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친밀한 이방인'
정한아 작가의 소설 『친밀한 이방인』을 읽는 동안 온몸이 아래로 꺼질 듯 무거웠다. 우울했다. 어쩌다 거짓말을 시작해서 되돌릴 수 없는 사기 행각을 벌이게 된 한 여자의 삶이 안타깝고 기가 막혔다. 종국엔 답답해졌다. 그녀 앞에 내달릴 수 있는 길이 아예 없는 것만 같아서 슬펐다.
장애를 지닌 엄마와 글도 모르는 아빠의 늦둥이로 태어난 이유미의 인생은 거짓말로 점철돼 있다. 유년 시절은 나름대로 좋았다. 양장점을 크게 운영한 아빠는 늙은 나이에 얻은 딸이 어여뻐 아이가 원하는 모든 걸 손에 쥐여주었다. 하지만 유미가 성장하고 그가 늙어가는 세월 속에, 그들의 집이 놓여 있던 거리는 변화하고 사업은 회생이 불가하게 기울어버린다. 고등학생 유미는 흠모하던 남자 선생님과 스캔들에 휘말리고(정확한 표현은 강압적 성관계다) 추문에 쫓겨 혼자 서울에 올라간다. 곧 대학생이 되리란 예상과 다르게 유미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한다. 아픈 엄마와 힘들게 일하는 아빠에게 차마 떨어졌다는 말을 할 수 없었던 그녀는 합격했다 거짓말을 하고 부모가 보내준 입학금으로 재수 생활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녀의 거짓말은 작은 하숙방에 가만히 놓여 있지 못하고 밖으로 새 나가 더 큰 거짓말을 불러온다. 어쩌다 누군가의 후배가 된 유미는 교내 편집장이 되고 누군가의 여자친구가 된다. 거짓말로 쌓아 올린 삶이 툭 하고 무너진 뒤에도 유미는 자신만의 인생을 지어 올리지 못한다. 아버지의 죽음과 엄마에 대한 책임은, 그녀에게 천천히 삶의 기반을 다질 수 있는 시간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녀는 끊임없이 죽고 태어난다. 피아니스트로, 의사로, 그리고 미스터리한 남자 M으로.
유미의 거짓말을 옹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마도. 거짓말이 그녀의 유일한 생존전략이었을 리는 없다. 하지만 이 소설은 단순히 반(反) 영웅적 인물의 미스테리 서사로 읽히지 않는다. 누군가 말했다. 이 작품은 ‘김지영’과 ‘화차’를 떠올리게 한다고. 공감한다. 이 소설은 기구한 인생을 살게 된 주인공의 범죄를 보여주는 걸 넘어 여성의 삶 조건을 끊임없이 가시화한다. 이야기 속에는 삶이 정해준 틀 때문에, 그 틀이 너무나 좁고 갑갑해서, 동시에 그 틀을 의지로 비틀기에는 역부족이어서 분노하고 좌절한 여성들이 등장한다.
액자식 구성인 이 소설의 화자는 유미가 아니라 소설가인 ‘나’다. 유미와 마찬가지로 여성인 그녀는 어느 날 신문에 자신의 습작이 실린 걸 보게 된다. 그것이 자신을 찾는 광고(이 소설의 작가님을 찾습니다) 임을 알게 된 ‘나’는 신문사를 통해 한 여인과 만나게 된다. ‘나’의 글을 자신이 쓴 소설이라고 거짓말했던 한 남자의 아내를. 여인과 오랜 대화 후 알게 된 사실은 그 남자, 즉 여인의 남편이자 미스테리한 남자 M이 여성이었다는 사실을 숨기고 결혼을 했다는 것. 더불어 사기 결혼이었음에도 그녀에게 조금의 재물도 가져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생애를 적은 글을 남겨두고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 놀라운 이야기를 들은 ‘나’는 M, 한때는 안나였다가 또 유미이기도 했던 사람의 인생에 매혹된다. 오랫동안 쓰지 못했던 글을 마침내 쓸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한다. 이처럼 『친밀한 이방인』은 ‘나’가 M의 일기와 주변인들의 인터뷰를 토대로 구성한 이유미의 일대기와 화자 본인의 삶이 교차하며 진행된다.
