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보이지 않는 질병의 왕국'
** 전자책에 쪽수가 명시되지 않은 관계로 인용페이지는 적지 않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질병의 왕국>은 십 년이 넘는 오랜 시간 동안, 정확한 진단을 받지 못한 채 원인 불명의 고통에 시달려야 했던 작가(메건 오로크)의 경험이 담긴 책이다. 몸에 아무 이상이 없다는 의사들의 확신에 더욱 병들었던 오로크는, 훗날 자신의 증상에 이름들을 붙이게 된다. 하시모토병, 만성라임병, 체위성기립빈맥증후군, 엘러스단로스증후군 등. 그러나 책은 끈질긴 의지로 자신의 병을 찾아 맞서 싸운 어느 환자의 희망찬 극복기가 아니다. 오로크는 고통의 실체와 원인을 파악하지 못해 위로와 공감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의심과 피로의 눈길을 받아야 했던 외로움을 토로한다. “아무도 내 아픔을 알아주지 못하니, 나 또한 나 자신을 일관성 없고 무가치한 존재로 여기게 되었다. 타인에게 위로를 갈망하는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코로나 19가 남긴(남기고 있는) 의뭉스러운 후유증이 여전히 희미하게 들려오는 오늘날, 오로크의 문장은 남다르게 느껴진다. 비단 코로나뿐이 아니라 정확한 병명이 내려지지 않은 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은 늘 질문할 것이다. ‘왜 내가?’ ‘어디가 잘못된 거지?’ ‘뭘 해야 하는 거지?’ 이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 아픈 사람들의 삶이 고단하리라는 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질병과 관련해 세계 어디에나 퍼져 있는 유구한 서사가 있다면, 그건 바로 ‘고통 덕분에 내가 성숙해졌다’라는 긍정이다. 오로크는 이 서사에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하며, 자기 성숙과 같은 가치는 병이 아닌 다른 계기를 통해서도 충분히 깨우칠 수 있다고 말한다. 병을 앓는 동안 자아를 상실했다는 그녀의 고백은(“의심의 여지 없이 자아 같은 것은 존재한다. 내가 잃어버려서 알고 있다.”) 보이지 않는 병에 대한 가벼운 공감을 쳐낸다. 명확하지 않은 고통을 앓는 경험의 언어화. 오로크는 “내 고통으로부터 무언가 유용한 것을 만들어 내고 싶었다. 변화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희망 속에서, 우리 사회가 구하지 못했고 여전히 구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말한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질병의 왕국>은 통증과 외로움을 정직하게 호소하는 문장으로만 채워져 있지 않다. 이 책은 시/에세이가 아닌 인문학 서적으로 분류되어 있다. 작가가 보이지 않는 자신의 병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 의학계의 문제를 파헤쳤기 때문이다. 오로크에 의하면 현대 의학은 “얼마나 조금밖에 알지 못하는지를 인정하지 않는”다. 오늘날 의학이 명료한 학문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19세기에 받아들여진 세균론에서 기인한다. 독일의 세균학자 로베르트 코흐 Robert Koch가 세운 가설-“세균이 모든 사람을 거의 똑같이 아프게 하리라”-이 널리 받아들여지게 됨에 따라, 특정 세균이 특정 질환을 유발하고 감염을 치료하면 병증이 사라진다는 규칙이 세워졌다. 덕분에 “감염병 생존율은 증가했고 평균수명도 늘어났”지만, “의사는 선뜻 검사할 수 없는 질환을 맡으면 그 질환이 정말로 존재하는지 의문을 품게 되었다.” 요컨대 세균이 검출되지 않는 질병이나 세균에 감염되어도 증상이 제각각인 병 앞에서 의사들은 당황하는 것이다.
<노동의 배신>으로 널리 알려진 작가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의료 체계가 의례화되었다고 비판하며(<건강의 배신>), 의사들은 전문지식을 추구해야지 전문성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고 꼬집는다. 그녀에 의하면 전문지식은 “우리가 추구하고 공유해야 할 무언가인 반면 전문성이란-정의대로-엘리트주의적이자 배타적이며, 성차별주의, 인종차별주의 및 계급주의일 뿐이다(120, <우리는 원래 간호사가 아닌 마녀였다>).” 다시 말해 자신이 얼마나 조금 아는지 인정하지 않는 엘리트 의사들은, 증상은 있으나 보이지 않는 병을 마주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오로크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진단받지 못하고, 의사들 만나는 것을 아픈 만큼이나 고통스럽고 지치는 일로 인식했던 이유이다.
오로크는 책의 한 챕터를 확보하여(‘의사는 여성의 말을 믿지 않는다’) 의료계의 성차별 문제를 짚고 넘어간다. 방대한 양의 자료를 근거로 이 문제를 탐구한 바 있던 마야 뒤센베리도 책 <의사는 왜 여자의 말을 믿지 않는가>에서 밝혔듯, 여성의 질병은 대체로 ‘비키니 의학’의 측면에서 탐구된다. 즉, 여성의 아픔은 유방이나 자궁과 연관된 것이 아니라면 경시되는 경향이 있다(47). 이에 더해 프로이트가 남긴 ‘히스테리’라는 거대한 먹구름은 긴 시간, 여성들이 관심을 갈구하는 건강염려증 환자로 비치도록 만들었다. 오로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연구에 따르면 자가면역질환자는 압도적으로 여성이 많다. 게다가 이 질환은 점점 흔해지고 있는데, 혈액 검사로는 초기에 거의 잡아낼 수 없다. 여성 네 명 중 한 명이 자가면역질환에 걸릴 수 있단다. 그러니 합리적 의사라면, 몸이 안 좋고 자가면역질환 가족력이 있는 환자를 맡을 때 이 사람도 그런 환자일 수 있겠네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나는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온 글과 인터뷰한 여성들을 통해, 의사가 별문제 없으니 돌아가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또 들었다.”
인종과 계급 역시 우리의 아픈 몸을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문제다. 현대에 자가면역질환이 증가하는 이유로는, 체내 마이크로바이옴을 망가뜨리는 인공적 환경 탓이 가장 클 것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 더 많이 아프면서도 훨씬 덜 보이는 환자들이 있다. 사회적으로 차별당하고 소외되는 경험은 몸을 빠르게 마모시킨다. 그렇다면 이들의 아픔은 결코 무지나 방종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오로크가 지적하듯, 오늘날 현대 사회는 고통을 개인의 부담으로 돌린다. 네가 아픈 건 애초에 잘 먹고 잘 자며 제때 운동하지 않은 네 탓이라는 것이다. 질병과 환자들의 비가시성은, 비단 의료계의 문제만이 아니다. 우리는 바꿔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누군가의 아픔이, 어쩌면 내 무지 때문일 수 있다고. 이와 관련해 오로크는 작가 존 던의 글을 인용한다.
“누구도 그 자체로 온전한 섬은 아니다.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본토의 일부다. (…) 누구의 죽음이든 나를 작아지게 한다. 나는 인류 전체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는지 알고자 사람을 보내지 말라. 종은 그대를 위해 울린다.”
아픈 몸과, 그것에 수반되는 불편함에 대해 생각한다. 지금은 멀쩡하지만 언젠가 내가 아프게 되었을 때, 내 몸은 얼마나 많은 위로와 배려를 받을 수 있을까. 위로와 배려를 바라는 나를, 사람들은 어린애 취급하며 한심해할까? 그래서 나는 한없이 부끄러워질까? 반대로 지금까지의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부끄럽게 만들었을까? 메건 오로크의 책은 위로를 보내는 동시에 질문한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하느냐고(김승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