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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희구 Jun 29. 2022

우리, 서로 ‘내 거’ 하지 말기로 해요

책 '두 명의 애인과 삽니다'

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몇 해 전, 그러니까 채널A에서 방영된 「하트시그널2」가 대한민국 연애 프로그램 시장에 다시 불을 붙였을 때, 나는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더랬다. 하지만 열기는 내 주변으로 옮겨왔고 나는 막 입사한 회사의 동료와 식사하며 그 프로에 대해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혹시 그 프로그램을 아는지 물어본 그는 그것이 얼마나 설레고 재밌는지 설명했는데, 나는 곧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그 프로그램에서는 남자, 여자만 커플이 되는 거죠? 저는 지나치게 연애 권장하는 것도 싫고, 이성애 중심인 방송도 싫어요. 만약에 성소수자들도 출연해서 커플 매칭이 되는 프로그램이 되면 그때 볼게요.” 하, 모든 대화가 옳고 그름의 영역으로 갈 필요는 없건만.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어렸고, 어쩌면 더 열정적이었다. 해맑은 동료에게 무안을 준 게 미안해서였는지(?) 나는 나의 호언을 뒤로 하고 어느 날 연애 프로를 챙겨보기 시작했다. <하트시그널>, <썸바디>, <환승연애>, <솔로지옥>등등.... 왜 보았냐고? 남의 사랑 얘기는 재밌으니까.


비혼과 비연애 담론이 부상한 오늘날, 데이팅 프로그램이 인기를 끄는 까닭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을 작정이다. 시청자의 관람 이유는 다양하고 복합적이며 그 모든 사유를 아우를 수 있는 능력이 내게는 없다. 다만 나는 오늘날 한국이건 미국이건 일본이건 브라질이건 주야장천 만들어내는 연애 프로그램의 구조에 대해 잠시 말해보고 싶다.


오늘날 데이팅 프로그램은 1:1 소개팅 구도를 취하지 않는다. 한 공간 안에 여러 명의 남녀를 집어넣어 가능한 많은 사랑의 짝대기를 그을 수 있도록 한다. 단, 정해진 기간에 반드시 한 사람을 선택해 마음을 전하고 커플이 되어야 한다는 조건을 내밀어 참여자들이 짧은 시간 내에 맛볼 수 있는 극도의 스트레스를 선사한다. 보는 사람도 같이 긴장하여 장 트러블을 겪을 법하지만, 재미 역시 여기서 발생한다. 특별한 조건 없이 서로를 알아 가라고 주어진 공간은 출연진에게 결코 안락한 공간이 될 수 없다. 이곳은 소리 없는 총성이 울려 퍼지는 사랑의 난장판.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심쿵해서 심장이 떨어지는 순간도 있지만 불시에 그/녀가 나 아닌 사람과 플러팅하고 있는 광경을 보고 있어야 하기도 한다.


분명 ‘자유롭게 썸 탈 것’을 원칙으로 하는 공간에 서로 합의하고 입주한 것이지만, 출연진이나 시청자나 원하는 사람들이 맺어지지 못할까 봐 애가 탄다. 때문에 응원하는 커플 사이에 끼어든 사람은 누구나 ‘방해꾼’으로 낙인찍힌다. 이는 꽤 부당한 처사지만 거의 모든 프로그램이 가장 인기 있는 주인공 커플을 메인 영웅으로, 그 외의 인물들을 방해꾼으로 몰아붙인다. 물론 드라마의 서브 캐릭터들이 애정을 받듯, 모든 출연진이 고루 사랑을 받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시청자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는 커플이 있고, 이 커플의 성사 여부가 프로그램 시청의 주요 원인이 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삼각/사각 관계의 엇갈림 자체에 매혹된다기보다는 과연 이 멋진 남성과 아름다운 여성이 주위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진심을 알아볼 것인가, 에 더 흥분한다. 우리가 갖고 있는 낭만적 사랑의 관념을 이보다 쉽게 구현할 수 있는 장치가 또 있을까?


