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2007년 발굴된 왕궁 정원은 익산 왕궁리 유적 중 백미로 꼽힙니다. 발굴단은 2003년 12월 근래 들어선 400평 규모의 무덤을 이장하고, 2004년 9월 정원 유적 발굴에 착수해 11월 괴석을 발견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정원의 극히 일부만 확인한 상태여서 유적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2005년 5월 동서 50m 길이의 대형 저수조가 확인되면서 비로소 왕궁 정원의 실체가 드러났습니다. 저수조 역시 아름다운 괴석으로 장식돼 있었고, 물을 수조로 끌어들이는 길은 판석으로 이어져 있었죠. 돌을 이용해 산을 표현한 석가산(石假山) 정원은 보통의 관부에서는 볼 수 없는 호화 시설입니다.
특히 2006년 11월 저수조 서쪽 바깥에서 발견된 어린석(魚鱗石) 2점은 이름처럼 물고기 비늘을 닮아 신비한 느낌마저 주는 조경석으로 유명합니다. 국내 고고 유적에서 어린석이 확인된 것은 처음입니다. 이를 발굴한 전용호 학예연구관은 “무르고 연해서 처음에는 흙을 뭉친 것으로 착각했다”며 “각력암 계통인데 워낙 희귀해 백제 왕실이 중국에서 수입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습니다.
2016년에는 왕궁리 유적 근처에서 왕궁 외부를 잇는 7세기 백제시대 도로(왕경 도로 1개, 임시 도로 2개)가 발견됐습니다. 왕경 도로는 너비가 4.9m로 백제 정전 유적에서 불과 500m가량 떨어져 있었습니다. 앞서 부여에서도 너비 9m의 왕경 도로가 나왔습니다. 마치 지금의 포장도로처럼 강돌과 자갈, 진흙으로 바닥을 다지는 ‘노체(路體) 공법’으로 길을 닦았습니다. 이 공법이 적용된 도로는 내구성이 좋아 무거운 수레도 버틸 수 있습니다.
임시 도로에서는 수레바퀴 자국(차륜흔)과 수레를 끈 마소의 발자국이 발견됐습니다. 왕궁리 왕경 도로는 백제가 익산에 시가지를 조성했음을 보여줍니다. 박순발 충남대 명예교수(고고학)는 “백제가 익산에 단순히 궁궐만 세운 게 아니라 도성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각종 인프라도 깔았음을 알 수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왕궁리 유적은 우리나라 최장 발굴조사 현장이지만 아직 밝혀지지 않은 내용이 적지 않습니다. 발굴허가 면적의 한계로 관청가(官廳街)를 추가로 확인하지 못한 것도 그 중 하나입니다. 조선시대 경복궁과 더불어 광화문 앞 육조(六曹)거리에 주요 관아가 모여 있었던 것을 연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최맹식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은 “궁성과 연계해 좀 더 넓은 지역을 발굴조사하면 관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며 “민속학 조사도 병행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학계는 왕궁과 관가 유적 어딘가에 목간(木簡) 형태의 행정기록이 묻혀있을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왕궁리 궁장 아래 배수로 주변에 저습지가 형성돼 있어 목간이 남아있을 가능성이 높은 곳으로 지목됩니다.
미륵사지, 쌍릉, 토성(土城) 등 익산에 산재한 백제 유적들과 왕궁리의 관계성을 밝히는 연구도 시급합니다. 특히 삼국사기에 언급된 보덕국이나 삼국통일 이후의 역사기록을 고고자료와 연계시키는 작업도 필요합니다. 예컨대 삼국사기에 태종무열왕대 금마(현 익산) 사찰 내 우물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는데 이 우물을 찾으려는 시도도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발굴 현장처럼 왕궁리에서도 여러 시대의 문화층이 중첩돼 발견됐습니다. 특히 정원 유적에서 민무늬토기 조각이 출토돼 이곳에 선사시대 유적이 깔려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학계는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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