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남자들의 방’-
유흥업소에서 발생하는 여성 대상 성폭력에 대해 상당수가 다음과 같이 반응한다. ‘그게 가능한 거야? 거기서 성폭력이란 것이 발생할 수 있는 거야?’ 각각의 사건들은 고유한 맥락을 지니기에 실제 성폭력 발생 여부는 수사를 통해 밝혀져야겠지만, 유흥업소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대해 무작정 무죄와 무고를 들이미는 건 명백한 편견을 드러낸다. ‘술을 마시며 노는 여성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알고 있다. 그럼에도 거기 있다는 건 본인에게 발생할 일에 대해 동의를 한 셈이다.’ 하지만 술을 마시며 노는 여성 모두가 남성과의 성관계를 원하는 건 아니다. 이들은 단지 술만 마시며 놀고 싶어 할 수 있고, 성관계란 적극적 거부가 아니라 적극적 합의에 기반해야 한다. 적극적 거부 의사의 부재(이때, 이 거부 의사는 왜 부재하는가? 그녀는 위협을 당하고 있지는 않았는가? 정신을 잃지는 않았는가?)를 기어코 동의로 번역해내는 것은 남성의 욕망이 다른 무엇보다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상식’에 기반한다. 남성의 욕정은 참을 수 없는 것이고, 술에 취해 있을 때는 더욱 통제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 사회는 그 점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알고 있다). 그러니 섹스를 원하는 남성 앞에서 술에 취한 여성은 스스로 불구덩이 속에 뛰어든 셈이다. 이걸 누굴 탓할 텐가?
그러나 우리는 질문하고 싶다. 어째서 남성의 욕망이 사회의 기준점이 되어야 하는가? 어째서 남성의 폭력이 여성의 쾌락에 대한 탐구보다 자연스러운 것인가? 어째서, 남성의 억울함이 여성의 고통보다 안타까운 것으로 여겨져야 하는가? 혹자는 내가 주장하는 바가 순수한 피해자의 사례이고, 업소에서 일하는 종사자들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진짜 합의를 하고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실제 업소 종사자들의 증언을 보면(책 『남자들의 방』, 『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 『페이드 포』를 보라), 합의되지 않은 성적 스킨십은 분명 존재한다. 업소 종사자들의 이미지에 대한 사회적 낙인, 즉 ‘1차(접대행위)는 곧 2차(성매매)다’라는 전제는 존재하고 있을 수많은 폭력을 없는 것으로 만든다. 결국 성폭력 사건은 개별적 맥락을 지니면서도 더 큰 사회적 맥락 속에 위치할 수밖에 없다. 버닝썬과 N번방 사건을 거쳐온 이 사회에서,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남성의 욕망이 사회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1차는 곧 2차라는 전제가 버닝썬과 N번방 사건을 가능케 한 것은 아닌가,라고.
유흥업소에서 접대를 하면 왜 성폭력 피해를 예상하거나 감수해야 할까? 접대와 성매매는 구분되지 않고 유흥업소는 이 둘이 모두 가능한 공간으로 간주된다. 이 연결성이 있기 때문에 유흥업소 접대는 ‘1차’라 불릴 수 있다. 이처럼 수사기관을 포함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1차’와 ‘2차’를 연결해서 생각하기 때문에 유흥종사자에 대한 성폭력 가해는 성폭력이 아니라 ‘합의한 성관계’로 간주된다. 다만 법이 ‘1차’와 ‘2차’를 분리해, ‘2차(성매매)’가 없는 ‘1차(접대행위)’를 식품을 접객하는 행위 중 일부로 분류할 뿐이다. 이미 사회적으로 공식화된 ‘1차’와 ‘2차’의 연결성을 법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성매매를 전제하지 않는 ‘1차’는 과연 가능할까? 접대 과정에는 폭력과 착취가 없는 것일까? 디지털 세계의 남성 이용자들이 성폭력과 여성 혐오, 성차별의 범주를 최대한 좁히듯이, 유흥업소에서 남성 성기의 삽입과 사정만을 여성에 대한 성적 착취·폭력으로 간주하는 것은 착취의 기준을 성교행위로 최소화함으로써 접대 과정을 정당화하는 논리에 불과하다. 『남자들의 방』, 74-75
