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일상적인 것을 낯설게 보이도록 만든다.' 대학생 시절 영문과 비평 이론 수업을 들으면서 열심히 외웠던 문장이다. 원서로 된 교재에 나왔던 문장으로 기억하는데, 누구의 입에서 나온 건지는 모르겠다. 그저 중간고사를 앞두고 '저 말을 시험지 어딘가에 적을 일이 있겠지' 생각하며 머릿속에 담기만 했었다. 무엇보다 저 문장을 암기가 아닌 이해의 대상으로 삼은 적은 없었다.
졸업 후 오랫동안, 심지어 많은 영화와 책을 보고 읽는 와중에도 떠올린 적이 없던 저 문장을 상기하게 된 건, 최은영의 소설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를 읽고 나서였다. 책에 실린 총 7편의 단편은 모두, 최은영의 소설이 이제껏 그러한 것처럼 여성이 여성과 맺고 있는 '관계'를 묘사한다. 장편 <밝은 밤>을 통해 여성들의 연대를 희망으로, 즉 어두운 밤을 통과할 수 있는 밝은 빛으로 그렸던 작가는, 이번 단편들을 통해서는 연대보다 다양한 여성들의 관계를 보여준다. 최은영의 여자들은 기본적으로 서로를 사랑하지만, 사랑에 힘껏 뛰어들지는 못한다. 사랑이 모든 걸 구원할 수 있다고 믿을 만큼 그녀들은 순진하지도 단순하지도 않다. 그들은 안다. 아무리 사랑해도 너는 나와 동떨어진 개인이며, 네가 서 있는 곳과 내가 서 있는 곳의 위치와 풍경이 다를 수밖에 없고, 그래서 내 사랑이, 내 행동이, 내 언어가 때로 너에게 어떤 위로도 될 수 없음을, 그러나 부담은 충분히 될 수도 있음을 말이다.
있잖아요, 선배.
그녀를 부르는 다희의 목소리가 떨렸다. 다희는 한참을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며칠 전에 선배가 다른 선배들이랑 제 얘기 하는 거 들었어요,
언제요?
다희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언제 다희의 이야기를 했는지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저는요, 선배. 우리가 그냥 가는 방향이 같아서 같이 통근했다고만 생각하진 않았어요.
그제야 그녀는 사람들의 말에 대답하던 자기 모습이 떠올랐다. 방향이 같아서 같이 다니는 것뿐이에요. 네? 아니에요. 별 사이 아니에요. 그러게요, 언론고시가 워낙 어렵다고들 하잖아요. 그런가요? 나이가 많아서 아무래도 불리한 부분은 있겠죠. 그래요? 그 친구가 워낙 어른들한테 싹싹하잖아요. 그저 다른 사람들의 말에 형식적으로 답한 것뿐이었지만, 다희가 오해해서 들었다면 달라지는 이야기였다.
다희씨, 전……
이해해요. 여긴 회사잖아요. 제가 선배 입장이었어도 그렇게 말했을 거예요.
다희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내고 있었다. 당신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어요. 내가 왜 그 사람들에게 우리 이야기를 해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목이 따끔거릴 뿐, 그녀는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사실 그녀는 그날 사람들에게 다른 식으로 말할 수도 있었으니까. 다희씨랑은 말이 잘 통해서 친해졌어요. 아, 다희 씨 없는 데서 다희씨 이야기하고 싶진 않은데요. 그렇게 말하면 따라붙을 질문이 귀찮고, 어색해질 공기가 두려워 그렇게 말하지 못했던 것이었으니까.
-'일 년'중 (p.117-118)
최은영이 창조한 주인공들은 거의 모두 삶이 아픔이 될 만큼 예민하다. 그들은 자기를 둘러싼 세상의 부조리에, 사랑하는 사람 혹은 애정하는 것들의 변화에 힘겨워한다. 범인(凡人)인 만큼 그들은 결국 부조리와 변화에 적응하거나 눈을 감지만 다시, 그런 자신의 모습에 자책감을 느낀다. 최은영의 작품을 읽으며 문득 '예술은 일상적인 것을 낯설게 보이도록 만든다'는 말이 떠올랐던 건, 주인공들의 바로 이러한 성향 때문이었다. 그들이 기민하게 공기의 변화를 알아차리고, 크고 작은 일에 상처받으며, 자신이 상처 줄 일에 괴로워하는 모습들은 똑같이 범인에 불과한 내가 애써 덮어두었던 어떤 사실을 직시하도록 했다. 문제에 부딪치며 목소리를 내기보다 조용히 분노를 삭이기만 했던, 그런 내 자신에 점점 익숙해져서 분노조차 느끼지 못했던, 부끄러움조차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것 같은... 이제는 덜 슬퍼하고 더 무신경한, 무뎌진 나.
무뎌진다는 것은 한편으로 세월의 힘을 얻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무뎌진 내가 나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무신경함으로써 타인에게 상처만 준다면? 나는 두렵다. 조금만 더, 내가 함께 울어줄 수 있는 사람이길 바라면서, 내 앞에 있는 최은영의 책을 쓸어본다. 이 안에 담긴 예민함이 내게도 조금 스며들기를. 이 날카로운 문장들이 내 안에서 살아나기를.
나는 언니를 보잘것없는 사람이라고 여겼어. 멍청해서 이용당한다고 생각했고 쓰레기 같은 남자에게 휘둘리는 겁쟁이라고 생각했어. 불행에 주저앉은 채 탈출할 생각도 하지 않을 정도로 수동적인, 그래서 나를 부끄럽게 하는 인간이라고 판단했어. 그런 식으로 살아서 나에게 굴욕감을 준다고 믿었지. 언니가 과연 내 마음을 몰랐을까. 그때의 나는 내가 꽤나 마음을 잘 숨긴다고 생각했었어. 마음의 밑바닥까지 훤히 보이는 언니와는 다르다고 자부했지. 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였는지도 몰라.
내 마음 안에서 나는 판관이었으니까. 그게 내 직업이었으니까. 나는 언니를 내 마음의 피고인석에 자주 앉혔어. 언니를 내려다보며 언니의 죄를 묻고 언니를 내 마음에서 버리고자 했지. 그게 내가 나를 버리는 일이라는 걸 모르는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