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사라진 비밀 레시피
나는 찜 요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생선류는 잔가시를 제거하다 보면 음식 자체가 다 부스러져 먹기 어렵고 육류 역시 입 안에서 뼈를 제거해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튀기거나 구웠을 때도 가시나 뼈가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우선 손에 양념이 묻지 않으므로 사정이 훨씬 나았다. 다들 돼지갈비찜이나 소갈비찜, 닭볶음탕과 같은 요리를 좋아하며 먹을 때 나는 묵묵히 살코기만 골라 먹거나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는 국물에 밥을 비벼 먹곤 했다. 맛이 없지는 않다. 단순히 먹기 번거로울 뿐이다. 옆에서 뼈나 가시를 다 발라준다면 모를까, 서른이 다 된 나이에 누군가가 옆에서 줄곧 해 주는 모습도 참 가관일 듯싶었다. 이 가시나 뼈에 관한 번거로움은 치킨으로까지 이어졌는데, 그래서 닭강정이 유행하고 순살 치킨이 나왔을 때 나는 기술의 발전을 몸소 느끼며 전율했다. 하지만 찜 요리에 썩 호의적이지 않은 나도, 1990년도 중후반 아버지가 해 주신 돼지갈비찜 맛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으며 다시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적어도 돼지갈비찜에는 상당히 까다로운 입맛을 가지게 되었다.
또, 한국사람 중에 라면을 싫어하는 사람을 찾는 편이 더 쉽지 않을까.
나 또한 라면을 좋아한다. 오사카에 유학 중인 지금도 한인마트에 가서 라면을 사고는 일주일에 한 번 꼴로 만들어 먹곤 한다. 물과 건더기 스프를 동시에 넣고 약간 끓어오르면 다진 마늘을 살짝 넣는다. 이따금 고명으로 소시지나 떡, 만두를 넣기도 한다. 그렇게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직전에 스프를 넣고 면을 넣어 재빠르게 익힌다. 불을 끄기 직전 송송 썬 파를 집어넣는다. 살짝 안 익은 면발이 걸쭉해진 국물에 휘감겨 올라온다. 이 라면 맛은 아버지가 으레 끓여주던 것과 비슷한 맛인데, 아버지가 끓이던 라면은 마늘도 아무것도 넣지 않았음에도 이것과 비슷한 맛이 났다. 요 몇 년 사이에 라면 스프가 달라졌을 가능성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아버지의 맛을 최대한 흉내 내려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
찜 요리와 라면, 우리가 요리라고 인정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이것에는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있다. 어찌 보면, 아버지라는 조미료가 듬뿍 들어간 음식을 맛보지 못하는 것도, 내가 따라 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
아버지는 공부도 잘하시고 심성이 여렸지만 그만큼 다른 사람들의 부탁을 거 절하 거지 못했고, 당시 남자들이 으레 그랬듯 감정표현도 매우 서툴렀다. 좋은 성적으로 취업한 은행에서도 트러블메이커로 유명했다고 하고 담배랑 술도 매우 즐겨하셨다. 젊은 나이에 결혼을 하신 터라 가족보다는 친구를 중시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 때문에 어머니를 매우 힘들게 한 적도 많았다. 매일 담배를 피우고 술을 즐겨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한데, 이러한 생활은 1996년 무렵 교통사고를 통해 크게 바뀌었다. 술에 잔뜩 취하신 그 날 인적이 드문 도로변을 걸어오시던 아버지는 횡단보도를 비틀거리며 건너시다가 빠르게 달려오던 차에 치이셨다고 한다. 다리가 부러진 아버지는 약 반년 정도 병원 신세를 지셨고, 그 이후로 천천히 담배와 술을 멀리하셨으며 그러다 보니 술친구들과도 자연스럽게 연락을 끊게 되었다.
진즉에 은행을 그만두시고 공사판을 전전하시던 아버지는 교통사고를 통해 크게 개심한 후 요리를 배우셨다. 1990년도 중후반은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이 지금보다 확고했던 터라, 아버지가 요리를 배운다는 사실이 내게는 큰 신선함으로 다가왔다. 오죽하면 친구들에게 "우리 아빠 요리 배운다"라고 자랑하기도 했다. 매일 요리 학원에 가서 수업을 듣고 수업에서 만든 음식을 들고 오시던 아버지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했다. 본디 공부를 좋아했던 아버지는 굉장히 빠르게 시험을 통과하였고, 어느덧 실기를 앞두게 되었다.
