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고한 인문학적 지식이 기계와 인간을 공존케 한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용어가 몇 년 전부터 많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다.
나는 사실 크게 관심이 없었다. 애초에 내 분야가 인문학인 것도 있었고, 그런 것들을 신경 쓰기보다 나 하나 챙기기에도 급급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모르는 사이 그 용어는 점차 외부적인 것에서 시사상식이 되었고, 블록체인과 비트코인이라는 희대의 사건(?)으로 폭발적으로 퍼져나갔다.
네이버 지식사전에서는 4차 산업혁명을 아래와 같이 정의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은 물리 세계, 디지털 세계, 그리고 생물 세계가 융합되어, 경제와 사회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치게 하는 새로운 산업시대를 말한다. 1차 산업혁명의 기계화, 2차 산업혁명의 대량생산화, 3차 산업혁명의 정보화에 이은 4차 산업혁명은 물리 사물인터넷(IoT), 로봇공학, 가상현실(VR) 및 인공지능(AI)과 같은 혁신적인 기술이 우리가 살고 일하는 방식을 변화시키는 현재 및 미래를 의미한다. 디지털 혁명(Digital Revolution)이라고 하는 3차 산업혁명이 일으킨 컴퓨터와 정보기술(IT)의 발전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는 형태이지만 발전의 폭발성과 파괴성 때문에 3차 산업 혁명이 계속된다고 하기보다 새로운 시대로 여겨진다. 참고로 독일에서는 산업 4.0(Industry 4.0)이라고 명명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4차 산업혁명 [Fourth Industrial Revolution]
(시사경제용어사전, 2017. 11., 기획재정부)
이 용어만 보면 과연 4차 산업혁명이 인문학과 큰 접점을 가지게 될까, 라는 의문이 더욱 증폭될 뿐이었다. 최근 인문학에 관심이 많이 사그라들고 <고상한> 영역이 된 이후로는 도리어 인문학을 깎아내리는 현상도 벌어졌다. 내가 고등학생 때만 하더라도 이공계에 학생들이 모자라 한 반에 10명 남짓 했던 때도 있었건만, 지금은 도리어 그 반대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유행은 돌고 돌듯 기술의 발전이나 학문의 유행도 돌고 돈다. 실제로 약 10년이 지난 지금은 다시금 인문학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지만 학문 자체를 괄시하는 태도는 여전하며 인문학적 지식을 철학가의 이름이나 소설 내용, 시사상식과 같은 1차원적인 것으로만 치부하는 사람도 많다.
4차 산업혁명은 현대 기술의 집약체이다. 기계가 도처에 깔리고 이른바 간접적인 사이보그 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무방하다. <PSYCHO-PASS>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기계로 만든 장기를 이식한 한 사람이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그 세계는 2110년 대지만) 사람들이 스마트폰이나 인터넷 기술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세계가 되었으니 직접적으로 기계 장기를 이식하지 않았어도 그것이 사이보그가 아니면 무엇이냐는 다소 뼈를 때리는 언급을 한다. <사이버 치매>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듯 우리는 기계에 의존하며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하는 길을 택하고 있다.
이처럼 4차 산업혁명이 <인간의 기계화> 과정이라고 한다면,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관점, 그리고 4차 산업혁명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가 매우 중요해진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기계에게 지배당하는 것>이나 <기계를 지배하는 것>이 아닌, <기계와 공존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과거 전자책이 나왔을 때 조만간 종이책은 사라질 것이라는 예측을 한 사람들이 있었다. 텔레비전이 나오자 영화나 연극이 사라질 것이라는 말도 있었고 산업혁명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해지자 수제 산업이 사라질 것이라는 말도 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신기술이 나오더라도 기존의 기술을 100% 대체하지 못할 뿐 아니라 기존 기술이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나가 도리어 그 비율을 유지하는 현상도 벌어지고 있다. 현재 영화나 연극은 그 기술력을 더욱 키워 텔레비전으로는 맛볼 수 없는 현장감을 주는 쪽으로 발달하였으며 종이책이나 수제 물품은 고급화가 진행되어 더욱 비싸고 질 좋은 쪽으로 발전하고 있다. 가수들의 음반도, 과거에는 듣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다면 최근에는 모으는 것으로 그 역할을 바꾸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이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거나 사회구조를 혁신적으로 바꾸진 않을 것이다. 다소 충격은 줄 지라도 그것은 자연계에 새로운 종이 나타나 먹이사슬을 바꾸는 것과 비슷한 식으로 진행될 것이다. 새로운 종이 나타난다 해서 그 자연계에 있는 모든 종의 구조를 송두리째 바꾸진 않는다.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종도 있을뿐더러 그것과 인접한 종이라 하더라도 강한 자들은 살아남아 또 진화한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먹이 사슬은 다시금 안정을 되찾게 된다. 그들은 <공존>하며 자신들만의 영역을 재구성하게 된 것이다.
