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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희구 May 13. 2022

침묵해줘, 내가 영웅이 될 수 있도록

-책 ‘호러북클럽이 뱀파이어를 처단하는 방식’

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그래디 헨드릭스의  『호러북클럽이 뱀파이어를 처단하는 방식』(이하 『뱀파이어를 처단하는 방식』)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던 중 문득 깨달은 사실이 있다. 길리언 플린의 『나를 찾아줘』 이후 폭발한 여성향 미스테리 장르가 지나치게 특정 인종/계급-즉, 백인 중산층과 연관돼 있다는 사실 말이다. 


오늘날 가정 느와르(domestic noir)로 지칭되는 소설은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벌어지는 범죄를 여성의 시선에서 다룬다. 남편의 과거 범죄 이력이나 현재 진행 중인 가정 폭력을 주로 다루기 때문에 이 장르의 부상은 2010년대 이뤄진 페미니즘 리부트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물론 이 장르 속 여성 인물이 늘 피해자로만 등장하는 건 아니다. 『나를 찾아줘』나 『부탁 하나만 들어줘』 처럼 여주인공이 빌런으로 등장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 그러나 이런 인물들은 범죄를 주도할지언정 책 속의 전체적 틀 안에서는 세상과 싸우는, 흡사 델마와 루이스 같은 존재들이다. 요컨대 이들은 사회가 부여한 ‘완벽한 여자’라는 이미지에 물린 나머지, 그것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한편 세상을 향해 복수를 꾀한다. 이들의 무시무시한 활약을 보고 있노라면 뭐랄까, 마치 ‘날 여자라는 틀로 규정하지마!’라고 외치는 것만 같다.


다시 말해 여성적 시선이 기입된 범죄소설은 여성에게 부여된 ‘행복한 가정의 천사’라는 이미지와 싸우고자 한다. 사실 가정은 그렇게 안락하지도 안전한 곳도 아니며 주부들은 청소를 하고 식사를 차리는 것 외에 잔혹한 일에도 개입할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것이다. 이런 메시지는 정당하며 이에 잘못된 것은 없다. 하지만 ‘가정의 천사’ 이미지와 싸우는 인물이 거의 모두 중산층 백인인 걸 보고 있노라면 이런 생각이 든다(일부 영상화된 작품들에는 흑인, 아시아인 배우가 캐스팅되기도 했으나 원작은 그렇지 않다). 베티 프리던이 말한 『여성의 신비』 가 아직까지 (백인) 여성들에게는 최전선의 문제란 말인가?


소설 『뱀파이어를 처단하는 방식』 은 뱀파이어라는 초현실적 존재가 등장하는 호러물이지만 가정 느와르와 궤를 같이한다. 주인공 퍼트리샤는 바쁜 의사 남편의 아내이자 두 아이의 엄마로, 그리고 병든 시어머니의 며느리로 지내며 자신을 잃어버린 인물이다. 우연과 필연이 겹쳐 동네에 새로 이사 온 제임스 해리스에게 도움을 주고 관심을 쏟던 그녀는, 그에게서 수상한 구석을 몇 개 발견해낸다. 마침 식스 마일이라는 동네 아이들이 기이한 행동을 보이다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제임스를 그 사건과 연결하고, 숲속에서 그가 한 소녀의 피를 빨아먹는 모습을 목격하기에 이른다. 퍼트리샤는 범죄 실화 소설을 주로 읽는 북클럽 친구들과 함께 제임스를 동네에서 몰아내고자 하지만 그녀의 남편들은 제임스가 흘린 돈에 눈이 멀어 제약을 가한다. 병적인 책들을 정신이 이상해졌다는 가스라이팅, 그리고 가정을 지키는 것과 제임스를 의심하는 것 중 하나만 택하라는 협박에 못 이겨 퍼트리샤와 친구들은 악(惡)에 대한 처단을 중단한다. 


분명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알지만 가정(남성)이라는 울타리에 갇혀 정상적 아내 역할을 해야 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명백히 근래의 범죄소설 경향과 맞물린다. 자신을 향한 북클럽 회원들의 적의를 잠재운 제임스는 3년에 걸쳐 퍼트리샤의 마을을 장악하고 북클럽 분위기도 완전히 바꿔버린다. 이제 북클럽은 어떻게 잔혹한 범죄가 발생하고 지속될 수 있었는가에 대한 성토가 아닌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19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후반까지다) 따위의 고루한 ‘견해’를 읊는 장이 된다. 작가 헨드릭스는 글의 전반적 구조와 몇몇 확실한 문장들을 통해 자신의 작품이 유해한 가부장제에 대항하는 여성들의 이야기임을 확실히 한다. 


