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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희구 Jun 07. 2023

이것은 동화다

드라마 '샬럿 왕비: 브리저튼 외전'을 보고  

이미지 출처: 넷플릭스



<더 그레이트> 시즌 2(Hulu 제작)를 본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일까. <샬럿 왕비: 브리저튼 외전>(이하 <샬럿 왕비>)을 보는 내내 <더 그레이트>를 떠올렸다. 두 드라마는 작품의 뼈대를 이루는 요소가 상당 부분 유사하다. 일단 <샬럿 왕비>의 샬럿과 <더 그레이트>의 캐서린은 모두 실존 인물로, 각각 영국과 러시아의 왕비이자 황제였다. 두 사람은 독일의 작은 공국 출신으로 차마 거절하지 못할 대국의 왕과 정략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공통점도 있다. 물론 두 드라마는 실존 인물의 배경만 가져왔을 뿐, 이야기의 살을 이루는 에피소드는 모두 지어냈다. 한데 흥미롭게도 각 작품이 샬럿과 캐서린 앞에 예비한 미래는 비슷하다. 주인공들은 영국과 러시아에 도착하자마자 결혼식을 치르지만 곧 남편에게 외면당한다. 쓸쓸한 이방인이 된 이들은 부조리한 세계를 마주한다. 샬럿에게는 인종 통합이라는 과제가, 캐서린에게는 야만성 극복이라는 숙제가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시종 비슷한 듯 아닌 듯하던 두 인물은 결정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서 사뭇 다른 양상을 보인다. 역사에 따르면 샬럿은 조지 3세와 열 명이 넘는 아이를 낳았고 캐서린은 쿠데타를 일으켰다. 극 중 샬럿은 조지의 아내가 되는 데 성공함으로써 스스로 인종 통합의 상징적 존재가 되고, 캐서린은 남편을 끌어내리고 황제가 됨으로써 자신을 ‘더 그레이트’로 칭한다.


두 작품을 굳이 비교할 필요는 없지만, <샬럿 왕비>를 보는 내내 <더 그레이트>를 생각한 나는 두 작품을 저울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더 그레이트>에 마음을 더 얹어주고 싶다. 물론 시즌2에 들어서 황제가 된 캐서린이 국정 운영에 어설픈 모습을 보여주고 망나니 남편(피터)을 사랑하게 되며 <더 그레이트>의 ‘그레이트 great’가 캐서린의 칭호보다는 그녀와 피터의 사랑을 지칭하는 것에 훨씬 더 가까워 보이게 된 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내가 러시아를 위대하게 만들겠다’라는 캐서린의 포부에 흡족했던 마음이 쉬이 사라지진 않는다. 알고 있다. 앞서 샬럿과 캐서린의 비슷한 점을 짚긴 했지만, 애초에 <샬럿 왕비>와 <더 그레이트>의 장르나 목표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더 그레이트>가 미투운동 이후 급격히 쏟아져 나온 여성 중심적 서사의 구현이라는 흐름에서 제작된 드라마라면, <샬럿 왕비>를 비롯한 <브리저튼> 시리즈는 여성의 욕망을 반영하되 늘 로맨스라는 틀 속에 여성을 묶어두는 칙릿/할리퀸 장르에 뿌리를 두고 있는 드라마다. 아마도 나는 <샬럿 왕비>보다 <더 그레이트>의 한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불만을 터뜨리고 있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21세기 여성 운동의 특정 분기점을 넘은 이후 뻔한 로맨스 영화조차 여성 차별에 대해 의식적 언급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샬럿 왕비> 역시 이런 흐름을 무시하지 않는데, 나는 이 지점이 상당히 기만적이라 지적하고 싶다.  