개인적으로 나는 연애 프로그램을 초기에는 재밌게 보다가 후반부로 갈수록 흥미를 유지하지 못한다. 갈등이 고조될수록 ‘에잇, 안 보고 만다. 퉤 퉤 퉤!’의 심정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지칠 대로 지친 출연진들의 얼굴이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게 뭐지?’라는 의문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사랑을 찾고 싶다던 출연진들은 프로그램 초기에는 여유와 미소가 넘치지만 후반에는 대체로 짙은 패색을 띠고 있다. 나는 특히 종반에 이르도록 마땅한 상대를 찾지 못한 출연진들을 보고 있기가 힘들다. 사랑을 찾지 못한 것이 분명하며, 저 공간을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은 것이 명명백백해 보이는, 그러나 프로그램의 룰대로 마지막 선택을 기어코 해내야만 하는, 그러니까 짝사랑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할 저이들의 난감함이란. 그 피로한 얼굴을 스크린으로 마주하고 있노라면 문득 연출진에게 이렇게 따지고 싶은 것이다. ‘그냥 선택 안 하면 안 되나요?’


물론 방송의 재밌는 그림을 위해서, 극적인 서사를 위해서, 저들의 존재는 필수적이다. 갈등 없는 사랑은 재미가 없다. 무엇보다 우리는 내가 마음을 준 상대에게 직진하며 주위의 손길을 뿌리치는 단호함에 열광한다. 우리는 빠른 속도로 사랑에 빠지고 관계를 진전시켜서 알콩달콩한 모습을 최대한 오래 연출해내는 커플들에 환호한다. 우리는 사랑의 비결정성/열림의 상태를 견디지 못하고 꽉 닫힌 해피엔딩을 원한다. 현실과 문화가 빚어낸 허상에 차이가 있을지라도 우리 사회(그리고 다수의 사회)가 말하는 바는 그렇다. 우리는 사랑의 완결성, 혹은 폐쇄성이 가장 이상적인 사랑의 요소라 믿는다.


바꿔 말해 모노가미를 제일의 사랑의 형태라 믿는 세상에서 홍승은 작가의 책 『두 명의 애인과 삽니다』는 가히 파격을 넘어 파괴적이다. 나의 기존 상식을 와장창 깨뜨려주었기 때문이다. 두 명의 애인과 한 지붕 아래서 살아가고 있는 저자는 폴리아모리 관계를 실천 중이다. 폴리아모리. 직접적으로 풀어쓰면 다자 연애 관계. 개념 자체는 새롭지 않으나 정상의 범주로 간주되지는 않으니 참으로 용감한 글이다. 알고 있다. 대개는 이 글의 소재를 듣고 용기보다는 문란함을 떠올릴 것이라는 걸. 그러나 폴리아모리는 문어발식 환승 연애나 바람, 불륜 등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며 그걸 정당화하지도 않는다. 단지 고유한 개별체인 상대방을 내가 온전히 소유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그 마음가짐을 견지하려는 실천적 관계일 뿐이다. 나는 폴리아모리가 아니고 그 관계에 대해서는 이 책을 통해 이해한 것이 전부다. 작가 역시 “관계는 개별적이고 구체적이어서 내 경험은 딱 그만큼의 한계가” 있노라 조심스레 고백한다(16). 그러나 “‘폴리아모리’의 태동”이 “페미니즘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172)는 사실은 폴리아모리가 우리의 일상 속 왜곡된 관계의 구조에 대해 의미 있는 질문들을 던지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나마 지난 연애와 지금이 다른 점이라면 통제를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의심하게 된 태도 정도라고 했다. 넌 내 거니까 당연하잖아? 가 아닌, 넌 내 옆에 있지만 언제든 어떤 모양으로 바뀔 수 있다는 걸 인정하는 것. 내 감정을 의심하고, 서로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힘든 걸 나눠 안으려는 부지런함이 추가된 정도라고 했다.” (128-129)


