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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희구 Dec 08. 2022

피해자의 이야기를 먼저, 온전히 경청한다는 것

소설 '마이 다크 버네사'

작가 : 케이트 엘리자베스 러셀 / 출판사 : 문학동네



미투 운동을 둘러싸고 페미니즘이라는 이름 아래 피해와 가해라는 단어들로 무장한 ‘여성’이 결집한 현상을 비평한 책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에서 정희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남성 사회가 가장 원하지 않는 상황은 여성이 자기 언어를 갖는 것, 다시 말해 여성이 피해와 가해를 규정하는 과정에 개입하는 ‘인식론적 권력’을 갖는 것이다(207)". 여성들은 오랫동안 자신이 당한 폭력을 폭력으로 인지할 수가 없었다. 사회가 남성에 의해 구성되고 이야기됨으로써 매번 자신의 생각과 목소리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겼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미투 운동이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이유다.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고 연결되는 과정에서 여자 사람들은 (마침내, 혹은 또다시) 자신의 경험을 피해라고 인지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케이트 엘리자베스 러셀의 소설 『마이 다크 버네사』는 자신의 경험을 학대와 사랑 중 어느 범주에 위치시켜야 할지 몰라 고통스러워하는 한 소녀/여성의 이야기이다. 2000년, 명문 고등학교에 입학한 15살의 버네사는 조금 혼란스럽고, 조금 외롭고, 조금 특별해지고 싶은 기분이다. 친구 제니와 막 멀어졌고, 학교의 몇몇 수업을 따라가기가 힘들고, 무엇보다 사춘기를 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 앞에 영문학 교사 제이컵 스트레인이 등장한다. 소아성애자인 42살의 그는 버네사의 외로움을 알아채고 그녀에게 접근한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알려주며 손을 잡고 옷차림을 칭찬하는가 하면 그녀의 문학적 재능을 이용, 따로 추천 도서를 준다는 명목으로 그녀와 단둘이 시간을 보낸다. 어느 날은 첨삭지도를 한다는 명목으로 버네사를 교실 앞으로 불러내 아무도 못 보는 곳에서 그녀의 무릎을 쓰다듬는다. 기어코, 그는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사랑을 고백하는데, 적지 않은 시간 선생님이 바치는 찬사 어린 말들과 행동에 도취되었던 버네사는 그 고백이 부적절함을 인지하면서도 어찌하지 못한다.     


그의 머리가 여전히 내 무릎 위에 묵직하게 놓여 있고, 내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하고, 겨드랑이와 무릎 안쪽에서 땀이 나기 시작한다. “가엾게도 너와 사랑에 빠졌지만.” 그가 그 말을 하는 순간, 나는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된다. 게다가 그 누군가는 내 또래의 한심한 남자애가 아니라, 이미 한평생을 살았고 세상사를 겪을 만큼 겪었는데도 내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남자다. 나는 이 문턱을 넘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을, 평범한 일상에서 벗어나 나이 든 남자가 가엾게도 나와 사랑에 빠질 수도 있는 그런 세계로 강제로 밀려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123-124).     


버네사가 자신의 경험을 ‘학대’이자 ‘폭력’으로 발화하는 것을 원치 않는 스트레인은 그녀를 그루밍(grooming)한다. “우린 아주 비슷한 사람인 것 같구나 .... 네가 쓴 글을 보니 너도 나처럼 어두운 로맨티스트란 걸 알겠어”(72)라고 속삭이며 유혹하고, “네가 책임자야, 버네사. 우리가 무얼 할지는 네가 결정하는 거야”(137)라고 말하며 모든 상황의 주도권을 넘기는 척한다. 하지만 사실 그는 자신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고 잘못을 부정하며 그녀의 심리를 조종한다. 2017년 미투 운동의 확산 속, 다른 여학생들을 추행해왔다는 사실이 폭로되고 버네사가 다른 피해자에게 연대 요청을 받자, 그는 말한다. “이 집단히스테리에 동참하고 싶은 유혹. 우리 사이에 일어났던 일을…… 부적절하다거나 가학이었다거나 혹은 네 마음 가는 대로 이런저런 이름을 붙이고 싶은 것도 이해해. 네가 원하는 대로 날 바꾸어놓을 수 있다는 걸 난 믿어 의심치 않아 (중략) 하지만 버네사, 정말 평생 그런 꼬리표를 달고 살고 싶어? 만약 네가 그 일에 동참한다면, 네가 앞으로 나선다면, 넌 영원히 그 꼬리표를……”(214)


