이크가 누구 편에 있는지는 명백하다. 그녀가 언급한 노예근성 역시, 노동자들의 시야를 좁히는 부당한 시스템을 비판하기 위한 것임을 안다. 하지만 불편한 마음이 좀처럼 해소되지 않는 까닭은 의심이 들기 때문이다. 그녀가 ‘자신’과 ‘그들’의 다른 위치를 지속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과연 윤리적으로 옳은 일일까? 그들의 삶을 취해가면서? 타인의 삶의 조건을 탐색할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와 언어는 무엇일까. 잘은 모르겠지만 어렴풋이 드는 생각은, 이 책이 ‘그들의 입장에 선 나’가 아니라 오롯이 ‘나’의 시선에서 쓰였다면 어쩐지 마음이 덜 불편했을 것 같다는 거다. 하지만 진짜 노동하는 육체들의 목소리는 대체로 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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