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올리면 아직도 부끄러운 기억이 있다. 어릴 적 우리 가족은 동네에 사는 이웃들과 종종 어울리곤 했다. 초등학교에서 같은 반 학부모로 만난 엄마들이 친해진 덕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만난 소위 ‘이모’들의 자식은 모두 아들이었고, 사춘기 소년들이 으레 그러하듯 녀석들은 여자아이인 나를 무리에 끼워주지 않았다. 늘 저들끼리 공놀이 아니면 게임이었다. 그 모두에 관심이 없었던 나 역시 굳이 친해지려 노력하지 않았다. 얘들 사정이야 어떻든 친해진 어른들은 가족 단위로 자주 모였고 함께 여행도 가고 외식도 했다. 그렇게 고깃집 뷔페로 밥을 먹으러 간 어느 날이었다. 모두가 바삐 음식을 먹는 동안 나는 좀처럼 먹지 못했다. 속이 안 좋은 것도, 누가 먹지 말라고 한 것도 아니었지만 ‘안 먹었다’는 표현은 그날의 내게 안 어울린다. 왜냐하면 내가 의지를 발휘해 먹고 싶은 걸 참은 게 아니었으니까. 나는 더 먹고 싶었다. 고기도 먹고 쌈도 왕 물어서 마구 씹고 싶었다. 뷔페 한쪽에 차려져 있던, 상큼한 오이가 잘게 썰려 들어간 샌드위치도 먹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먹지 못했다. 아저씨, 아줌마들과 짜증 나는 남자애들로 둘러싸인 식탁에서 나는 위축되었고, 좀처럼 수저를 들지 못한 채 눈만 동그랗게 뜨고 남들이 먹는 모습을 지켜봤다. 먹고 있는데도 배가 차지 않았다. 집에서처럼 게걸스럽게 먹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그럴 수가 없었다. 누가 옆에 앉아 내가 먹는 모습을 뚫어져라 지켜본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마침내 식사가 마무리되어 모두가 일어설 때, 나는 다급해졌다. ‘아, 저 샌드위치 진짜 맛있는 건데. 지금 그냥 가면 분명 잠자리에 들 때 배가 고프겠지!’ 용기를 내어 엄마에게 귓속말을 했다. “있지, 나 아직 배가 고파. 저 샌드위치가 먹고 싶은데…….” 말을 마치자마자 엄마는 곧장 화를 냈다. “무슨 소리야? 남들 다 먹을 때 넌 뭐 했니? 이제 일어날 건데 그러면 어떡해!” 가뜩이나 목소리 큰 엄마의 말은 짜증과 화로 더 크게 울렸고, 동시에 모두가, 열 명이 넘는 인원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그 순간 내가 느꼈던 수치스러움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나도 알 수 없었다. 나는, 어째서, 왜 먹지 못했을까?
열 살 무렵에 있었던 이 일은 한동안 무의식 속에 잠들어 있던 기억 따위가 아니다. 언제나 의식 한 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이 사건을 늘 떠올렸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나는 이 기억을 덮어놓고 무시하려 했다. 굳이 의식의 표면으로 끌고 와 되짚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 사건에 덮어져 있던 베일을 벗기고 다시 바라볼 수밖에 없었는데, 최근 내가 알고 있었지만 인정하지 못했던 어떠한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먹는 것과 아주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 밖에서 다른 사람과 식사를 할 때 잘 먹지 못한다는 것. 밖에서 다른 사람과 식사할 때 내가 종종 듣는 말은 “너 진짜 조금 먹는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내가 본 중 가장 잘 못 먹는 사람”이라고 날 묘사했다. 십몇 년 전 나는 다이어트를 위해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걸 통제했으므로, 그때의 나는 내가 생각해도 진짜 조금 먹었다. 하지만 다이어트를 인생에서 지우고, 그러니까 매일 몸무게 재는 짓을 관두고 제대로 된 1인분의 식사를 하기 시작한 뒤에도, 집의 테두리를 벗어나면 어김없이 나는 “진짜 조금 먹는다”는 말을 들었다.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이가 여자든 남자든, 친하든 친하지 않든, 식사 약속 전에 위장을 비워뒀으면서, 분명 메뉴판을 훑으며 저거 맛있겠다고 생각했으면서, 막상 음식이 나오면 맛있게 잘 먹는 모습을 내보일 수가 없었다. 불편하고 멋쩍었다. 거식증 환자였던 엠마 울프는 책 『하루에 사과 하나』에서 공공장소에서 무언가를 맛있게 먹는 사람들을 향해 놀라움과 불편함, 그리고 일종의 질투심을 표한다. 그녀는 사람들이 편하게 식사하는 모습을 보며 ‘어떻게 저렇게 음식에 몰입해 먹을 수 있지?’ 놀라워한다. 동시에 두려워한다. 자신이 그렇게 먹는 모습이 주접스러워 보일까 봐. 어쩌면 나 또한, 내가 주접스러워질까 두려웠던 것 같다.