『마이 다크 버네사』는 독자가 주인공과 경합을 벌이게 한다. 독자의 눈에 뻔히 보이는 학대가 버네사에게는 사랑으로 번역되기 때문이다. 그녀는 스트레인과의 관계 때문에 ‘교사의 명예를 실추시킨’ 학생이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학교를 자퇴한다. 사랑을 부르짖던 그로부터 어떤 보호도 받지 못했다. 심지어 그와 함께한 세월 속에는 ‘이게 바로 강간인가?’라는 의문이 든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피해자로 위치시키지 않는다. 대신 자문한다. ‘이게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면 무슨 이야기겠는가?’ 그녀는 자신의 경험을 사랑이라는 단어의 포장 없이는 직시하지 못한다. 그걸 제대로 이해하는 건 지나치게 버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녀는 세상이 원하는 순진하고 온전한 피해자가 아니다. 그녀도 알고 있다. 세상이 그녀에게 보이는 연민은 “내가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모든 조치를 취하면서 올바른 일을 하고 또 원해야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을”(481). 하지만 그녀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무력으로 스트레인에게 끌려다니지 않았고, ‘적극적’ 저항을 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두려웠으나 쾌락을 원했다. 스트레인으로 인해 인생의 경로가 바뀌었고 어딘가가 망가졌지만 그를 고발하지 않았다.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경험을 한사코 부정한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한다. “단 한 번이라도 그 일을 이해할 수 있게 해달라고. 왜냐하면 나는 아직 그 시간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92)     


『마이 다크 버네사』는 분명 논쟁적인 소설이다. 누군가는 이 글을 완전히 오독할 것이다. 버네사의 주저함에 동의하며 그래, 당신의 피해는 사실 피해라고 할 수 없지 않아?라고 따질 것이다. 버네사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불편함을 떨치지 못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버네사의 이야기는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 아니야? 이런 대표성을 띠지 못하는 이야기가 미투 시대의 서사로 소개돼도 괜찮은 거야? 전자는 이 사회에 엄연히 존재하는 젠더 권력과 피해 사실을 지우려는 시도이기에, 굳이 그 의견에 토를 달거나 반박할 필요가 없다. 어차피 그들은 귀를 열어 사고를 확장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자는 피해자를 위하면서도 그들을 고립시키는 시선이기에 얘기될 필요가 있다. 세상에 완벽한 피해자란 없다. 어느 날 환한 실내에 얌전히 있다 불시에 닥친 폭력에 목숨 걸고 저항하다 우연히 살아남아 자신의 경험을 눈물로 증언하는, 모두의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피해자만이 피해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마이 다크 버네사』에는 “이 세상의 모든 돌로레스(롤리타)와 버네사를 위하여”라는 문장이 쓰여 있다. 이 두 캐릭터의 공통점은 이들이 외부 (가부장적) 시선에 비추어 보았을 때, 온전한 피해자로 쉬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은 끊임없이 네가 분명 유혹을 했다는 혐의를 받는다. 하지만 우리의 논의는 피해자가 얼마나 순결한지가 아니라 가해자가 왜 가해자인지에 맞춰져야 한다. 그것이 더 나은 논쟁이자 정상적인 사회의 모습이다.


앞서 언급한 책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에 또 다른 저자로 참여한 권김현영은 성폭력 사건에 관하여 피해자의 진술이 유일하게 권위 있는 해석이 되어선 안 된다고 본다. 어떤 맥락 속 어떠한 행동이 왜 잘못인지를 논하기 위해선, 사회가 해석 과정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피해자의 이야기가 낯선 사람들에 의해 마구 헤집어져도 좋다는 뜻이 아니다. 어떤 잘못이 왜 해악인지, 사회 구성원들이 합의하고 학습하기 위해서는, 개인이 아닌 공론의 장에서 여러 해석의 투쟁을 거치며 이야기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물론 말하는 여성에 대한 위협이 만연한 사회에서 공론장에서의 발화와 해석 투쟁이란 요원해 보인다. 때문에 권김현영은 피해자에 대한 무조건 감싸기가 아니라 스스로 말하는 자가 자신의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먼저 경청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연대는 그 이후에 시작되는 것이다. 나는 『마이 다크 버네사』가 그런 연습을 할 수 있게끔 만드는 이야기라 생각한다. 현명하지 못한 선택을 연달아 하는 버네사를 보며 우리는 그녀를 변호하지 못할까 마음을 졸이기보다는, 일단은 고통스럽게 들어야만 한다. 그리고 얘기해야 한다. 그녀가 얼마나 완벽한 피해자인지가 아니라 그녀의 경험이 어째서 피해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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