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보스턴 결혼'
대학교 재학 시절 중문학과 소설 수업 시간이었다. 작품 속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해 토론을 나누던 중, 정확히 어떤 흐름에서 그 말이 나왔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한 여학우가 말했다. 자신은 동성에게 매력을 느낀 적이 있다고. 그 말이 뱉어진 즉시 나를 포함한 모두가 고개를 홱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시는 여성주의가 대중에 널리 알려지기 전이었으며 걸크러시라는 말도 아직 쓰이지 않던 때였다. 내가 알기로 그 강의실에 있던 누구도(그 말의 발언자를 제외하고) 페미니즘을 접한 적이 없었다. 여성이 연인이나 친구의 범위를 벗어나 자신과 같은 여성에게 매력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성숙한 인격체가 그 자리에 없었던 것이다. 아마 다른 이들 모두 나처럼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 네가 레즈비언이라는 거야?’
웅성거리는 소리는 없었지만 학생들의 고개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던 게 틀림없다. 교수는 다급하게 손짓으로 우리를 진정시키는 동작을 해 보이며(진짜다. 그는 ‘워~ 워~’ 하듯이 활짝 펼친 손바닥을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내리는 동작을 두어 번 해 보이며) 말했다. “자, 자. 당연히 그럴 수 있어요. 동성에게 매력을 느끼는 일이 있을 수 …….” 그는 우리의 반응이 우려스러웠는지 친구가 한 말을 우리에게 이해시키려 했다. 그 아이는 커밍아웃을 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지금 우리가 걸크러시라고 명명하는 감정을 말한 것이었을까? 사실 친구의 태도가 워낙 태연했기에 그때 친구가 커밍아웃을 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아닐 수도.. 내가 무지했을 수도.... 내가 똥 멍청이 헤테로일 수도....) 하지만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어 보면 그녀가 단순히 멋있는 언니를 좋아하는 소녀의 마음을 얘기한 것도 아닌 듯하다. 진실은 알 수 없다. 다만 이 일화에서 발견되는 분명한 사실은, 그 친구가 말한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상관없이 모두가 놀랐다는 것이며, 내가 그녀의 발언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분명 교수가 유도하는 대화 안에서 그녀가 자신의 말을 부연했던 것 같은데, 그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 이걸 세월의 흐름이라 탓하기 어려운 이유는, 당시 내가 ‘음,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취향 존중’이라며 고개를 앞으로 돌렸던 기억이 나기 때문이다. 쓰고 나니 부끄럽다. 그 말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것도,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은 것도.
그로부터 몇 년이 흐른 뒤 나는 페미니즘을 공부하게 됐고, 내게도 여성 혐오가 내면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나는 여성들을 가장 친한 친구로 두면서도 세상의 여성들에게 엄격한 미적, 도덕적 잣대를 들이댔다. 가부장적 이성애주의를 내재화한 결과, 나는 남성과 여성 각각에게 느껴야 할 감정이 따로 분류되어 있다고 믿었다. 동성과는 정서적 교류를 하며 우정을 쌓는 것이지 ‘매력을 느낀다’처럼 로맨스 가능성을 미묘하게 품은 말을 주고받지는 못한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이성애자라면 말이다. 더 부끄러운 고백을 하자면, 나는 중학생 시절 가수 보아를 좋아하는 같은 반 친구를 보고 적잖이 신기해했다. ‘아, 여자가 여자의 팬을 할 수도 있는 거구나.’ 그때 깨달았다. 안다. 과거의 나는 무지렁이라는 걸. 그리고 지금은 나도 안다. 여성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성적 지향이 반드시 이성애와 동성애 둘로 나뉘지 않을 수 있고 스펙트럼처럼 다양하다는 것을. 동성을 바라보며 매력을 느낄 수도 있다는 것을.
