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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희구 Aug 23. 2022

영웅 서사가 앗아간 목소리

책 '침묵은 여자가 되나니'

* e-book 독서시 인용문의 정확한 페이지를 알 수가 없어 기재하지 않았습니다.


작가: 팻 바커 / 출판사: 비에이블



조금 위험한 발언이긴 하지만, 우리는 분명 특정한 유형의 서사를 특정 젠더와 결부시킬 수 있는 듯하다. 어떤 서사는 남성적이고 어떤 건 여성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게 웬 이분법적 사고냐고? 문학 비평가 리타 펠스키는 수많은 남성 작가의 남성 주인공을 내세운 서사가 일련의 퀴즈를 풀고 아버지를 죽여 왕관을 차지하는 오이디푸스 이야기를 변형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지적, 남성적 서사란 업적을 쌓기 위해 여정에 나선 영웅의 발자취를 보여주는 것이라 주장한다(『페미니즘 이후의 문학』). 그녀의 주장에 동의하기 위해 세상에 널리고 널린 이야기들을 굳이 떠올리는 수고를 할 필요가 있을까. 펠스키의 글을 읽으며 직관적으로 깨달았다. 나는,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모험에 나서는 여성 영웅을 본 적이 없었다(여성영웅은 대개 타인을 구하기 위해 여정에 나선다).         


세대에 걸쳐 전해지는 영웅들에 관한 원형적 서사는 거칠게 요약하면 인정 투쟁에 가깝다. 세상에 흔적을 남기고자 혈안이 된 남성들은 자신의 명예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한 국가를 침략하고 살육을 하며 개인들을 유린한다. 이 살 떨리는 피의 연대기는 비장미를 장착한 채 어느 고독한 영웅의 ‘아름다운’ 비극적 서사시로 세상에 퍼지고 그대로 유통된다. 하지만 이런 단독자 영웅의 이야기가 감추고 있는 건, 칼을 휘두르는 남성들 뒤에 남겨진, 납치당하고 강간당하며 노예로 전락해버린 여성들의 목소리다. 영웅의 이야기가 찬란하거나 비극적일 수 있는 까닭은 그의 칼에 짓밟힌 수많은 이들의 목소리가 소거되었기 때문이다. 서사에서 ‘어떤 존재가 비인격화되는가’는 중요하다. 단지 이야기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그것을 읽고 받아들이는 우리의 존재적 차원에서. 나는 페미니스트 역사학자 거다 러너가 말했던, 세상에 존재하는 서사가 곧 현재 우리 삶의 범위를 결정한다는 말이 유효하다고 생각한다(『왜 여성사인가』). 결국 바로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여성 소설가들이 기존 서사를 뒤집는 텍스트를 쓰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팻 바커의 소설 『침묵은 여자가 되나니』(2018)는 정확히 그런 소설이다. 바커는 트로이아 전쟁을 배경으로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 사이에 벌어졌던 사건을 다시 조명한다. 아킬레우스가 전리품으로 얻었던, 아가멤논에게 빼앗기고 화가 나 전투에 불참을 선언하게 만들었던, 피와 살로 이루어진 존재인 브리세이스의 시선으로 전쟁 서사를 다시 쓴 것이다. 