<샬럿 왕비>는 1화에 샬럿이 오빠에 의해 거의 팔려가듯 영국에 가는 장면을 넣음으로써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스스로 힘을 거머쥘 수 없는 흑인 여성이라는 점을 명시한다. 실로 조지의 엄마인 오거스트 공빈이 샬럿을 왕비로 점찍은 이유는, 그녀가 남편의 질병을 알게 되더라도 공식적 항의를 할 수 없는 힘없는 나라 출신이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샬럿이 궁에서 무료함에 치를 떨거나 공빈과 대립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녀의 약한 입지를 시청자에게 계속 상기시킨다. 그리고 그녀가 삶과 미래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브리저튼> 시즌1이 그러했듯 <샬럿 왕비>는 여성 인물이 자신의 인생에 대한 주도권을 어떻게 가져올 것인가를 골몰하게 한다. 하지만 이 고민은 설렘보다는 답답함을 자아내는데, 그 주도권이란 것이 결국 결혼이라는 제도 및 남편과의 관계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극 중 생존을 고민하는 여성 인물은 샬럿뿐만이 아니다. 댄버리 부인과 오거스트 공빈 역시 이를 고민하고 드라마는 샬럿과 댄버리 부인, 그리고 댄버리 부인과 오거스트 공빈이 각각 여성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사회와 남편에 대해, 혹은 일찍 혼자가 되어버린 여인의 처지에 대해 직접 대화를 나누게 한다. 각 대화는 미래를 그들이 직접 개척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르며 마무리되는데, 이때 그 결론은 어느 여성 모임의 조직 따위가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가부장제에 투항하는 것으로 구현된다. 샬럿은 자신을 밀어내는 남편에게 화를 내어 사랑의 맹세를 얻어내고, 아내이자 왕비로서 자기 정체성을 확립한다. 하여 책 읽기를 좋아하고 담장 너머로 자신을 기꺼이 내던지려 했던 총명한 여인은 사교철 짝짓기에 막대한 관심과 에너지를 쏟는 다소 엉뚱하고 자존심 센 부인이 된다. 남편을 잃은 댄버리 부인과 오거스트 공빈은 아들을 통해 자신의 지위를 유지한다. 드라마는 재혼을 거부한 댄버리 부인이 마치 홀로서기를 택한 듯이 그리지만, 사실 그건 그녀에게 남편의 작위를 물려받을 아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선택지다.


나는 결혼이 여성에게 완전한 구속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혼인을 택한 여성의 삶이 비혼 여성보다 피폐하다고 여기지 않으며, 가정을 꾸려가는 과업이 결코 자아실현과 동떨어져 있다거나 불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제인 오스틴의 작품을 비롯한 각종 가정 소설들이 내게 어떤 울림도 주지 못했다고 주장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브리저튼>은 엄연히 현대에 나온 작품으로, 샬럿은 1화에 자신이 착용한 코르셋을 가리켜 신랄한 말을 내뱉는다. 이처럼 다분히 현대 여성 시청자를 ‘의식’한 대사를 쓰는 드라마가 여성이 문제라고 의식하는 건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은 채 결혼을 통한 해피엔딩을 주장하는 건 너무 하지 않은가? 혹자는 댄버리 부인의 끔찍했던 결혼 생활이 혼인한 여성의 처지를 보여준다고 항변할 것이다. 하지만 댄버리 부인의 결혼 생활은 샬럿과 바이올렛의 그것과 비교되며 그저 불운했던 케이스로 전락한다. 브리저튼 시즌1에서 한 남성 귀족은 주인공 다프네를 자신이 살 수 있는 물건쯤으로 취급했다. 아마도 댄버리 부인 역시 그 같은 사고를 가진 남성과 결혼했을 것이다. 그리고 샬럿의 결혼 역시 그 같은 거래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하지만 드라마는 여성들이 문제를 느끼되 생각은 하지 못하게 한다. 이들의 고민은 에로틱한 감각들에 떠밀려 사라진다. 역사적 배경을 끌고 오지만 <브리저튼>은 어차피 허구이며 판타지다. 다인종 캐스팅을 밀어붙일 만큼 유연한 감각을 지닌 이 드라마는 어째서 여성이라는 범주에 대해서는 이토록 고지식한가?