이처럼 과거 일화와 나의 여성 혐오 벗겨내기 역사가 떠오른 까닭은 책 『보스턴 결혼』 때문이다. ‘보스턴 결혼’이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 미국 비혼 여성들이 동거하며 맺었던 헌신적 관계를 지칭하는 용어로, 함께 사는 여성들의 우정을 다룬 헨리 제임스의 소설 『보스턴 사람들』에서 유래했다. 보스턴 결혼을 한 여성들이 실제로 그 관계에서 어떤 것을 얻어갔는지, 즉 성애적 감정이 섞여 있었는지 아니면 철저히 우정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는지 지금의 우리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보스턴 결혼』의 저자들은 서로에게 헌신을 약속한, 우정 이상의 감정을 토대로 하는, 성애는 감소했거나 거의 없는 레즈비언 관계를 지칭하기 위해 ‘보스턴 결혼’이라는 용어를 쓴다. 다양한 필자가 참여한 이 책은 구성도 다채로운데, 보스턴 결혼의 정의에 대한 이론적 글과 무성애적 레즈비언 관계를 맺고 있는 당사자들의 경험담, 그리고 이 책 내용 전반에 대한 논평이 실려 있다.
이 책의 특이점은 실린 글들의 내용이 일관되게 정돈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나는 책 표지에 적힌 부제 ‘섹스 없이 사랑을 이야기하는 방법’을 보고 이 책이 무성애에 대해 완전한 긍정을 말할 줄 알았다. 더불어 우정과 사랑 같은 용어로는 명확히 설명할 수 없는 여성들 간의 애정과 유대를 보여줄 줄 알았다. 하지만 이 책에는 무성애적 관계에 비자발적으로 포함된 여성들 이야기가 등장하며, 따라서 자신이 맺고 있는 관계에 무조건적 긍정보다는 불안과 의심을 표하는 목소리들이 들린다. 물론 누군가는 보스턴 결혼을 긍정적으로 보고 일부 당사자 역시 자신의 관계에 편안함과 만족을 느낀다.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하필 여성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비) 자발적 무성애에 질문을 던지고 어떤 커플들은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라며 당황해한다.
보스턴 결혼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에 대해 확정적 대답을 내리지는 않지만 『보스턴 결혼』에 실린 글들로부터 추출될 수 있는 하나의 문제의식은 있다. 보스턴 결혼은 가부장적 이성애 주의와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고, 그것이 여성들의 (비) 자발적 무성애 관계의 인과에 영향을 미쳐 당사자들이 본인의 삶을 의문에 부치도록 압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몇몇 필자는 오늘날 우리가 말하고 이해하는 섹스가 성기 접촉을 기반으로 하는데, 이는 다분히 남근중심적이라고 지적한다. 연인 사이라면 응당 성애적 관계를 토대로 해야 한다는 관념도 마찬가지다. 성기 중심의 오르가슴은 ‘성애’에서 그 중요성이 과장된 측면이 없지 않다. 릴리언 페이더먼은 레즈비언들의 성애가 이성애 관계를 기준으로 비교당하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레즈비언들이 그렇게나 많이들 원한다는) 오래가는 레즈비언 관계 대부분에서 섹스를 거의 하지 않는 경우가 그토록 흔할 뿐만 아니라 성애 자체가 없을지도 모른다면, 레즈비언 관계의 필수 조건이 성기 접촉으로 구성되는 섹슈얼리티라고 말하는 것은 부정확하지 않을까”(69).
사실 『보스턴 결혼』을 읽고 나서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섹스를 하지 않는 여자들이나 커플들한테는 심지어 유리한 점이 있을 수 있겠다고 말이다. 달리 말해 비성애적인 것이 꼭 병적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또한 이것은 불쾌하고 탐탁지 못한 활동의 단순한 회피라기보다는 더 긍정적인 무언가의 표현일 수도 있다. (엘런 콜, 17장, p.326)
페이더먼의 지적에 의하면 우리는 섹슈얼리티를 다양한 구성체로 상상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것을 수용하기 전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 역시 던져야 한다. 왜 여성들은, (이 책에 따르면) 헤테로 커플이나 게이 커플보다 섹스리스에 빠질 가능성이 높은가? 이 질문에 대해 우리는 일반화의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는 결코 사회과학적으로든 생물학적으로든 확정된 대답을 내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 사례에 근거해 추정되는 이유 중 하나는 여성이 성적으로 수동적 존재가 되도록 학습화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관계에서 섹스를 의무적으로 요구하는 남성이 없다면, 성애적 관계가 지속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커플들이 있다고, 이 책의 몇몇 상담/이론가들은 증언한다. 이런 증언은 안티페미니스트들에 의해 왜곡된 논리의 근거로 오용될 가능성이 있으나 『보스턴 결혼』이 섹스리스 커플들의 실례를 통해 보여주는 건 분명 가부장제의 압력이다.