<포켓몬스터>라는 게임/애니메이션 시리즈가 있다. 1990년도 후반에 우리나라에 정식 수입되어 상당한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지금도 새로운 시리즈가 나오고 있는 장수 시리즈인데, 여기에 어떤 포켓몬으로든 모습을 바꿀 수 있는 <메타몽>이라는 아이가 있다. 껌처럼 흐물흐물한 외형에 점처럼 작은 눈, 늘 웃고 있는 입 때문에 지금도 상당한 인기를 얻고 있는 이 포켓몬이, 추후 4차 산업혁명을 이끌어 갈 열쇠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우스갯소리로 <메타몽 같은 사람이 되자>고 한다.
4차 산업혁명의 모습은 아직까지 예측 불가능하다. 기계는 계속 발전하고 있으며 인공지능은 날마다 그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여전히 한계는 존재한다. 그들은 너무나 완벽한 나머지 <불완전함>이나 <다양성>을 가질 수가 없다. 기계에 있어서 <불완전함>이란 고쳐야 할 버그와 같은 존재이며, <다양성>을 가지게 하려면 개개의 기계를 이루는 코드를 전부 다르게 만들어야 한다. 설령 변수를 통해 다양하게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준비된 탬플릿의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열 개의 기계를 열 개의 개성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리면 추후 유지보수가 상당히 힘들어진다. <기계에게 힘든 일은 인간에게 쉽고 인간에게 힘든 일은 기계에게 쉽다>는 <모라벡의 역설>이, 4차 산업혁명을 대비할 큰 열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4차 산업혁명에서 인간은 어떠한 영역에서도 자신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얕고(깊으면 더욱 좋지만) 넓은 지식을 가지고 어떠한 환경에서도 적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옛날처럼 전공분야에만 정통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자신이 주특기로 하는 분야를 가운데 두고, 그것과 인접한 다른 분야를 살펴보며 자신의 주특기를 그 분야에 어떻게 접목시킬지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셰프는 옛날처럼 요리만 잘해서는 성공하기가 힘들다. 요리에 대한 철학이 확고해야 하며 음식 데코레이션이나 가게 디자인을 통해서도, 또 평소 행실을 통해서도 그 철학이 일관적으로 드러나야 한다. 요리란 <눈으로 즐기는 것>이라는 철학을 가진 사람이 정작 식당에서 만드는 요리가 디자인도 신경 쓰지 않고 그냥 맛있으면 된다는 식으로 나온다면 손님들 대부분은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물론 그 두 가지 철학(요리는 눈으로 즐기는 것, 요리는 맛있으면 되는 것)이 분리되어 있는 경우도 충분히 가능하다만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쉬이 잊히며, 저런 멋들어진 말도 그저 돈을 벌기 위한 <연기>나 <거짓말>로 치부되어 호감을 얻기가 힘들어지고 결국엔 경쟁력이 떨어져 도태될 수밖에 없다. 이런 것들을 지키면서 디자인 이전에 요리 실력이 어느 수준 이상은 되어야 하며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된 오리지널리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냉장고를 부탁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딱딱하고 요리만 잘하는 사람들이라던 셰프의 이미지가 확 바뀌며 쿡방이 대세를 이룬 적이 있다. 그들이 인기를 끈 이유는, 그저 요리만 잘하는 사람들이라는 이미지를 떠나 그들 자신이 가진 확고한 철학이 있으며 그것이 평소 캐릭터로써 잘 어우러질 뿐 아니라 요리를 통해서도 잘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방송인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인정받는 셰프이며, 활동 영역이 넓어지면서 쿡방이 다소 사그라든 지금도 다른 영역에서, 방송인 혹은 셰프로써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확고한 철학과 자신의 주 분야를 잘 살려 바뀐 환경에 적응하였고 추후 그 환경이 바뀌어도 꿋꿋하게 살아남게 되었다. 강물 바닥에 확실하게 꽂은 나뭇가지는 제 아무리 강물이 거 세진 다한들 영향을 크게 받지 않지만 어중간하게 꽂혀 있는 나뭇가지는 강물이 조금만 거세지면 바로 휩쓸려 버린다. 그들은 확고한 나뭇가지처럼 확고한 철학을 중심으로 영역을 확장했고, 쿡방 인기가 사그라들고 급격하게 바뀐 예능 판도에서도 나름의 영역을 고수하며 잘 적응하고 있다.
