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캣테일 Aug 22. 2019

유리벽 공간에 사는 사람들

기본적인 도덕적 관념이 결여된 인터넷 공간의 커뮤니케이션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를 보다 보면 정말 온갖 군상들을 다 만나게 된다.

  진지하게 자신의 사상을 논하는 사람, 그림을 올리는 사람, 단순히 놀이의 장으로 생각하여 온갖 농담이나 때로는 저질 농담(?)을 하는 사람, 창작 음악이나 동영상을 올리는 사람, 가게를 홍보하는 사람. 하지만 내가 느낀 최근 SNS 기능은 다름 아닌 의견 전파이다. 한때는 장점이라고 느꼈던 SNS, 특히 트위터의 이러한 기능은 커다란 전제 하에 성립되었건 것이거늘 그 전제가 없는 현재는 그저 제동 장치가 망가진 폭주 기관차나 다름 없어졌다고 생각한다. 그 전제란 바로, 정보의 취사선택과 판단이 가능하며 그 정보에 관한 책임 의식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과거형이다. 상술했듯 현재 인터넷 커뮤니티나 SNS에는 이런 제동장치가 없다. 간단히 말하면 <사회성>과 <배려>가 결여되어 있다. 인터넷 공간, 심지어 게임에서도 욕이 난무하는데, 이런 곳에 아니라면 스트레스를 어떻게 푸냐는 말을 들을 때마다 향후 인간성이 어떻게 될지 참 궁금하기도 하다. 인터넷이나 SNS, 게임을 하는 사람들도 똑같은 인격체이거늘, 그 인격체들에게 하는 욕설이나 비난이, 그 사람이 이상한 말을 해서, 혹은 게임을 못해서라는 이유로 정당화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사례를 볼 때마다, 이 사람들이 정말 같은 <사회적 동물>로써의 인간이 맞을까라는 철학적인 질문에까지 다다르게 된다.


무수한 유리벽이 설치된 광장, 그리고 실존하지 않는 <나>

  이따금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는 지인과, 인터넷이나 SNS는 커다란 광장과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사방이 뻥 뚫린 광장에 투명한 유리벽을 세운 후 그 안을 자기 마음대로 꾸민다. 소파를 두어도 되고 꽃을 달아도 되며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의 그림을 붙여도 된다. 하지만 주변이 온통 유리이므로 자신의 행동이 누군가에게 여과 없이 보일 수 있다. 만일 그것이 싫다면 자물쇠를 걸어서 (비공개, 프로텍트 설정) 자신이 허가한 사람들과만 소통을 할 수도 있다. 유리벽으로 따진다면 주변에 커튼을 치거나 벽지를 발라 밖에서는 보이지 않게 만들고 초인종을 눌러 자신이 허락한 사람만 집 내부를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 안에선 무엇을 하든 상관없다. 거추장스러운 옷을 전부 벗어던지고 자연의 상태로 있을 수도 있으며 우울한 이야기를 여과 없이 내뱉을 수도 있다.

유리공간은 SNS에서 더욱 확고해졌지만 여전히 추상적이다.

  SNS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ocial Network Service)>의 줄임말로, 사회(Social)적인 기본 상식을 기반으로 돌아가는 인터넷 공동체이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를 통해 삶을 영위하며 확고한 자아를 구축해간다. 옛날에는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았던 이러한 인간의 소통 행위는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발달로 그 간극을 축소하고 있다. 하지만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사실은 곧 스스로를 내보이지 않아도 된다는 익명성을 강조하게 되었고 이는 책임의 주체가 사라진다는 것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현실에서의 발화 주체는 실존하는 <나>이며 그에 따른 책임도 결국 <나>의 것으로 귀속된다. 하지만 발화 주체는 존재하나 그것이 실존하지 않는 인터넷 공간의 <나>는 언제든지 나타나고 사라질 수 있으며 결국에는 <책임>의 주체도 얼마든지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온갖 비아냥과 무차별적인 비난, 혐오 발언, 우리가 소위 악플이라고 부르는 악성 댓글이 판치는 이유도 이러한 <책임> 주체의 증발과 연관되어 있다. 이들은 유리 공간 안에서, 개인의 공간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데 댁들이 무슨 상관이냐고, 싫으면 보지 말라고 도리어 화를 낸다. 마치 채팅방에 들어가서 <혼자 있고 싶으니 다들 나가주시죠>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일단 저 상황 자체가 굉장히 오만하며 <배려>란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가 없다. 애초에 실존하는 <나>가 존재하지 않으니 거기에는 그 보편적인 도덕 및 윤리적 기준도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 말, 현실에서 똑같이 할 수 있습니까?

