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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희구 Jun 16. 2023

남성복을 입은 여성들

책 '남성복을 입은 여성들'을 읽고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 블랙펄의 저주> 속 한 장면. 어렸을 때는 조니 뎁에 온 정신이 가 있어서 몰랐지만, 근래 다시 본 이 영화는 엘리자베스의 관점에서 볼 때 가장 흥미롭다.



‘코르셋’이라는 단어와 그 생김새를 처음 접한 건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 블랙펄의 저주>를 통해서였다. 18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하는 그 영화에서 귀족 영애인 엘리자베스는 외출하기 전, 하녀의 도움을 받아 코르셋을 조인다. 하녀가 온 힘을 다해 코르셋의 끈을 당기고 엘리자베스는 숨을 ‘흡-!’ 하고 참는 광경을 보며, ‘저 옷의 쓰임새는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엘리자베스는 예쁜 옷을 입으며 즐거워하기보다 괴로워 보였다. 결국 엘리자베스는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해 바닷속으로 풍덩 빠지고 만다. 이후 영화는 그녀를 구하는 잭 스패로우의 재기와 능청스러움으로 포커스를 옮겨가지만, ‘그 사건’의 흐름(한 여성이 몸을 조이는 이상한 옷을 입고 숨도 못 쉬어서 쓰러졌다)은 나의 뇌리에 강하게 박혔다. 나중에 코르셋의 쓰임새를 정확히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엘리자베스가 추락하던 이미지를 떠올렸다. 잭이 그녀를 빨리 구하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녀는 사회가 강제한 미의 기준을 충족시키려다 죽은 여자가 되었을 것이다. 물론 영화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리는 만무하지만, 현실 속 여성들의 몸은 실제로 그 기이한 의복 속에서 뒤틀리고 변형되었다.


『남성복을 입은 여성들』은 독자들에게 명확한 사료를 제시할 수 있는 근‧현대사를 중심으로, 당대 여성에게 허락된 의복이 아닌 남성복을 입었던 여성들을 소개하는 책이다. 넷플릭스가 제작한 「도시인처럼」의 주인공 프랜 레보위츠 같은 현대 인물도 등장하니, 책 속의 모든 여성이 코르셋 착용 의무화의 시대를 살았던 건 아니다. 하지만 21세기 대한민국에 ‘탈코르셋’이라는 단어가 존재하는 데서 알 수 있듯,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성의 외양에 대해 사회가 특별히 요구하는 기준이 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물며 지금도 여성의 외모에 대한 사회의 시선이 날카로운데(가령, 여성 정치인의 옷차림은 늘 ‘얼마나 여성적인지’ 혹은 ‘얼마나 권위적인지(=드세 보이는지)’ 등과 연관돼 논의된다. 통상 남성 정치인의 패션을 두고 얼마나 남성적인지 논해지는가?) 여성을 가정의 지킴이이자 남편의 소유물로 여겼던 과거에는 어땠겠는가. 책에 소개된 여성들의 남성복 차림은 오늘날 탈코 운동과 비슷한 맥락에 위치한다. 이들은 남자가 되기 위해 머리를 자르고 바지를 입은 것이 아니다. 교복은 달라도 운동복 디자인이 남녀가 똑같은 데는 이유가 있다. 흔히 여성복으로 분류되는 옷은 입는 사람의 움직임을 불편하게 만들고, 그들의 행동반경을 좁게 만든다. 때문에 여성복을 벗는다는 건 물리적으로나 비유적으로나 자신의 존재 범위를 넓히겠다는 선언과 마찬가지다. 『남성복을 입은 여성들』 속 여성들은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은 옷을 입음으로써 사회에 저항했고, 그 과정에서 자신에게는 허락될 수 없었던 삶을 충실히 살았다.


저자: 빅토린 / 출판사: 스크로파



용감하게도 평생을 오픈리 레즈비언으로 살았던 작가 안네마리 슈바르첸바흐는 더 용기를 내어 세상을 직접 경험하고 싶었다. 하여 그는 친구 마일라르트와 함께 스위스에서 아프가니스칸까지 자동차를 타고 여행하기로 결심했다. 당시에는 두 여성의 자동차 여행이 지금보다 더 위험했을 테지만 슈바르첸바흐는 두려워하기보다 그저 결행했다. 만약 그가 드레스를 고집하는 여인이었다면 어땠을까?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입고 자동차로 세계를 가로지르는 여성들의 모습은 아무래도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 않는다. 비록 약물 중독으로 인한 문제를 겪었지만, 슈바르첸바흐는 끝내 아프가니스탄에 도달해 자신의 여행기를 글로 남겼다. 당대 유럽을 휩쓸었던 파시즘에 반대했던 지식인인 그녀는 계속 세상에 자신을 던지며 탐구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모두가 옹호하는 분별 있는 삶이란 것에 숨 막히고 싶지는 않아. 또한 확신해. 우리가 성공을 하건, 그러지 못하건, 인생의 의미를 찾는 것이 우리의 과업이라는 사실을 말이야(42).”   