버닝썬과 N번방을 비롯, 여성의 성을 착취하는 일부 범죄는 개인이 아닌 남성 ‘집단’에 의해 이뤄진다. 여기에 주목한 여성학자 황유나는 남성이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타자화하며 힘을 과시하는 공간을 ‘남자들의 방’이라 명명하고 이를 탐구한다. 그의 책 『남자들의 방』은 특히 유흥업소라는 장소에 주목, 남성은 왜 즐겁기 위해 여성을 필요로 하는가라는 질문을 파헤친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건 저자가 유흥 자체에 반대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가 지적하는 바는, 착취의 형태를 띤 유흥이 갖은 성범죄의 온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합의 하에 즐겁게 노는 것이 어떻게 착취인가?’라는 물음은 종사자의 입장에서 노동 환경을 생각해보지 않았기에 가능한 의문이다. 황유나가 직접 인터뷰한 종사자들의 증언을 취합해보면 손님과 있을 때 그들은 노예와 같다.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듯, “유흥업소에서의 ‘흥겨움’은 같이 만드는 감정이 아니다. 흥을 만드는 사람과 흥을 누리는 사람이 다르고, 전자는 후자의 아랫사람이다. 그 어떤 남성 손님보다 여성 종사자는 낮은 위치에 머문다. 남성들 사이에서 가장 ‘을인 손님의 기분은 그 남성의 파트너인 여성이 즐겁게 만들어야 한다.”(158)
다시 질문해본다. 남성은 왜 즐겁기 위해 여성을 필요로 하는가. 이에 대해 황유나는 크게 두 가지 답을 내놓는다. 첫 번째는, 남성이 남성임을 확인받기 위해서는 여성을 타자로 만드는 남자들의 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남성성의 본질’ 같은 것은 없기 때문에 이를 확인해줄 타자인 여자, 그리고 서로를 주체로 승인하는 또 다른 남자들은 ‘남자들의 방’을 구성하는 필수 요소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들의 방은 ‘남자’의 방이 아닌 ‘남자들’의 방일 수밖에 없고, 남자들의 방에 여성 혐오는 필수적이다.”(58) 두 번째는, 남성들이 즐거움에 수반되는 친밀성 노동(분위기를 유연하게 하고, 관계와 환경에서 비롯하는 불쾌감을 줄이기 위해 요구되는 노동)을 모두 여성의 몫으로 돌리기 때문이다. 남성 중 ““아가씨처럼 노는 사람”은 “알아서 혼자 잘 노는 사람”이다. 이 말은 곧, 남성 손님들은 알아서 혼자 잘 못 논다는 말이다. 남성은 여성이 놀아줘야 흥이 난다. “계속 말을 시키고 해서” “화기애애하게 만들어야” 남성 손님들은 “아, 재밌다”라고 느낀다.”(155)
위 두 가지 사유는 ‘그러니까 남자들의 방이 필요하다’라는 핑곗거리가 될 수 없다. 여성은 남성을 남성으로 만들어주기 위해 세상에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본질적으로 감정 노동 수행에 더 뛰어나지도 않다. 다만 그렇게 학습되었을 뿐이다. 결국 이 모든 것, 여성 착취적 유흥문화와 거기서 파생하는 강력범죄는 ‘여성은 무엇인가’, 그리고 ‘남성은 무엇인가’에 대한 그릇된 인식에서 비롯한다. 황유나 역시 말한다. 결국 이 이분법적 사고의 돌파야말로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될 것이라고. 동감하는 바이다. 두렵지만 최선을 다해 상상해야만 한다. 새로운 여성성과 새로운 남성성을.
남성 게스트에게 허락된 즐거움이 구매력을 통한 ‘남자-되기’의 즐거움이며 그 ‘남자-되기’에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해 침범하는 폭력이 내재해 있다면, 그 짝인 ‘여성-되기’의 즐거움이란 의존성과 종속성을 내포하는 것이다. ....... 클럽은 상품으로서의 여성을 활용하면서도, 고용하고 관리하는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무상으로 여성을 착취해 수익을 창출한다. 그들의 어법으로 하자면, 여자가 있어야 남자가 돈을 쓰는데 클럽은 여자에게 돈을 쓰지 않는다. 이것이 착취다. 38-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