  나는 SNS나 인터넷, 게임 등지에서 발설하는 내용, 적어도 공개된 상황에서 했던 말은 사회에서도 할 수 있는 말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일 내가 어떤 기업의 인사 채용담당자가 된다면, 면접 대상자에게 이 질문은 꼭 할 것이다. 당신은 SNS나 인터넷에 쓴 댓글, 게임 내에서 한 말을, 지금 우리나 그 내용의 당사자 앞에서 떳떳하게 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댓글에 쓴 내용의 근거는 무엇입니까,라고. 내 추측상, 대다수 사람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될 것이다. 일단 자신의 신념에 근거한 발언 이기는 해도 충분한 고찰을 통하지 않은 1차원적인, 특히 감정에 기반한 의견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난 이것을 우스갯소리로 <척수 반사 글>이라고 부른다. 설령 인터넷이나 SNS 댓글이 공격적이어도 그것이 자신의 확고한 신념과 정확한 근거에 기반하고 현실에서도 똑같은 말투로 할 수 있다는 배짱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람을 기꺼이 채용할 것이다. (하지만 일단 내가 인사채용 담당자가 될 확률이 현재로썬 극히 낮으므로 이런 일이 일어날 확률은 극히 적지만 말이다) 물론 인격적으로 문제는 있을지언정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들보다는 곱절은 더 낫기 때문이다.


결국 실존하는 <나>의 부산물이 아닌가요?

  하지만 인터넷에 글을 쓰는 사람은 현실과는 다른 페르소나이자 캐릭터이므로, 양자가 분리되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이것이 한때 댓글이나 글을 투고할 때 실명이 뜨게 한다는 <인터넷 실명제> 찬반 논쟁을 불러왔다.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이유로 폐기 수순을 밟았지만, 결론적으로 그 페르소나나 캐릭터 역시 그 사람의 인격 됨됨이, 즉 변치 않는 그 사람의 중심에서 파생된 것임을 생각하면 그 사람을 판단하는 재료로써 쓰여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순수하게 다른 캐릭터를 연기하며 정해진 사람들끼리 노는 장면이 아니라면, 말투나 내용은 그 사람의 중심 기반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제동 장치가 망가진 유리 공간의 <나>

  이처럼 인터넷 공간 및 SNS의 개인 공간이라고 할지언정 불특정 다수에게 보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지해야 한다. 상술하였듯 공개된 계정에서 떳떳하게 욕을 쓰고 혐오 발언을 일삼으면서 개인 공간인데 무슨 상관이냐고 소리치는 것은, 유리벽 안에서 옷을 다 벗고 온갖 반사회적 행동을 하면서, 여기는 개인 공간인데 무슨 상관이냐고 소리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조금 강하게 말하면, 기본적으로 사회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조차 든다. 그리고 그것이, 인터넷이니까 용인될 수 있다는 안일한 판단에 근거한 것이라면 더욱 악질이다. 인터넷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해도 되는 공간이라는 사고방식에 근거한 그러한 생각 역시 그 사람의 도덕 및 윤리 수준을 여과 없이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인간 문명사회 전체에 통용되는 기본적인 룰이 있다. 이것은 개개의 사회 및 문화 위에 존재하는 레이어, 조금 난해한 말로 메타 레벨에 존재하는 것인데, 타인을 배려하고 품위를 지킨다는 것이 여기에 속하며 이것은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가지는 가장 기본적인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기초적인 것조차 잊혀진 인터넷상의 커뮤니케이션은, 다소 위험한 수준에 도달해 있는지도 모른다.