나는 사랑에 회의적이지만 모노가미의 정상성을 의심해본 적은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당연히 일대일의 관계를 맺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미디어에서 말하는 낭만적 연애 관계, 즉 서로에 대해 배타적 독점권을 소유하고 있다고 표현할 수 있을 법한 관계를 맺을 자신은 없었다. 몇 시에 집에 들어가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보고’하고 쉬는 날에는 꼭 서로를 보아야 할 의무가 있는. 이 얼마나 숨이 막히는가? 그러나 이 숨 막힘을 두고 대중문화의 거의 모든 영역은 사랑을 말했고, 그런 숨 막힘을 질색하는 이들에겐 성숙한 관계에 헌신할 준비가 안 됐다는 진단이 내려졌다. (이러한 판도는 조금씩 바뀌어 가고 있는 추세지만, 로맨스 장르를 정말 자세히 파본다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지금 나의 말이 낭만적 관계 속 상대에 대한 헌신을 무가치한 것으로 만드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결단코 그건 나의 의도가 아니다. 나는 기존의 모든 이성애-모노가미 관계가 문제이며 구식이라고 짚는 것이 아니다. 더불어 모노가미 관계에서 발생하는 불륜을 폴리아모리로 정당화시킬 수 있다고도 생각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상대가 합의하지 않았다면 폴리아모리는 결코 실천되어서는 안 된다. 다만 사랑에는 여러 형태가 있으며 연애의 방식도 개인마다 다를 수 있다. 단 하나의 사랑 형태(이성애/일대일 독점관계)가 지배적인 것으로 여겨질 때, 그것은 모두가 지켜야 할 정상이 되며 그 외의 사랑은 비정상이 된다. 마찬가지로 사랑을 ‘소유’로 개념화하여 학습할 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폭력이 자행된다. 저자가 폴리아모리에 시선을 두게 된 이유도 이와 비슷하다.      


“바깥의 소란이 고요한 일상에 부딪힐 때마다 차곡차곡 질문을 쌓았다. 정말 사랑에 정답이 있을까. 왜 이성애 일대일 연애만이 ‘정상’이라고 믿게 되었을까. 왜 사랑의 종착역은 결혼이어야 하며, 왜 그 사랑은 종종 폭력과 억압과 통제와 같은 얼굴이 될까. 그렇다면 사랑은 뭘까. 왜 사랑은 꼭 연애라는 이름표를 달아야 하며, 왜 우리는 영혼의 반쪽을 찾아야 온전해진다고 믿게 된 걸까. 왜 나를 돌봐 주던 무수한 관계 중에 연인과 가족만이 가장 가치 있는 관계로 인정받을까.” (12)     


“사랑이라는 추상어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서 너무 쉽게 오염되는 말이다. 차라리 미워해서 그랬다면 모를까. 사랑하기 때문에 상처 주고 통제하고 폭력을 행사하고 존재를 부정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21-22)     


세 명의 남녀를 위해 마련된 공간이 세상엔 그리 많지 않은 까닭에, 저자와 애인들은 부당한 일들을 겪는다. 때문에 작가는 “사랑은 개인적인 감정일지 몰라도, 그 사랑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타자와 사회의 품이 필요하다는 걸 실감한다”고 말한다(78). 이 문장은 단지 그녀가 맺고 있는 관계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의 주류에서 밀려나 거의 묘사되지 않거나 재현되지 않는 모든 소수자에게 공명하는 말이다. 정상의 기준에 도전하며 사랑을 제대로 하기 위해 노력하는 작가는, 본인의 경험을 자기 내부로 침전시키지 않고 외부로 돌려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옳음 혹은 정상의 기준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과 연결되고자 한다. 가령 세 사람의 숙박이 금지돼 활동보조인과 함께 다녀야 하는 장애인의 운신 범위가 더 비좁아지는 문제에 대한 언급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왜 너희는 너를 벗어나 생각하지 못하는 거야?’  


‘이 책은 결국 아모리에 관한 것이다!’라는 서평의 한 구절에 극히 공감한다. 책장을 넘기는 동안 내가 갖고 있던 사랑의 형태가 실시간으로 변하는 것이 머리와 마음으로 느껴졌다. 단지 누가 사랑을 할 자격이 있느냐뿐 아니라 사랑의 태도에 대해서도. 특히 작가의 다음과 같은 구절은 나를 놀라게 했다. “우리가 헤어져도 사랑이 실패한 것이 아님을 안다. 단지 사랑이 끝났을 뿐이다.” 서로에게 귀속될 필요가 없는 사랑. 끝이 났어도 실패이지 않은 사랑. 세상에는 이런 사랑도 있는 것이다.


요즘 연애 프로는 사랑을 부추기만 하지 않고 시험에 들게 하고 해체시키려 하기도 한다. 그러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시험에 흔들리지 않는 일대일의 남녀관계를 고수하고자 하는 바람과 그 소망이 어긋났을 때의 분노 표출하기. 대중과 방송의 협업은 계속되고 있는 중이다. 우리의 연애 정상성은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고수될까? 우리는 무엇을 낭만으로 여기게 될까? 글을 끝맺고자 하니 자꾸만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셰이프 오브 워터>가 떠오른다. 나는 질문해본 적이 없다. 사회가 말해주는 것 말고, 내가 원하는 형상의 사랑이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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