“우리끼리 읽던 책들이 그리워. 살인 사건이 한 건이라도 나오던 책들 말이야.” 메리엘런이 말했다. “요즘 북클럽의 문제는 남자가 너무 많다는 거야. 그 인간들은 제 생명 유지에 도움이 될 책들은 안중에 없고 그저 혼자 떠벌리면서 행복을 느껴. 죄다 견해들뿐이야, 주구장창.”(512)  


남성이 인류 보편을 대변하는 동안 여성은 여자라는 역할을 맡아왔다. 덕분에 여성은 ‘여성적’인 것으로 분류되는 특징들로 규정되고 한계 지어졌다. 결국 ‘여자다움’과 싸우고 그것을 전복시키는 건 언제나 페미니즘의 투쟁 중 하나일 것이다. 고로 나는 가정 느와르 소설이 보여주는 잔인한 여자, 미친 여자, 불쌍한 여자, 징징대는 여자, 야심 찬 여자, 복수심에 흑화한 여자 등 모두가 좋다. 끊임없이 생각하는 여자들은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 불신과 남편의 기만적인 설득을 제쳐낸 퍼트리샤처럼 말이다.  

    

“퍼트리샤는 책을 저쪽으로 집어던지고 『헬터 스켈터』를 찾아 들었다. 재판 얘기가 나오는 후반부를 펼치고 찰스 맨슨이 사형을 선고받는 부분을 읽고 또 읽었다. 그게 잠자리 동화라도 되는 것처럼. 모든 남자가 매번 처벌을 모면하는 건 아니라는 확신이 필요했다.”(505)     


『뱀파이어를 처단하는 방식』은 가부장제가 부과한 여성적 틀을 벗어나는 여성들의 모험담/성장기라는 측면에서 꽤 만족스러운 작품이다. 여성들 사이의 연대를 지나치게 낭만화하지 않고 그려냈다는 점 역시 이 소설의 큰 장점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 온전한 지지를 보내기가 어려운 까닭은 앞서 말한 바와 같다. 나는 소설을 읽다 잠시 책장을 덮고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또 백인이 흑인을 구하는 얘기야?’


제임스는 퍼트리샤의 동네 올드 빌리지를 근거지로 삼지만 자신의 잔혹한 야성은 흑인들이 모여 사는 식스 마일에서 먼저 드러낸다. 식스 마일은 흉포한 살인 사건이 벌어지든 아홉 살 아이의 자살이라는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든 미디어의 관심을 조금도 받지 못하는 가난한 동네다. 백인/남성/중산층으로 표상되는 악의 화신 제임스가 비백인에 미혼모이며 블루칼라 직업군을 가진 이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 본성을 드러내는 건 현실에 대한 꽤 정확한 반영이다. 그리고 이런 인종적, 계급적 문제는 최근의 여성향 미스테리 장르 소설이 많이 다루지 않은 영역이기도 하다. 하지만 단지 현실에서 얘기되어야 할 문제를 묘사했다 해서 그 작품이 윤리적이라 평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보다 중요한 건 그 문제를 얼마나 섬세하고 윤리적으로 다뤘느냐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소설이 인종과 계급 문제를 다룸으로써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다, 는 후기 글을 보았는데 별로 공감하지 않는다. 글쓴이는 헨드릭스가 창조한 세계가 우리 실세계의 문제를 끌어와 보편성을 담지했다고 한 것일 테지만, 우리가 어떻게 ‘감히’ 보편성을 논할 수 있겠는가? 퍼트리샤와 그린 부인의 일생이 그토록 다른데? 비록 제임스라는 공동의 적을 눈앞에 두고 있다 할지라도 퍼트리샤는 흑인/미혼모/청소부이기에 쥐떼에게 온몸을 물어뜯기는 경험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