영화 <트로이>(2004) 속 브리세이스와 아킬레우스


어린 시절 그리스 로마 신화 이야기를 읽으며(만화책이었다!) 브리세이스의 이름을 접했었다. 하지만 여성이 어느 날 노예가 되고 전리품이 된다는 것에 부당함을 느끼기에 나는 생각이 나이만큼이나 어렸고, 그래서 브리세이스의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감을 별다른 의문 없이 받아들였다. 어려서부터 접해온 갖은 판타지 로맨스 서사가 아킬레우스-브리세이스의 것과 비슷한 남녀관계를 구축하고 있었기에 더욱 그랬는지도 모른다. 분명 강압적이고 일방적인 관계인데 우리는 거기에 로맨스가 있다고 믿는다. 이런 기류는 영화 「트로이」(2004)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당대 최고의 섹스 심벌 브래드 피트를 아킬레우스로 캐스팅한 감독은 파트로클로스를 내치고 브리세이스를 본격적 연애 대상으로 승격시켰다. 그리고 ‘노예’라는 불평등한 권력 구조를 둘러싼 관객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아킬레우스가 브리세이스를 전리품이 아니라 어쩌다 본인 막사에 들어선 ‘손님(guest)’으로 지칭하도록 한다. 두 사람은 서로 합의하에 동침하고, 궁극적으로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가 아니라 브리세이스를 향한 사랑 때문에 죽는 것으로 그려진다. 이 영화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우습게도 나는 오랫동안 아킬레우스와 브리세이스의 관계를 매우 섹슈얼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이 영화적 각색이었음을 인지하더라도, 브리세이스라는 이름은 내게 고통을 간직한 여인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팻 바커의 다음과 같은 서술을 읽으며, 나는 나의 인지가 심하게 왜곡, 편향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이제까지 그 어떤 이도 하지 않았던 걸 하네. 내 아들을 살해한 자의 손에 입을 맞추겠네.
아킬레우스가 도시를 불태우고 가져온 약탈품이 사방 가득한 곳간에서, 그 말이 내 주위를 감돌았다.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나도 셀 수 없이 많은 여자들이 피할 수 없었던 걸 했지. 남편과 오라비를 죽인 자에게 다리를 벌렸으니.  
 
  



『침묵은 되나니』는 트로이아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인 시점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트로이 도시 국가 리르네소스의 왕비 브리세이스는 아킬레우스가 자신의 가족을 살육하는 광경을 모두 지켜본다. 지켜볼 수만 있을 뿐, 죽을 수도 도망칠 수도 없었던 그녀는 그리스군에 붙들려 ‘위대한 전사’ 아킬레우스에게 바쳐진다. 그렇게 노예가 된 그녀는 매일 밤 강간을 당한다. 왕비였던 사람의 처지가 이보다 더 나락에 떨어질 수 있을까 싶지만, 브리세이스는 그보다 최악을 상상하며 노예로서의 삶에 자신을 적응시켜나간다. 아킬레우스가 내 몸에 싫증이 나면? 그가 자기 부하들에게 자신을 내쳐서 모든 병사의 막사를 돌아다녀야 하는 상황이 닥친다면?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지점들이지만 『침묵은 되나니』에 팻 바커가 덧붙인 ‘새로운’ 진실이란 없다. 전쟁 속 목숨과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는 포로의 하루하루란 원래 이런 형상이었을 테니.      



네 형제들을 도륙한 자와 정말로 결혼하고 싶어?

뭐, 어쨌거나 내게는 선택지가 없을 텐데. 하지만 가능할지도. 어쩌면 가능할 것이다. 나는 노예였고, 노예는 아무것도 아닌 상태에서 벗어나 다시 사람이 될 수 있다면 무엇이건, 무엇이 되었건 하는 법이다.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도저히 모르겠어.

뭐, 물론 그렇겠지. 노예였던 적이 없는 사람들이 알 수 있을 리가.     