저자: 다이애나 클라크 / 출판사: 창비 (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다이애나 클라크의 소설 『마른 여자들』은 섭식장애를 앓고 있는 쌍둥이 릴리와 로즈의 이야기를 그렸다. 그러나 소설의 주인공은 어려서부터 더 밝고, 더 빛나고, 이목을 끄는 쪽이었던 릴리에 가려진 로즈다. 릴리가 과식과 다이어트의 길로 접어들기 전부터, 로즈는 거식증에 시달린다. 이야기는 섭식장애 치료소에서 이미 1년여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로즈의 상황에서 출발한다. 살이 더 빠지지도, 늘지도 않은 그녀는 그저 자신의 몸에 쓰러지지 않을 만큼의 칼로리만 공급한다. 식사 시간이 되면 자신의 몫으로 나온 음식을 겨드랑이나 손톱에 끼워 넣는다. 우스꽝스럽고도 기이한 나날들의 연속이다. 본인이 굶어 죽어가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는 로즈의 문장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굶주림에 대한 가장 강력한 목소리였던 헤르타 뮐러의 소설 『숨그네』를 떠올리게 한다. 물론 스스로 굶는 것과 강제수용소에 끌려가 굶게 된 두 인물의 상황을 같은 선상에 올리는 건 부당할 수 있으며, 나 역시 두 가지가 같다고 보지 않는다. 다만 서사 전반에 죽음의 분위기가 강하게 느껴진다는 점, 화자의 목소리에서 결핍과 체념, 그러나 절박함도 느껴진다는 점에서 내게 『마른 여자들』은 뮐러의 소설을 생각나게 했다. 클라크의 소설은 몸과 다이어트를 둘러싼 피상적 담론을 훨씬 넘어서는 작품이다. 여성의 섭식장애가 결국 허영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일각의 시선에 이 소설은 반박을 제기한다. 로즈는 아름다워지기 위해 굶지 않는다. 그녀는 죽기 위해 굶주린다.
스스로 굶주리기 시작했을 땐 거울을 보는 게 좋았다. 내 몸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라, 더는 거기 없는 것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얼마나 많이 지워졌는지 보고 싶었다. 내가 얼마나 조금 남아 있는지 보고 싶었다. -『마른 여자들』, 561
『무엇이 아름다움을 강요하는가』에서 나오미 울프는 여성들이 살을 깎는 이유가 단순히 미용 때문이 아니라 성적인 대상이 되는 걸 피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헝거』에서 록산 게이는 강간 경험이 자기 보호 기제의 일환으로 폭식증을 남길 수 있다고 말한다(그녀 자신의 경험이다). 두 작가의 글을 읽으며 나는 여성의 몸, 그러니까 소위 ‘살’이라는 것에 훨씬 더 깊은 의미가 새겨져 있다는 걸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내게 온전한 지식으로 장착되지는 못했는데, 캐럴라인 냅의 표현처럼 “자기 해체 기술”(『욕구들』, 191)에 여전히 길들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몸을 내 정신이 기거하는 곳이 아니라 외부에 보여지는 대상으로, 얼굴과 팔과 허벅지 등이 어떻게 보이는가로 판단했다. 다이어트 따위 때려치우겠다던 나의 결심은 보여지는 대상으로서의 몸에 신경을 쓰지 않겠다는 안간힘이었지, 여성이 몸과 맺고 있는 복잡한 관계를 이해하거나 내 몸에 대한 긍정이 이뤄진 결과가 아니었다. 나오미 울프와 록산 게이가 말하는 마르고 뚱뚱한 몸은 여성의 외모에 대한 사회적 코르셋을 말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더 근원적인 것을 말하고 있기도 하다. 여성의 섭식장애는 ‘여성이 본인의 몸과 자기 자신, 그리고 세상에 대해 느끼는 불안’과 ‘권리 혹은 권력이라 부를 수 있는 감각에 대한 박탈’의 표상이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나는, 내 몸을 미용적 측면에서 판단되는 대상으로만 보았기 때문에 내 몸이 나 자신이 느끼는 박탈감의 증후로서 굶주릴 수 있음을 알지 못했다.