돼지갈비찜이 어렵다던 아버지는 시험에 대비한다는 이유(?)로 직접 돼지갈비찜을 만들어보겠다고 하셨다. 당시에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외삼촌과 함께 살았던 우리는 아버지의 그런 모습에 한껏 기대를 했다. 핏물을 뺀 돼지고기와 감자와 당근, 양파를 썰어 넣고 푹 익힌 돼지갈비찜은, 당시 내 기억에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던 듯했다. 우선 저녁 먹을 시간이 한참 지났고 배가 한참 고팠던 본능적인 기억만이 존재한다.
사실 아버지가 만든 돼지갈비찜은 썩 인상적인 맛은 아니었다. 약간 달고 짰고 느끼했다. 가족들을 미워하지는 않았지만 집안에 소홀했던 아버지가 우리를 위해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만들어주신 요리라는 점이 상당히 큰 요소로 다가왔던 모양이다.
한식조리사 자격증을 딴 아버지는 이런저런 식당을 거치며 경력을 쌓으셨다. 하지만 그것이 직업이 되어서였는지, 집에서 본격적인 요리를 하지는 않으셨다. 이후 초등학교 급식실 조리사로 들어가시면서 시간적 여유가 굉장히 많아졌는데, 그때도 계란말이나 소시지 볶음, 옛날 분홍 소시지와 같은,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간편한 반찬을 제외하고는 만들지 않으셨다.
초등학교 급식실에서 근무하셨던 아버지는 방학 때에는 나와 집에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때마다 아침에 라면을 끓이거나 간편한 반찬을 해 주시곤 했다. 이 라면이 또 과하게 짜지도 않으면서 적당히 걸쭉하며 고소한 맛이 극대화되어 참으로 기가 막혔다. 아마 이건 요리사로서 몸에 익힌 것이 아닌 아버지가 수많은 라면을 드시면서 터득한(?) 노하우였을 것이다. 라면을 먹으면서도 이따금 돼지갈비찜을 먹고 싶다고 은근히 내비친 적이 몇 번 있었는데, 번거롭기도 하고 조리과정을 잊어버리셨다고 허허 웃곤 하셨다. 대신 라면 끓이는 법은 몇 번 알려주셨고 나도 어깨너머로 몇 번이고 보았지만 기본적으로 봉지 라면에 있는 기본적인 것들만 들어가는터라 정말 특별할 것이 없었다.
아버지가 만든 음식을 먹고 헬스장에 함께 가서 운동을 마친 후에는 교보문고에 가서 책을 읽거나 근교에 나가 산책을 한 후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고 케이크를 먹으며 어머니 퇴근 시간에 맞추어 회사 근처로 가서 함께 차를 타고 집에 돌아오곤 했다. 방학 때의 라면 맛은 이러한 모든 과정을 포함한, 어찌 보면 추억의 맛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햇수로 어느덧 9년이 되었다. 정말, 뜬금없게도, 어느 날 갑자기 암 판정을 받더니 어느 날 갑자기 내가 보는 앞에서 증상이 악화되어 돌아가셨다. 아버지를 잃었다기보다는 정말 친한 친구를 잃었다는 상실감과, 늘 세 개인 식탁 의자 가운데 하나 비어있다는 사실이 나의 마음을 더 아프게 만들었다. 결국 아버지의 라면 노하우와 돼지갈비찜은 환상으로만 남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돼지갈비찜에 한해서는 굉장히 까다로워졌다. 제아무리 비싼 재료를 사용하고 일류 셰프가 만들었다 한들, 그동안 집안에 소홀했던 아버지가 나를 위해, 우리 가족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만들었다는 비밀 레시피가 들어가지 않은 이상 그 맛을 이기기는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라면도 마찬가지이다. 라면이 정말 손쉽게 만들 수 있는 음식 이기는 하지만, 밖에서 사 먹는 라면에서는 그 맛이 나질 않는다. 이것 역시 집안에 소홀했던 아버지가 나, 혹은 어머니를 위해 최선을 위해 끓여주었던 마음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돼지갈비찜과 라면, 이 두 가지 음식에는 나나 어머니, 그리고 우리 가족들만이 느낄 수 있는 비밀 레시피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세상에서 두 번 다시 재현할 수 없다는, 슬프고도 아련한 기억으로 남아 우리 가족의 미각을 지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