‘나’가 유미의 서사에 이끌리는 건 단지 이야깃거리가 된다는 이유 때문은 아니다. 여학생으로서 몸단속을 올바르게 하지 못했다는 최초의 비난(학교는 학생을 피해자로 보호해주지 않았다), 그로부터 촉발된 기구한 인생의 롤러코스터, 그러나 끊임없이 스스로를 죽여 다시 위로 올라간 유미의 인생에서 ‘나’는 갑갑한 삶에서 튕겨 오르고 싶은 자신을 발견했을 것이다. 화자는 어린 시절, 몸무게라는 사슬에서 쉬이 벗어나지 못했고 사랑하는 남자와의 관계에서도 약자의 처지를 피하지 못했다. 몸과 마음이 건강해져 더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했지만, 원치 않았던 임신은 그녀의 날아오르고 싶은 욕망을 꺾고 그녀를 가라앉혔다. 결국 가정에 꿈을 빼앗겼다고, 그렇게밖에 생각되지 않는 그녀는 일상에 분노하고 그걸 망가뜨리고 싶어 한다. 화자의 어머니는 가정이라는 공간에 갇혀 평생 우울함과 그 감정이 폭발하는 간헐적인 순간들을 반복하며 살아온 것으로 묘사된다. 그녀는 툭하면 집을 나갔고 설득하는 남편의 손에, 어쩌면 어른거리는 아이 얼굴 때문에 집으로 돌아왔다. 마침내 이혼 서류를 내미는 화자의 어머니는 말한다. “한 번도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보지 못했는데, 늘 꼼짝도 못하게 나를 짓누르며 살았는데, 이대로 끝이 난다면 내 인생은 대체 뭔가 하고 말이야”(133). 주어진 틀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건 M의 아내 진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딸로서 ‘엄마’라는 거대한 초자아의 그늘에 짓눌려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고, 청소년기 거리 생활에서 아이를 갖게 되었으며, 결혼을 해야 유산을 물려받을 수 있다는 조건을 받아들여야 했다.
온종일 작은 아파트에 갇혀 아이를 돌보면서, 제일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내 존재가 낭비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내 젊음, 내 자질, 내 영혼, 위대한 것을 이루고 성취할 수 있는 시간이 아이라는 구멍으로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p. 105
흥미롭게도(?) 이 소설은 후반부에 반전을 선사한다. 실은 M이 아내를 속인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합의를 하고 주변인들을 속였다는 것이다. 진이 유산을 물려받아 자신의 애인(여성이다)과 살 수 있도록 M이 도왔다는 것. 소설을 읽을 때 나는 이런 흐름이 이해되지 않았다. 불필요한 반전이라 생각했다. 결국 이 글이 보여주는 건 『82년생 김지영』과 『화차』 같은, 어느 ‘평범한’ 생애에 문득 들이닥친 ‘비극’이라 생각했으므로. 고백하자면, 이 작품을 읽을 때 나의 심리는 ‘나’의 그것과 유사했다. 인생이 풀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좌절했으며 슬펐다. 아마 그래서 나는 더욱 재구성된 유미의 인생과 증언을 읽으며 온몸이 땅으로 꺼지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나는 자기 연민에 침잠하기 위해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유미의 마지막 거짓말이 합의와 의도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했다. 내 슬픔을 소설 속 인물들의 구슬픈 사연에 얹어서, 혹은 그들의 슬픔을 핑계 삼아 더 크게 가라앉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에 유미의 거짓말이 지닌 의도성은 존재감이 너무나 컸다. ‘넌 결국 사는 게 힘들어서 도망치다 사라진 거지’라고 그녀의 생애를 가뿐히 내치려 할 때, 그녀의 일기, 그러니까 진실과 거짓이 혼재된 기록이 굳이 부러 남겨졌다는 사실이 고개를 당당히 들었다. ‘정말 그런 것 같아?’. 결국 나는 의문을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유미와 진의 목적이 유산을 받는 것이었다면 두 사람은 M이 어느 날 돌연 사라졌다거나 알고 보니 사기꾼이었다는 정보만 흘리고 사기극을 끝맺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굳이 M이 여자였다는 사실과 그녀의 처연한 과거를 노출했다. 이건 무엇을 위한 것인가?