흥미롭게도 바커는 매들린 밀러가 『아킬레우스의 노래』(2011)에서 전면화시켰던 아킬레우스-파트로클로스의 끈끈한 관계를 피해 가지 않는다. 『아킬레우스의 노래』에서  아킬레우스가 브리세이스를 전리품으로 취하는 까닭은, 그의 연인인 파트로클로스가 그녀를 불쌍히 여겨 보호해주길 원했기 때문이다. 브리세이스는 파트로클로스의 누이 같은 존재가 되고 아킬레우스는 그녀를 손끝 하나 건들지 않는다.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에게 헌신하며 그의 병영은 여성 포로들에게 일종의 피난처가 된다. 반면 바커는 아킬레우스가 브리세이스를 데려가는 이유를 그가 그녀를 명확하게 ‘전리품’, 따라서 내가 합당하게 ‘취해야 하는 존재’로 보았기 때문임을 명시한다. 그러나 얘기한 바대로 바커는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 사이에 우정 이상의 감정이 있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브리세이스는 어느 밤, 서로 얼굴을 맞대고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하고 사랑이라 부를만한 감정의 흔적을 발견한다. 밀러가 두 인물의 사랑을 보다 성애적인 것으로 그린 반면, 바커는 두 인물의 감정을 보다 정신적 차원에서 그린다. 하지만 정신적 차원이라 해서 그들의 사랑이 더 숭고하거나 애틋하게 느껴지는 건 아니다. 자신의 명예를 위해 여성 포로는 죽어도 상관없다는 말(“그날 네가 리르네소스에서 죽었다면 좋았을 거야”)이나 파트로클로스에게는 헌신과 애정을 주고 브리세이스에게는 과시욕과 정복욕을 쏟아놓는 아킬레우스의 모습은 호모 소셜리티(homo sociality)의 그 자체인 듯해 우습기만 하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시간이 지난 뒤의 사람들은 우리를 어떻게 그려낼까? 내가 아는 유일한 사실은 그들이 정복과 노예제도라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사내들과 소년들이 자행한 학살에 대해, 여자들과 소녀들을 노예로 삼았던 일에 대해 들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강간이 만연한 병영에서 살았다는 걸 알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래, 그들은 좀 더 가벼운 무언가를 원할 것이다. 아마도 사랑 이야기? 나는 그들이 이 이야기에서 진짜 사랑을 잘 알아볼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이 소설을 읽은 뒤 누군가는 피로감을 호소했다. 모두가 아는 얘기를 뒤집은 이 서사는 예견된 음울함을 보여줄 뿐, 여성 인물에게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주지는 못했다고 말이다. 실은 나도 그랬다. 브리세이스의 시점을 보며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멍했지만 한편으로는 이 서사가 버거웠다. ‘또 위협당하는 얘기야?’ 싶었던 것이다. 읽는 동안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이야기』 가 계속 떠올랐지만 비단 소설이 아니더라도 여성이 성적으로 위협을 받고 고문을 당하는 이야기는 현실 속 대다수 여성에게 리얼리티다. 피부에 맞닿아 있는 이야기를 픽션에서도 마주한다는 건 아마 유쾌한 일이 아닐 것이다. 나만 해도 읽는 동안 우울했고 짜증이 났으며 스트레스가 적지 않았다. 록산 게이가 어째서 『헬프』나 「장고: 분노의 추적자」 같은, 인종차별/노예제도의 폭력을 고발하는 작품들에 회의적이었는지 비로소 알 것만 같았다(『나쁜 페미니스트』).


하지만 내가 감히 이런 이야기를 더는 읽고 싶지 않다고, 알고 싶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나는 새로운 이야기를 갈망하는 동시에 알고 있다. 이런 이야기가 여전히 유효하고 필요하다는 걸. 암암리에 전해지는 이야기. 누군가는 너무나 잘 알지만 누군가는 전혀 모르는 이야기. 이 이야기에 대해 지켜지고 있던 침묵이 마침내 깨어진 건 그리 오래전이 아니다. 깨어진 침묵이 다시 잦아들지 않도록, 침묵의 성별이 여성으로 형상화되지 않도록, 우리는 더 많이 말하고 더 열심히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아버지 지붕 밑에 사는 어린애였을 때 나는 잘 시간에 살그머니 안뜰로 내려가 홀에서 흘러나오는 음유시인들의 연주와 노래를 듣고는 했다. 아마 그 나이의 나는 가슴을 뒤흔드는 그 모든 용기와 모험담이 미래로 향하는 문을 열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몇 년이 지나 열 살, 열한 살이 되었을 때, 세계의 문은 닫히기 시작했고, 그 노래들은 내가 아닌 남자 형제들을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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