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벡 슈라야의 『나는 남자들이 두렵다』는 자칫 여성들을 선동하는 책으로 보이기 쉽다. 이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선 추천사를 쓴 루인의 말을 바로 읽어보는 게 좋을 듯하다. “슈라야가 말하는 두려움은 남성 자체를 두려워한다거나 혐오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책의 두려움은 특정 태도에 공모하는 이들을 향한다. 남성성과 폭력성을 등치하는 태도, 여성성을 경멸하고 평가절하하며 남성성을 우대하는 태도, 어린 시절의 슈라야에게는 지나치게 여성적이라고 말하고 트랜지션을 한 슈라야에게는 충분히 여성스럽지 않다고 말하는 태도, 트랜스 젠더퀴어라는 이유만으로 적대하거나 경멸하는 태도……(4)” 캐나다에서 전방위적 예술가로 활동하고 있는 슈라야는 인도 이민자 부모에게서 아들로 태어나 이후 트랜지션을 한 퀴어다. 비백인에, 시스젠더가 아닌 사람으로서 그가 어린 시절부터 겪어야 했던 백인 우월주의/이성애 중심 사회는 그에게 상처를 남겼고, 두렵게 만들었으며,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 책 『나는 남자들이 두렵다』는 100페이지를 겨우 넘기는 짧고 작은 책이지만, 내용의 깊이는 독자들이 작가의 생각을 함께 고민하도록 하기에 충분하다.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앞부분은 그가 트랜지션을 하고 여성으로 살아가며 겪는 어려움을 담고 있다. ‘나는 남자들이 두렵다’는 제목을 보고 직관적으로 공감을 표한 이들, 그러니까 늦은 밤 성적으로 위협을 당해본 여성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대목들이 있다. 슈라야는 다음처럼 고백한다. “나는 트랜지션을 시작한 뒤에야 내가 일생 동안 영위해 온 독립독행이 대체로 남성 특권에 따른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젊은 여성으로서의 삶은 나 자신을 재교육하도록 명령한다. 타인에게 의존하거나 도움을 청하는 행위를 나약하거나 한심한 일이 아니라 필연처럼 여기도록 길들여지는 것이다(19).” 개인적인 기억을 되돌아봐도 여성이라는 성(sex)을 갖고 살아가는 건, 내가 함부로 다뤄질 수도 있는 대상이라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받는 것과 같다. 대학교 시절 한 남자 선배는 아무도 없는 강의실에 나를 가둬두려 했고 한 남학생은 장난치는 척 두 손으로 내 양 가슴을 찍어 누르듯 만졌다. 한 남자는 몇 살이냐고 물으며 보호해 주겠다고 따라붙었고 술 취한 어느 남자는 같이 꼭 붙어 앉아 있으면 안 되겠냐며 나를 공포에 떨게 했다. 둘 다 길거리에서 처음 본 사람이었다. 이런 얘기를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면 여자와 남자의 반응이 상이하다. 여자는 그 일이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진심으로 내가 괜찮았는지 묻지만, 남자는 ‘세상엔 미친놈들도 있어’ 말할 뿐이다. 하지만, 걔네가 진짜 미친놈이었을까?
트랜스 ‘여성’으로서 슈라야가 새롭게 알게 된 사실과 고통스러운 기억에 대한 회상이 지나면 ‘너’라는 장(chapter)이 나온다. 학창 시절 여성적인 남성으로 인식되던 그녀가 받아야 했던 폭력의 상흔들이 적혀 있는데, 이는 ‘너’에게 들려주는 회상의 형식으로 진술된다. 다음과 같은 식이다.
어느 봄날 오후, 나는 조다시 재킷을 걸치고 책에 몰두한 채 학교에서 몇 블록 떨어진 버스 정류장 부근에 서 있다. 책을 읽고 있는데, 뒤쪽의 작은 잔디밭에서 너와 네 여자친구가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네가 말할 때마다 소녀는 깔깔거리고, 그래서 나는 그 여자애가 네 여자친구라고(아니면 적어도 그렇게 되고 싶어한다고) 생각한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고개를 돌려 확인하려는 찰나, 무언가가 내 등 뒤에 툭 떨어진다. 뒤이어 곧장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순간 온몸이 경직된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 본능적으로 독서를 이어간다. 몇 분이 지났을까. 또다시 무언가가 내 등으로 떨어지고, 킥킥대는 소리가 뒤따른다. 이런 패턴이 수차례 반복되자, 네가 내게 침을 뱉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머리를 스친다. p.32
가해자에 대한 기억을 되짚으며 슈라야는 그의 이름을 바꾸지 않고 ‘너’라고 지칭하며 직접 말을 건다. 이는 네가 행한 폭력을 직설적으로 너에게 고발한다는 점에서 강렬하다. 즉, ‘너’라는 챕터에서 슈라야는 자신의 글에 대한 수신인을 정해둠으로써, 본인의 상처를 헤집고 들여다볼 뿐 아니라 ‘너’라는 자리에 위치한 이들이 자신을 돌아보도록 한다. 책에서 슈라야는 소수자 인권에 대한 관심이 그 피해가 낱낱이 밝혀질 때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방식으로 높아진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 점에서 ‘너’라는 호명은 그녀가 가진 우려에 대한 일종의 저항 전략으로 보인다. 슈라야가 겪은 차별과 폭력이 꽁꽁 감춰져 있다거나 독자들을 자극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너’로 수신인이 설정된 글을 읽을 때 우리는 ‘너’의 자리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책 속에 등장하는 ‘너’는 단 한 사람이 아니다. 슈라야는 학창 시절부터 성인이 되고 트랜지션을 결심하기까지 자기 영혼에 아픈 자국을 남겼던 모두를 ‘너’라고 부른다. 여성으로서 슈라야가 느꼈던 두려움에 나는 공감한다. 아무도 없는 밤거리를 빠른 걸음으로 활보할 때, 그러다 문득 검은 형체 하나가 나타나 내 쪽으로 시선을 주고 있을 때, 나는 두려움을 느낀다. 하지만 슈라야가 겪은 경험과 나의 경험은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일어났던 일 상당 부분은 내게 일어나지 않았다. 시스젠더 헤테로섹슈얼로서 나는 트랜스퀴어인 슈라야가 겪어온 차별을 겪지 않아도 되는 특권을 누려왔다. 슈라야가 말하는 ‘너’ 중에 나는 없었을까?