영혼보다는 몸에 관해 걱정하는 것이 더 쉽고, 문화가 여자들에게 제시하는 좁은 정체성의 틈새에 자신을 끼워 맞추는 것이 처음부터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것보다 쉬우며, 사회적으로 승인된 욕망의 제단에서 예배하는 것이 모든 열정의 표현과 모든 욕구의 만족까지 고려해 자신만의 제단을 건설하는 것보다 쉽다. -『욕구들』, 108
『삼키기 연습』, 『하루에 사과 하나』, 그리고 『욕구들』의 저자는 모두 거식증을 경험했던 이들로, 하나같이 거식증은 예뻐 보이고 싶어 걸리는 병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사회가 여성에게 강제하는 외적 모습에 대한 압력을 부인하는 게 아니다. 다만 여성의 굶주림은 보다 복잡하고 심원한 이유에서 출발한다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이들의 글에서 공통적으로 자주 발견되는 단어는 통제(력)이다. 명확한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우울감, 연인에게 버려진 존재라는 비참함, 자아와 삶에 대한 불확실한 권능. 이 모든 흔들림은 몸을 통제하고 있다는 감각에 의해 대체된다. 『마른 여자들』의 로즈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녀는 학교에서 인기 있는 여학생 제미마의 눈에 들고 싶어 제미마가 제안하는 대로 무작정 굶는 다이어트를 시작한다. 자신의 마른 모습이 마침내 제미마와 다른 학생들의 시선을 받기 시작하자, 로즈는 거기에 얼마간 도취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외모에 대한 인정 욕구는 로즈가 서서히 죽기로 결심한 이유가 아니다. 그녀는 자신을 모른다. 자신의 욕구를 부인하고 싶고,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싶다. 똑같은 외모를 지녔지만 모든 것에 있어 자신을 능가하는 것 같은 쌍둥이 언니 옆에서 자신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여자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감당이 안 된다. 소설 초반, 로즈의 성적 지향은 은밀히 암시된다. 로즈는 자신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본인에게도, 독자들에게도 감추고 싶어 한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직면할, 혹은 원하는 대로 형성할 힘이 없는 로즈는 몸에 대한 통제력을 통해 살아가는 동시에 죽어간다.
시설에 처음 왔을 때 그룹 리더는 나의 문제점과 그것에 맞서기 위한 마음의 주문이 적힌 종이를 건네주었다.
1. 통제력: 당신은 당신 자신의 기쁨만 통제할 수 있습니다.
2. 의존성: 당신은 당신 자신입니다.
3. 자포자기: 당신은 영원히 당신 소유입니다.
4. 감정 조작: 당신은 당신 자신의 인생에만 책임이 있습니다.
5. 자기파괴: 당신만의 평화를 지키세요.
당신 자신 당신 당신 자신 당신 자신 당신 자신. 그게 무슨 뜻일까? 나 자신? 나는 결코 나 자신인 적이 없다. -『마른 여자들』, 97
『마른 여자들』은 여성의 굶주림에 대한 통념을 부수지만 읽기 쉬운 소설이 아니다. 여성이 먹지 않(못하)는 이유가 단지 예뻐지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더라도, 자신의 ‘지워지는’ 존재감을 몸을 통해 확인하고자 하는 심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로즈의 서술이 조금 답답하게 느껴질 것이다. 어쩌면 ‘그냥 먹어! 먹어!’를 외칠 수도 있다. 어느 순간 내가 그랬듯이.