슈바르첸바흐보다 앞선 시대를 살았지만, 그가 말한 대로 모두가 옹호하는 분별 있는 삶(=주어진 젠더 역할에 충실한 삶)을 살기보다 스스로에게 인생의 과업을 부여하고 그걸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한 인물도 책에 소개되어 있다. 바로 닥터 메리 워커다. 그는 당대 여성주의자들에게 불었던 ‘블루머(Bloomer 치마바지)’ 유행도 뒤로 한 채 완전한 남성복을 차려입었다. 워커는 여성에게 닫혀 있었던 문들을 두들기고 과감히 열어젖혔다. 그는 여성을 간호사로만 고용하려는 사회에 맞서 의사가 되었고, 또 여성에게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 가부장제에 맞서 이혼녀가 되었다. 남북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는 전장에 나가 병사들을 치료했다. 당국에서는 그를 (여자라는 이유로) 의료인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는 아랑곳 않고 활약해서 끝내 공로를 인정받았다. 훗날 국가에서 (아무래도 여성에게는 줄 수 없다는 이유로) 훈장을 반납하라 했을 때, 워커는 반납을 거부하고 매일 옷에 훈장을 달고 다녔다. 그에게는 늘 조롱과 비난이 따라붙었지만, 워커는 꿋꿋이 자신의 신념이 이끄는 대로 인생을 살았다.


슈바르첸바흐(왼쪽)와 친구 마일라르트(오른쪽)



슈바르첸바흐와 워커 외에도 책에는 더 많은 여성이 소개된다. 앞서 언급한 대로 레보위츠가 있고, 조선시대 문인이자 기녀였던 김금원의 이야기도 있다. 김금원은 기적에 오르기 전, 세상을 자기 눈으로 직접 보기 위해 남장을 하고 긴 여행길에 올랐다. 훗날 그는 운초 등과 문학모임을 만들었는데, 바로 그 모임을 통해 자신의 과거 여행기를 ‘호동서락기’라는 책으로 펴냈다. 머나먼 길에 오르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책의 한 챕터(chapter)는 특정한 인물이 아니라 미국 서부시대 여성들에 대해 쓰였다. 척박한 서부 시대, 여성의 몸으로 생존하는 것에 한계를 느낀 몇몇 여성들은 남성복을 입고 그 자신이 카우보이가 되었다. 이들에 대한 기록은 ‘철저한 위장 효과’를 누리고자 한 그들의 은밀함 때문에 많이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신문 몇 줄 정도로 남아 있는 이 희미한 기록들은 이 여성들이 술집 종업원이나 성 판매자 등으로 일하는 대신, 뭇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광산 노동, 카우보이, 강도로 활동했음을” 보여준다(104).


이 책에 소개된 여성들은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하지 않다. 슈바르첸바흐는 약물중독이었고, 워커 박사는 지나치게 강경한 태도, 다시 말해 유연성이라곤 조금도 없는 태도로 인해 여성참정권운동가들과 갈등을 빚었다. 서부시대를 살아간 여성들은 강도였고 원주민과의 전쟁에 가담하기도 했다. 이렇게 흠결 있는, 심지어 범죄자인 인물들을 여성사로 소개하다니, 놀라워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남성복을 입고 사회 규범에 저항했다는 이유로 소개된 모든 여성을 페미니스트 영웅으로 추앙하자고 제안하지 않는다. 책의 저자 빅토린은 소개하는 인물들의 흠결을 감추지 않고 적시하며, 각 인물의 생전 행보에 맞춰서 글을 쓴다. 즉, 빅토린은 여성주의적 관점을 견지, 여성들의 남성복이라는 선택이 사회에 어떤 효과를 내고 그들이 무엇을 얻었는지를 여성사 안에서 기술하는 것이지, 모든 인물을 본받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이것을 굳이 부연하는 까닭은, 여성이 여성을 다루는 글에 무조건 ‘선동’이라는 단어부터 붙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멋있지만 무섭고 흉측하기까지 한 인물들의 삶을 통해 이 책이 보여주는 건, 세상이 정한 경계선이 본래적이지 않고 옷 한 장에 따라 바뀔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과거 남성복을 선택한 여성들이 겪어야 했을 조롱과 손가락질을 현재의 우리가 모두 알 수는 없지만, 이들의 과감한 선례는 분명 오늘날 코르셋과 사투를 벌이는 사람들에게 울림을 준다. 선례를 두 눈으로 확인한다는 것은 내게 보이지 않던 선택지를 하나 얻게 되는 것과 같으니 말이다.


메리 워커


이 책을 읽는 동안, 무려 5년 전 내가 블로그에 올렸던 글에 댓글 하나가 달렸다. 그 글은 여성의 외모를 다룬 영화들에 관한 나의 생각을 적은 것으로, 여성이 느끼는 외모 압박이 주요한 주제였다. 남성으로 추정되는 그는 대략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 남성들은 그냥 한국 여자들이 다 못생겼다고 가정하고, 혼자 살아가는 걸 축복으로 여겨야 한다.’ 그는 자신의 글이 내게 어떤 ‘파장’을 일으킬 거라 생각했을까, 아니면 그냥 내가 아무렇지 않을 거라 해도 ‘기필코 할 말은 해야지’라는 마음으로 타자를 쳤을까. 여성이 여성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할 때, 거기에 이유 없이 짜증이 나고 분노가 치미는 사람들은 악플을 남기기 전에 유의할 것이 있다. 당신이 그렇게 비논리적이고 감정적으로 글을 쓸 때, 거기에 상처받는 여자는 없다. 특히 요즘엔 더 없다. 그냥, 우리는 이렇게 생각한다. ‘아, 여기 성차별 사례가 하나 더 있네.’ 우린 그걸 증거 수집으로 여긴다. 여성에게 꾸미지 않을 자유, 사회가 강제한 기본 여성 이미지에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하지 않을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면, 왜 숏컷을 한 여성이 이유 없이 남성에게 두들겨 맞고 페미 논란을 겪어야 하는가? 나는 이 질문에 답할 필요가 없다. 이 질문에 답해야 하는 이는, 여성의 다양한 이미지를 사회의 악(惡)쯤으로 여기는 이들이다. 묻고 싶다. 당신이 행하는 그 언어적, 신체적 폭력의 정당함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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