서사 내부로 말끔히 흡수되지 않는 이 과잉은, 그러나 어쩌면 이 소설의 핵심이다. 유미가 자신의 사라짐을 사전에 합의하고 기획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전까지 그녀가 남긴 글은 유서, 혹은 자신의 기구한 삶에 대한 위로로 보인다. 그러나 모든 진실이 밝혀지자 그녀의 존재는 전보다 훨씬 더 의뭉스러운 것, 쉬이 해석할 수 없는 텍스트가 되어버린다. 그녀의 글에 한 치의 거짓도 없을 거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물론 소설의 화자는 그녀의 글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만나 실제 사건들을 확인한다. 하지만 이 소설은 절대적으로 ‘나’의 목소리로만 진행된다. 유미/안나/M이 거쳐간 인물들의 인터뷰 녹취록이 실리긴 하지만, 우리 독자들이 읽는 건 절대적 화자가 두 눈으로 직접 본 내용에 대한 생중계가 아닌, 작가인 ‘나’가 글로 정리한 내용이다. 그런 ‘나’가 유미와 진의 합의를 알고 난 뒤 일기 내용의 진실성에 대해 의심을 표하는데, 처음부터 그녀의 설명을 따라간 우리는 그 의뭉을 함께 흡수할 수밖에 없다. 물론 ‘나’가 아니어도 소설의 반전은 독자들에게 유미에 대한 질문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왜 거짓을 밝히는가. 진실을 위한 거짓인가, 거짓을 위한 진실인가. 종국에, 그녀는 무엇을 원하는가. 이 질문들을 붙잡고 생각의 꼬리를 늘어 뜨리다 보면 다다르게 되는 결론이 있다. 내가 유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날은 결코 없을 거라는 것. 이 허망한 결론은 그러나 이렇게 읽힌다. 이유미는 세상에서 잊히는 걸 거부하되 해석되기도 거부한다. 자신을 영원한 실종의 상태에 빠뜨림으로써 오히려 자기 생애에 대한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분명히 한다….
신비하게도 생각이 이 지점에 이르자, 그전까지 안개에 휩싸인 것 같았던 유미가 갑자기 생생하게 느껴졌다. 불투명하지만 그녀는 그 불투명한 안갯속으로 보란 듯이 직접 걸어 들어간 것이었다. 우리가 흔히 주체성이라 부르는 것, 자기 생에 대한 의지의 힘이 강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아마도, 이것이 이 소설의 핵심은 아닐까. 정한아 작가가 거짓말쟁이들을 보며 매혹된다고 했던 고백(나는 늘 거짓말쟁이와 사기꾼들에게 마음이 끌렸다. 그들이 꾸는 헛된 꿈, 허무맹랑한 욕망이 내 것처럼 달콤하고 쓰렸다. 나는 그들을 안다고 생각했다. 내가 바로 그들이라고 생각했다. 언제나 그런 착각, 혹은 간극 속에서 이야기를 쓰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야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작가의 말 中-) 이, 실은 여기에 맞닿아 있는 건 아닐까.
그녀는 과거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자기 자신을 지워버리고 싶었고,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고 싶었다. 죄책감이나 후회 따위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그녀가 품고 온 삶에 대한 증오, 그것이 전부였다. p. 166
거짓말이 진실로 인생에 보탬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삶을 고쳐 쓴다는 것, 서사를 직접 직조하고 감추고 버리고 추가하고 그 위에 덧씌우며 스스로를 끝내 구해내고자 하는 여성의 의지가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뿐이다. 사실 유미의 글은 ‘나’가 아니었다면 세상에 드러나지도, 그것이 거짓을 위한 도구였다는 사실도 폭로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유미가 ‘나’의 소설을 발견하고 필사하며 매달리던 기간, 자신의 글이 그 이름 모를 작가에게 가닿을 거라 예상하지 않았을까 싶다. 유미의 글은 세상에 남겨놓은 자신의 흔적인 동시에, 쉬이 해석되는 존재가 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진은 “한때 저는 제 앞의 모든 길이 막혀 있다는 생각에 주저앉아버린 적이 있어요. 하지만 그가 나타나 다른 길을 열어준 이후, 막힌 벽 너머의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242)라고 말한다. 유미의 거짓말은 막힌 세계의 벽을 뚫고 새로운 서사의 벽을 세워 보호소를 만든 셈이다. 그녀가 세운 이야기 방어벽 뒤에 ‘나’와 함께 남겨진 나는 조금 황망하지만, 그대로 굴복할 수밖에. ‘나는 당신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사실 때문에, 당신이 살고 싶어 한다는 걸 알 것 같아요. 당신의 안녕을 바랍니다.’ 기실 ‘나’와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