실로 슈라야는 책의 마지막 챕터인 ‘나’에서 자기 안에 내재해 있던 폭력적 남성성을 반성하는 동시, 자신을 괴롭혔던 남성 옆에 있던 여성도 두려웠다고 고백한다. 소수자성은 순수함과 완전무결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희생자가 더 착하고 선할 거라는 생각은 고정관념이다. 하지만 사회적 편견을 받는 소수자가 오롯이 선하지 않다는 사실은 종종 차별의 근거가 된다. 알고 보면 우리 모두가 복합적이고 불완전하며 선한 만큼 악함에도 불구하고. 하여 슈라야는 추천사에서 루인이 설명한 “특정 태도에 공모”한 이들 중 한 사람이 자신이었음을 먼저 밝힌다. 첫 키스가 궁금했던 어린 시절, 자신보다 어리고 연약한 여학생에게 강제로 입을 맞추려 한 것, 여성을 배척하는 남성 동성문화(게이문화를 포함)에서 소외감을 느끼면서도 남성이라는 성역할에 주어지는 권리를 무의식적으로 흡수한 것 등. 누군가는 슈라야의 고백을 역시 트랜스젠더는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의 근거로 활용하고 싶겠지만, 그건 이 책의 논지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것이다. 슈라야의 등에 침을 뱉은 남학생 옆에서 그를 말리지 않고 계속 웃음소리를 냈던, 그래서 그의 행동을 더욱 부추겼던 건 여학생이었다. 슈라야가 은밀히 마음을 품고 있던 남학생이 또다시 눈이 마주치면 그를 죽이겠다고 했을 때, 그 말을 무감하게 전달한 것 또한 여성이었다. 여성과 남성이라는 두 개 성의 결합만을 옹호하는 이성애주의, 그리고 그것과 강하게 결부된 가부장제를 존속시키는 건, 남성뿐 아니라 여성이기도 하다. 요컨대 슈라야는 ‘너’에 대한 고발에서 시작해 ‘나’에 대한 반성에 이르며 독자들이 자신이 서 있는 곳을 생각하게 만든다. 나는 고작 ‘너’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나’를 돌아보는 지점에 와 있는지.
책의 뒷면에는 "그리고 남자들은 나를 두려워한다"라는 말이 쓰여 있다.
한편 슈라야는 유해한 남성성을 해체하기 위해 ‘좋은 남자’ 신화가 사라져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좋은 남자란 여타의 남자들과 다른 사람을 의미한다. 가부장적 특권을 내면화하지 않은, 폭력적이지 않고 가정적이며 배려심이 깊고 공감 능력이 뛰어난 사람. 좋은 남자 신화를 없애자는 슈라야의 주장은, 이런 훌륭한 자질을 갖춘 남성을 사회에서 몰아내자는 게 아니다. 외려 좋은 남자가 되는 데 필요한 요건들을 예외적인 좋은 남자가 아니라 일반적인 모든 남자에게 요구하자는 것이다. 우리는 소수의 좋은 남자를 만나길 희망하며 전형적인 남자들에 대한 기대는 거의 놓아버렸다. 이렇게 되면 유해한 남성성 자체는 도전받지 않고 그대로 남게 된다. “우리가 아무리 ‘전형적인 남자’의 비난받아 마땅한 행동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해도 ‘좋은 남자’라는 신화를 영속화하고 예찬하는 한, 결과적으로 지금의 기준선을 눈감아주는 데 공모하게 될 뿐(87)”인 것이다. 슈라야는 우리가 좋은 남자라는 모호한 말을 치우고 남성 전반에 바라는 자질을 구체적으로 언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연 구체적 대안이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유해한 남성성은 해체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 구체적 대안이 마련된다 해도, 사람을 갉아먹는 오늘의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차별과 폭력을 조장하고 방관하는 태도는 더욱 뿌리 뽑기 힘들어졌다. 그건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일부 여성들의 행보에서도 발견되는 바다. 바로 이 지점이, 『나는 남자들이 두렵다』의 한계다. 독자들을 고민하게 만드는 것에 비해 제안하는 바는 두루뭉술하다는 것. 계급과 젠더가 얽혀 있는 만큼, 사회 경제를 논하지 않고 유해한 남성성의 해체를 말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고백하건대 나는 언제나 문화의 힘을 믿어왔다. 문화가 제시하는 여성서사는 나를 옭아맸지만 동시에 해방시켰다. 새로운 남성성에 대한 고민이 계속 축적되다 보면 우리의 바람이 응축된 서사가 나타날 것이다. 그 또한 완벽하진 않을 테지만, 우리 역시 다시 고민하고 얘기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