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회 여성인권영화제] 영화 "뼈아픈 진실"

전형에서 벗어난 여성의 용기 있는 싸움

by 이희구
Home Truth_2.jpg <뼈아픈 진실> 스틸컷. 사진 속 주인공은 제시카다.


영화가 시작하면 임신한 제시카의 모습이 담긴 홈비디오 영상이 나온다. 남편 사이먼의 다정한 목소리가 간간이 들리는 가운데, 남편의 카메라를 쳐다보는 제시카의 표정은 행복해 보인다. 아들 제시와 이후 태어난 세 명의 딸. 아이들을 향한 사이먼의 애정은 영상 밖으로도 전해질만큼 넘쳐흐른다. 하지만 아이들이 자라고 세월이 흐르면서 영상에는 불길한 기운이 감지된다. 아내와 아들에 대한 폭언. 화면에서 제시카는 미소를 감추고 등을 돌려 사이먼에게서 멀어진다.


이후 현재의 제시카가 직접 카메라 앞에 나서서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수년에 걸쳐 정신적 학대를 저질렀던 사이먼은 급기야 자살을 시도하기에 이르렀고, 이후 제시카가 이혼을 요구하자 협박과 스토킹을 저질렀다. 제시카는 접근금지 명령을 얻어내지만, 사이먼은 이에 굴하지 않고 세 딸을 납치해 사라졌다. 아이들을 잃은 제시카는 혼비백산하여 경찰에 신고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뭐가 문제입니까,” “애들 아빠고 접견권도 있잖습니까” 따위의 말들이었다. 결국 그 날, 제시카가 경찰에게 아이들을 찾아달라 호소하고, 경찰은 그 말을 묵살했던 그날 밤, 제시카의 세 딸은 주검이 되어 엄마의 품으로 돌아왔다. 이 이야기는 실화다.


여느 감독이었다면 이 이야기를 접했을 때 갑자기 사이코패스로 돌변한 아버지/남편으로 인해 가족이 무너지는 한 편의 스릴러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혹은 무엇이 그를 살인마로 만들었는가, 에 초점을 맞추며 한 편의 사회드라마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영화, <뼈아픈 진실>(2017)의 감독 카티아 매과이어와 에이프릴 헤이스는 사이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극화하는 데에도, 제시카의 처절한 아픔을 전시하는 데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보다는 제시카의 이후 행적을 쫓으며 그녀의 삶과 사회의 반응을 기록하기로 결심했다. 왜냐하면 현실의 제시카가 행정명령을 집행하지 않은 경찰의 무능을 비판하며 소송을 진행했기 때문이다.



directors.jpg 영화의 감독 카티아 매과이어(왼쪽)와 에이프릴 헤이스(오른쪽)


제시카의 변호사 브라이언 리첼은 “의무 체포 법은 경찰이 가정폭력을 집안일이라고 내버려 두지 말고 여성들의 죽음을 막으라”고 만들어진 것이라며, 자신의 의뢰인에게 일어난 일을 “가당치도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경찰과 국가, 사법 시스템의 얼굴은 제시카에게 그처럼 동정적인 얼굴을 내비치지 않는다. 냉정하고도 엄숙하게 말할 뿐이다. 당시 사이먼의 체포 여부는 경찰의 재량에 달려있는 문제였으며, 그들이 모든 범죄를 예방할 수는 없는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법이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까닭은 피해자가 아닌 경찰의 입장을 우선시했기 때문이며, 피해자가 겪은 일이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매과이어와 헤이스가 시나리오를 쓰지 않고 카메라만 든 채 그대로 현실을 기록하는 데 뛰어든 이유다. 두 사람은 제시카에게 일어난 사건의 본질이 어느 유별난 개인의 악한 심성이 아니라 사회의 시선에 있다고 보았다. 가정폭력은 개인들의 문제라는 시선. 카메라는 이 폭력적 시선에 도전하는 제시카와 함께 호흡하며 그녀에게 일어나는 사건들을 차분히 기록한다.