관계가 없는 글을 이래저래 늘어놓은 꼴이 된 듯 하지만, 결국에는 이것이다.
4차 산업혁명은 결국 기계와 인간의 공존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기계는 개성이 없고 완벽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기계와 달리 개성을 가지고 불완전해야만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공존하며 살 수 있다. 불완전하다는 것은 실력이 떨어지는 것이 아닌, 어느 분야에도 즉각적으로 적응하고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물론 중심 자체가 바뀌면 안 된다. 정말 잘하는 주요 분야를 가운데 두고 그것을 중심으로 다른 가지들을 접붙여 확장해나갈 수 있어야 한다. 확장 가능성이 없는 딱딱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은 결국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도태될 것이다.
그리고 그 많은 가능성과 확장 영역은 비단 자연과학이나 컴퓨터 지식뿐 아니라 인문학을 통해서도 가능하다. 특히나, 정해진 답이 없는 <인문학적 관점>은 더욱이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하기 더욱 좋은 지식 기반이다. 답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은 마치 지점토나 찰흙처럼 자신이 원하는 모양으로 빚을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 인문학적 지식은 단순히 철학가의 명언이나 시사상식을 외우는 1차원 적인 것이 아니다. 그 철학가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그리고 그 말에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 근거는 무엇인지, 자신이라면 그 말을 어떻게 바꾸어서 했을지에 대한 해석 기관을 갖는 것이 진정한 인문학적 관점이다. 기계로 따지자면, 독자적인 <디코더>(해석 기관)를 통해 들어온 신호(지식)를 어떻게 처리하는지와 같은, 확고한 관점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단순히 토익이나 토플, 자격증을 위해 영어공부를 하고 지식을 쌓는 시대는 끝났다. 특정 영역만을 위한 지식의 시대는 끝났다. 그 지식들은 추후, 정말 삶을 살다 보면 언젠가 당신의 해석 기관을 이루는 양분이 되어 충분히 쓰일 수 있을 것이다. 대학에서 원치 않는 교양 과목을 듣는 학생들, 그리고 인문 강좌를 듣는 분들, 그 모든 지식이 자신을 이루는 양분으로 쓰일 가능성이 있다. 우리가 보고 듣는 모든 것은 모두 의미가 있다. 어느 날 정말 뜬금없이, 기억 한편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지식이 막혀 있던 사고방식을 뚫는 요소로 작용할지 모른다. 단순히 학점을 위해, 시간을 때우기 위해, 특정 목적만을 위해 소비되는 지식은 이제 없다. 토익과 토플이 영어를 공부하기 위한 지식이 되며, 자격증을 위해 공부하던 한국사가 현재 사회나 문화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는 관점을 제공하기도 한다.
이미 기계가 우리 생활을 많이 침범한 이상 4차 산업혁명은 정말 코 앞까지 다가와 있을지도 모른다. 그 과정에서 기계에 휩쓸리지 않고 공존하기 위해서는, 기계와는 다른 영역을, 즉, 인간의 가능성을 극도로 끌어올려 그 바닥 깊숙이 자신의 존재와 철학적 기반을 꽂아 넣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아직 미숙한 병아리 인문학자로서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아래와 같이 정의하고 싶다.
4차 산업혁명은 인간의 삶에 기계가 크게 관여하여 공존하는 시대이자, 기계가 갖지 못한 (혹은 갖기 힘든) 불완전성과 다양성을 무기로 어떠한 환경에도 즉각 반응하고 확장하며 적응할 수 있는 유연한 지식적 기반을 마련해야만 하는 시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