<브리저튼> 시즌 1은 다인종 캐스팅에 대한 설명을 극 중 대사 속에 집어넣었다. 백인 왕과 흑인 왕비의 위대한 사랑 덕분에 사회가 통합이 되었다고 말이다. 하여 브리저튼 외전으로서 <샬럿 왕비>에 주어진 임무는 자명했다. 브리저튼 세계관에 좀 더 그럴듯한 설명을 제시하는 것. 시리즈에 계속 가해졌던 ‘다인종 캐스팅이라는 진보적 행보를 보였으나 정작 인종 문제는 전혀 다루지 않는다’라는 비판에 대한 뒤늦은 답을 제출하는 것. 극 중 영국 사회에 진출한 흑인들은 대개 작은 국가의 왕족 출신으로 부유하지만 명예를 갖지 못해 집단적 배제를 받는 구성원으로 설정되어 있다. 상황이 반전되는 건 그들과 같은 피부색을 가진 샬럿이 국왕 조지와 결혼을 하게 되면서다. 왕실은 왕비와 같은 피부색을 지닌 사람들에게 토지와 작위를 선사해, 전 국민 단위의 ‘대실험’을 진행한다. 당연히 이러한 결단은 ‘과연 될까?’라는 의심과 눈초리를 맞이한다. 그러나 사안의 규모와 별개로 <샬럿 왕비>는 사회의 반발을 재현하는 데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는다. 댄버리 경이 어느 클럽에 들어서는 걸 제지당했다, 혹은 댄버리 부부가 무도회를 여는 데 아무도 안 올 것이다 등 주로 댄버리를 중심으로 드라마는 대실험의 쉽지 않은 진행 상황을 ‘말’로 설명한다. 인종차별이 스크린에 보이는 건 딱 두 번으로, 바이올렛의 어머니가 댄버리 부인을 향해 눈을 부라리는 장면과 오거스트 공빈이 첫 만남에서 샬럿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문질러보는 장면이 그것이다. 후자는 1화에 나오는 것으로, 샬럿에게나 시청자에게나 꽤 모욕적으로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드라마는 이 장면이 충분히 자극적이었다고 생각했는지 이후로 샬럿의 피부색은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나는 흑인 캐릭터가 차별을 받는 자극적 장면이 더 많이 재현되어야 했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다만 드라마가 댄버리 부인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끊임없이 인종문제를 환기시키는 것에 비해, 드라마 전체가 인종문제를 감싸 안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는 걸 말하고 싶다. 댄버리 부인은 샬럿에게 반복해서 말한다. ‘당신이 우리 중 처음이고, 우리 상황이 당신 손에 달려 있어요.’ 샬럿이 상황을 타개하는 방법? 남편 조지의 팔짱을 끼고 무도회에 참석하는 것이다.     


  


<브리저튼> 시리즈 제작자 숀다 라임스는 이번 <샬럿 왕비>를 메건 마클과 연결 지어 맥락화하려는 일각의 시도에 대해 <샬럿 왕비>는 메건 마클에 대한 어떤 레퍼런스도 포함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시청자로서 나는 <샬럿 왕비>를 보며 <더 그레이트>를 생각한 만큼 메건 마클을 떠올렸다. 넷플릭스가 바로 작년에 <해리&메건>이라는 다큐 시리즈를 발표했고, 샬럿의 오빠 아돌푸스를 연기한 배우 툰지 카심이 <샬럿 왕비>를 해리와 메건에 비유하는 인터뷰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메건 마클을 떠올리기만 했을 뿐, <샬럿 왕비>와 메건 마클을 하나로 묶어 어떤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피부색과 관련해 메건이 받았던 기이할 정도의 관심과 모욕은 <샬럿 왕비>가 인종을 다룬 방식과 비교할 만큼 전혀 가볍지 않았기 때문이다. <샬럿 왕비>는 인종을 보여주고 언급만 할 뿐, 그에 따라오는 문제에 대한 진지한 의식은 없다. 어쩌면 메건과 샬럿을 연결하려는 일각의 반응에 대해 그 자신이 흑인 여성이기도 한 숀다 라임스가 회의적이었던 이유는, 본인이 만든 세계관에 자조적 태도를 취했기 때문일 수 있다. ‘너희 눈엔 이거랑 이게 같아 보이냐?’ 각종 문제가 ‘오, 사랑, 사랑, 사랑!’에 대한 감탄 속에 얼버무려지는 <브리저튼> 시리즈는 과연 성인을 위한 현대 동화라 할 만하다. ‘영원히 행복하게(Happily Ever After)’에 관한 한, 이 드라마는 앞으로도 시청자를 배반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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