여성들의 섹스에 대한 거부는 여성들 사이에 널리 퍼진 ‘수동적 자세 취하기’에 길들여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떤 여성들은 어린 시절 겪은 성폭행으로 인해 성에 대한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고 이로 인해 연인과의 섹스를 주저한다. 또 다른 여성들은 여성을 사랑하고 그와 헌신적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섹스는 거부함으로써 관계의 경계를 부러 모호하게 만든다. 이들의 심리는, 그들의 전(ex) 연인이 정확히 간파한 대로, 이성애자로서의 특권을 잃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회에서 퀴어로 낙인찍히는 것이 두려워 이들은 여성과 우정 이상의 깊은 친밀감을 나누면서도 무성애 관계로 남음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위장한다. 19세기 여성들이 그랬을 것으로 추정되는, 진짜 보스턴 결혼을 하는 것이다.
보스턴 결혼을 한 커플들의 사례와 문제는 각 관계들의 고유한 특이점으로 취급되어야 할 것이지만, 이들의 섹스리스 라이프스타일과 그로 인한 고민이 사회가 단 하나의 정상적 관계를 승인하고 강제한다는 사실 때문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다. 설령 타고난 성적 지향이 로맨틱 에이섹슈얼이라 할지라도 이 성향이 ‘고민’으로 치환되는 건 그것이 성애를 바탕으로 한, 그러니까 출산을 할 수 있는 남녀의 성애적 결합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스턴 결혼』은 성애적 관계에 대한 개념을 넓힐 것을 제안한다. 성애는 반드시 성기 접촉을 기반으로 할 필요가 없으며 로맨틱한 연인 관계 역시 꼭 성애를 토대로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연인과의 섹스리스 상태를 문제라 생각하는 커플들도 있지만, 이런 인식은 무성애를 고쳐야 할 단점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정상을 강요하는 기존의 획일적 사고와 맞닿아 있다. (물론 이 모든 문제의 근본적 원인은 가부장제/강제적 이성애주의라고 결론지을 수 있겠으나, 이 책은 ‘가부장제 철폐!’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실제 커플과 당사자들의 이야기가 실린 만큼, 이들의 현재 인식을 다듬고 긍정하는 것에 더 치중하려 하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자기 자신의 진심을 해치면서까지 복종하고 희생하는 경향이 너무 크다. 여기서 핵심은 섹스하고 싶어 하는 쪽이 ‘옳다’고 가정하지 않는 것이다. 동시에 이것을 배려받아야 할 주장이자 포기할 수밖에 없는 권리 같은 것으로 보는 시각에는 신중하게 맞서야 한다. 성 상담치료의 목표가 당사자인 두 사람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라면(나는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이것은 두 사람 각자의 바람이 똑같이 존중돼야 한다는 뜻이다. 성적인 쪽이 그 관계에 의무를 다하면서 자기 욕구를 줄이거나 타협할 수 있고, 성적이지 않은 쪽도 자기 욕구와 타협 가능한 좋은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전통적인 성 상담치료는 언제나 최선이 아니라 가능한 차선을 고려한다. (엘런 콜, 17장, p.327)
관계의 층위는 다양할 수 있고 헌신적 연인 관계라는 건 단 하나의 형상으로 재현될 수 없다. 남성과 여성, 성애와 결혼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짝지어지지 않는다면 얼마나 많은 가능성이 열리게 될까. 상상력이 부족한지라 그런 미래가 명확히 그려지지는 않지만 하나는 분명히 상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과거 모두의 주목을 받았던 친구의 말이 그렇게 생소하게 느껴지지 않았으리란 것과, 교수님이 대신 해명하는 장면도 없었을 것이며, 내가 그 친구의 말에 귀 기울였으리란 것. 그래서 그의 말을 어쩌면 지금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알고 있다. 그런 상상이 현실이 되려면 내가 먼저 바뀌어야 한다는 걸. 고개를 돌린 건 아무리 생각해도 부끄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