소설에는 그린 부인이라는 흑인 여성이 등장한다. 홀로 아이들을 기르며 퍼트리샤와 그레이스 집에서 청소일을 하는 그녀는 제임스의 존재를 눈치채고 그를 물리치는 데 일조한다. 사실 북클럽 회원들이 퍼트리샤의 말을 믿어주지 않을 때 유일하게 그녀의 말을 믿어주는 이가 바로 그린 부인이다. 적지 않은 이들이 이걸 흑인 여성과 백인 여성의 아름다운 연대로 보지만, 우리는 여기에 혹 백인 여성의 시혜적 시선이 섞여 있지는 않은지 의심해봐야 한다. 그린 부인의 성정은 수동성과 거리가 멀고 퍼트리샤는 시시때때로 백인/중산층으로서의 자신을 의식하며 부끄러워하지만, 우리는 이 둘에게서 시선을 돌려 질문해야 한다. 대관절 올드 빌리지의 북클럽 여성들이 나설 때까지 식스 마일 사람들은 무얼 하고 있었단 말인가? 북클럽 회원들이 3년의 시간 동안 제임스에게 농락당하고 있을 동안 식스 마일 사람들, 특히 그를 미심쩍어한 그린 부인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그린 부인에겐 동맹군이 자신의 고용주였던 퍼트리샤밖에 없단 말인가? 이러한 일련의 질문을 곱씹다 보면 이 소설이 제임스로부터 가장 큰 실제적 위협을 받았던 식스 마일 동네 전부를 침묵시켰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식스 마일은 왜 그토록 무력한가. 이에 대해 소설 내부에 마련된 답변이 있다. 그들은 모두 바쁘다. 먹고 살기 위해 종일 노동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린 부인은 아이들의 안위를 걱정하면서도 그들을 먹이고 입히기 위해 피로한 노동을 수행한다. 그래서 제임스를 의심하고 그의 행적을 추적하면서도 퍼트리샤가 자신을 찾아올 때까지 침묵을 유지한다. 그린 부인의 이런 사정을 생각하면 여성에게 진짜 유해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미키 켄들의 다음과 같은 단호함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여성이 진 빈곤의 무게를 경감하는 것은 핵심적인 페미니즘 이슈다. 우리는 굶주림에 대해서, 식품 불안정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이런 용어로 말하지는 않는다. 왜? 주류 페미니스트 집단에 속한 이들은 식품이 장기적으로 불안정한 상태가 어떤 것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중략)... 배고픔, 진짜 배고픔은 절망을 안기고, 절망에 빠지지 않았다면 내리지 않았을 불가해한 결정으로 사람을 이끈다. 생존 본능은 우리 모두에게 존재하지만, 허기가 물어뜯어 만들어낸 공허보다 강렬한 것은 없다. 행그리hangry라 부르든 다른 무엇으로 부르든 간에 배고픔은 짧은 시간 동안 경험해도 고통스럽다. 그리고 우리는 페미니즘이 이 문제를 다뤄야 한다고 말하는 일이 거의 없다. 배고픔은 여성에게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는 다른 문제에 비해 훨씬 덜 언급된다. (『모든 여성은 같은 투쟁을 하지 않는다』 p.67-68)     


우리는 언제부터 가부장제에 대한 저항이 여성의 이미지 수선에 오롯이 달려 있다고 생각하게 된 걸까. 여전히 실제적 문제들이 존재하는데. 퍼트리샤는 다시 합체되기 위해 꿈틀대는 제임스의 조각난 육체들의 분투를 들으며 미래의 위험을 점쳐보지만 나는 ‘현재’ 그린 부인의 노쇠한 몸과 고된 노동이 더 무섭게 느껴진다. 그러나 헨드릭스는 그녀의 미래를 명확히 말해주지 않는다. 제임스 때문에 떨어져 살던 아이들과 다시 함께하게 되었다고만 할 뿐, 그녀가 처한 환경을 묘사하지 않는다. 북클럽 회원이 아니었던 그녀는 다시 외부자로 돌아간다. 사실 그녀는 한번도 내부자였던 적이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와 식스마일은 퍼트리샤를 자극하는 하나의 요소로 작용했다. 나는 그녀의 가난과 흑인성이 백인 여성들의 성장담에 가볍게 이용되었다는 의심을 거두기 힘들다. 흑인 작가들이 계속해서 현실을 지우고 새로운 역사를 쓰는 SF로 눈길을 돌리는 현상에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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