책임을 회피하는 유리벽 사람들

  내가 유명한 상태에서 이런 글을 썼다면, 이메일이나 메시지를 통해 온갖 욕설(?)이나 반말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지 말라며 항의가 들어올 것이 뻔하다. 하지만 나는 그 어디에도 표현을 하지 말라는 말은 쓰지 않았으며 오직 그 표현에 <책임>을 지라는 말을 반복했다. 자신이 하고픈 행동이나 말을 하고서 그것에 대해 비판이나 반박이 들어오면 곧바로 글을 지우고 도망치거나 표현의 자유를 들먹이는 장면을 나는 수없이 봐 왔다. <표현의 자유>에는 반드시 <책임>이 뒤따른다. 이 책임이란, 그 발언과 행동을 수습할 수 있으며 뒷받침할 근거나 논리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한때 <키보드 워리어>라는 용어가 유행한 적이 있다. 인터넷에서 신나게 반대하고 비난하던 사람들에게, 그렇게 불만이 많다면 직접 만나서 하라며 모 국회의원이 자리를 마련했는데, 정작 그 자리에 간 사람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못 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키보드 워리어>라는 말 대신 <방구석 여포>라는 말을 자주 쓰곤 하는데, 이런 유행어가 지속적으로 나온다는 사실 자체가, 아직도 인터넷상의 <기본 매너>가 확립되지 않았음을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유리공간에서는 용맹한 맹수이지만 실제로는 귀여운 고양이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기본 매너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기본 매너와 통용된다. 현실에 속한 공동체에서 혐오 발언이나 비하 발언을, 특정 사람들 앞에서 중상모략을 떳떳하게 할 수 있다면 인터넷이나 SNS에서도 얼마든지 해도 된다고 생각하지만, 우선 현실 자체가 혐오 발언이나 비하 발언을 용인하지 않는다. 그런 고로 만일 정말로, 어떻게 해서든 저런 말을 하고 싶다면 사방이 막힌 공간에서 하면 된다. 아는 사람들끼리만 있는 계정을 만들거나 현실에서 그 사람들끼리만 모였을 때 하거나 일기장을 하나 사서 그 안에 쭉 써 내려가도 괜찮다. 게임을 하다가 화가 난다면 혼자 욕을 하거나 소리를 지르면 된다. 인간은 이런 부정적인 감정을 어떻게든 소모해야 하기 때문에 이런 행위 자체가 나쁘다고 하진 않겠다만, 사회적인 관점에서 그 사람들 혹은 불특정 다수에게 피해를 주지는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1990년도 후반 인터넷이 보급되고 네티즌이라는 용어가 생길 때에는, 인터넷을 통한 순기능이 더 클 것이라 생각했지, 이런 당연한 인간 사회적 상식까지 긴 글로 써야 하는 시대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기본적인 인간 사회적 규칙에 따라 배척하거나 혐오하지 않으며 배려를 한다는 것은 결국 서로의 관점을 이해하고 존중해준다는 것이거늘, 왜 이런 기본적인 것을 지키기 힘든 것인지. 사회가 팍팍해지고 스트레스를 풀 곳이 없어지기에 얼굴을 직접 마주하지 않는 불특정 사람들에게 풀게 되었다는 외부적 요인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많지만, 그것이 곧바로 이런 행위를 정당화할 순 없다.

  우리는 유리벽으로 만들어진 개인 공간에서, 설령 누군가에게 보여도 떳떳할만한 말을 하고 있는가? 그 유리가 깨져서 현실로 빠져나오더라도 그 유리 공간 내부에서처럼 당당해질 수 있을까?

작가의 이전글 <4차 산업혁명>과 인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