<뼈아픈 진실>은 2020년의 대한민국에게, 적어도 여성들에게는 그리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아니, 정확히는 익숙한 이야기이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성에 대한 갖은 폭력이 가시화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가정폭력은 모든 사람에게 경종을 울리는 심각한 범죄가 아니다. 2020년 2월 방영을 시작해서 4월에 종영했던 국내 드라마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는 주인공 목해원의 삶을 통해 가정폭력의 문제를 다루었다. 해원의 엄마 명주는 남편에게 수년간 맞고 살았는데, 어느 날 이를 목격한 명주의 동생 명여가 우발적으로 형부를 죽이고 만다. 성인이 되어 이 사실을 알게 된 해원은 엄마와 이모를 용서할 수 없다며 “그래도 아빠잖아”라는 말을 한다. 아무리 엄마에게 손찌검을 했어도 자신에게는 좋은 아빠였다는 뜻이다. 이것이 엄마의 피해를 보고 자란 자녀가 엄마에게 할 수 있는 대사일까? 그러나 우리는 피해자의 입장에 서지 못하는 빈곤한 상상력을 현실에서도 계속해서 마주하고 있다. 얼마 전 김민석 pd가 한겨레에 기고했던 글(「지식인의 진짜 책무」)은 목해원의 현실판이었다. 그는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휘두른 폭력을 책을 많이 읽은 어머니가 지식인다운 넓은 아량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단편적인 사건들만이 전부가 아니다. 코로나 이후 가정폭력이 줄어들었다는 여러 언론의 기사는 그 이면을 생각하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면면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다. 때문에 <뼈아픈 진실>에서 제시카가 경찰의 방관이 자신과 딸들의 기본권 침해로 이어졌다고 주장하는 부분은 여러 사건들 속에서 분노와 좌절을 반복한 내게 통렬한 감각을 선사했다.



Home Truth_4.jpg <뼈아픈 진실> 스틸컷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 영화가 훌륭한 건 피해자의 권리에 대해서 설파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내게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제시카라는 여성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미지는 처음 ‘비극적인 일을 겪은 엄마’에 국한되지 않는다. 여성학자 권김현영은 “페미니즘은 여성을 피해자로만 여기는 바로 그 생각과 싸워왔다”고 말하는데(『코로나 시대의 페미니즘』 43), 극 중 제시카는 그 말을 그대로 옮긴 듯한 모습으로 내내 등장한다. 카메라 앞에서 과거를 담담하게 읊는 그녀를 보며 그 용기와 담대함에 감탄을 금치 못했던 건 분명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뿐인가. 그녀가 종아리에 타투를 새기고 미소를 짓는 모습을 보면 어느샌가 앞의 일은 잊고 살포시 웃게 되기도 한다. 물론, 영화는 제시카의 아들 제시의 증언을 통해 모자(母子)의 삶이 전혀 순탄치 않았음을 분명히 한다. 하지만 극 중 제시카의 미소, 눈물, 무표정, 분노, 용기, 그리고 제시에 대한 사랑과 모순된 감정들을 죽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그녀를 그 무엇으로도, 그러니까 단 하나의 이미지로 설명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아마 <뼈아픈 진실>이 중요한 사건을 기록한 것 이외에 영화적으로 성취해낸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지점일 것이다. 피해자로서나 어머니로서나 모든 전형에서 벗어나 있는 이 여성의 싸움이 궁금한 이들에게 필람을 권한다.





* 위 영화는 2020년 12월 1일 개막하는 14회 여성인권영화제의 상영작으로, 개막 이후 온라인에서 무료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 또한 이 글은 14회 여성인권영화제 웹기자단 피움뷰어 활동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 *위 글은 본인 블로그(https://blog.naver.com/castleinthetrees)에도 올라온 글임을 밝힙니다.


제14회 여성인권영화제 개요

●슬로건: 우린 흔들리지 않지

●기간: 2020년 12월 1일(화)~10일(목)

●장소: 온라인 상영관 (추후 공개 예정 / 전편 무료 상영)

●주최: (사)한국여성의 전화


http://theater.fiwom.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