저자: 캐럴라인 냅 / 출판사: 북하우스 (이미지 출처: 위와 동일)
나는 캐럴라인 냅의 에세이 『욕구들: 여성은 왜 원하는가』를 읽고서야 로즈를 더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 자신을 인지하게 되었다. 캐럴라인의 책은 사실상 ‘허기: 여성은 왜 굶주리는가’로 바꾸어도 될 것이다. 캐럴라인의 글을 읽다 보면 여성의 욕구는 곧 굶주림으로 발산된다는 걸 알게 된다. 문화는 ‘여신’이라는 이미지를 살포함으로써 여성들이 자기 몸을 깎아내리길 바라고, 여성이라는 정체성에서 비롯하는 갖은 암시들은 여자들로 하여금 욕구를 통제하게 만든다(혹은 갖지 못하게 한다). 다시 말해, 여성은 외모로 평가되는 인간이자타인을 돌보는 사람이며스스로 원하는 게 아니라 원해지는 대상이라는 암시는 "여성이 자신의 힘을 보지 못하게 하며, 자신의 권력과 권리에 대해 끔찍하게 불편한 감정을 갖게 만들고, 그 힘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는 데서 자괴감과 수치를 느끼게 한다"(『욕구들』, 171) 그리고 그것이, 여성을 허기지고 굶주리게 만든다.
그런 모든 상황 속에서 내게는 본능적인 수준에서 느껴지는 행위 주체성과 온전성의 감각이, 만약 영혼 속에 존재한다면 몸으로도 마땅히 표현될 그 감각이 결여되어 있었다. 몸, 그것도 나의 몸은 내가 신뢰하고 알고 소중히 여기는 무엇이 아니었고, 바로 그런 신뢰와 앎과 소중함의 감각들이 내 존재의 핵심에서 잡히지 않고 빠져나가기만 했기 때문에, 나는 그런 감각이 나에게 온전히 기입되어 있다는 느낌을 한 번도 받지 못했다. 209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 우리 집은 늘 불화했지만, 싸움은 거의 언제나 밥상에서 시작되었다. 정말로, 행복했던 식사에 대한 경험이 없다. 아빠는 늘 엄마가 해준 밥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아빠와 밥을 먹는 시간은 며칠에 한 번, 하루에 아침 시간 딱 한 번이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밥을 불편하게 먹었다. 언제라도 엄마 아빠가 싸울 거라는 긴장감을 가지고 밥을 먹었다. 그러다 정말로 싸우면 나는 우울한 기분으로 학교에 갔다. 물론 두 사람의 불화 이유는 단지 ‘밥’ 때문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하지 않았으므로, 모든 게 문제였다. 하지만 더 문제인 쪽을 밝히자면 그건 아빠였다. 그는 남편으로서나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손쉽게 피해갔지만 가장이라는 권리는 포기하지 않으려 했다.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아빠가, 그리고 아빠가 있는 공간이 너무너무 불편하고 어색했다. 언젠가 엄마를 오열하게 만든 아빠가 너무 미워서 아는 체하지 않았더니 나를 “싸가지 없는 년”이라 불렀다. 나는 아빠가 있는 공간에서는 아무것도 못했다. tv를 보며 웃을 수 없었고 공부에도 집중할 수 없었으며 당연히 뭘 먹지도 못했다. 아빠가 집에 있을 때 할 수 있는 건 방에 들어가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들으며 아빠의 존재를 지워내는 것이었다. 캐럴라인의 책을 읽으며, 어쩌면 나의 기이한 식습관은 내가 나 자신을 형성하는 데 쏟아야 하는 노력보다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눈치를 보는 데 더 많은 노력을 쏟았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했다. 아빠가 있을 때면 나는 늘 가슴이 콩닥거렸고, 엄마가 화를 낼 때면 버려질까 두려웠다. 그랬다. 나는 엄마한테도 내가 원하는 것을 바로, 자신 있게 말하지 못했다.
요즘도 먹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이 아니라, 그 음식을 먹어도 될지에 대해 생각한다. 칼로리를 계산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다. 그냥 이렇게 생각한다. 이걸 ‘내가’ 먹어도 될까? 웃긴 질문이지만 나는 이 짓을 아주 아주 오랫동안 해왔다. 아빠와 떨어져 살고 다이어트에서 빠져나온 뒤 천천히 나아졌지만, 여전히 나는 음식과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캐럴라인 냅의 글을 읽고 내 문제를 직시하고 나니 어쩐지 더는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얼마 전 간식으로 앙버터를 먹으며 생각했다. ‘나는 먹어도 돼! 나는!’ 아마도 나는 지금보다 더 좋아질 것이다. 그냥, 그렇게 될 것이라 ‘내가’ 결심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