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캣테일 Aug 24. 2019

이 세상에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은 없다

건전한 <프로불편러>가 되기 위해서

  불편한 것을 불편하다고 말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

  기존에 사회적으로 용인되던 편견과 사고방식, 즉 스테레오 타입(Stereotype)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그것을 가능한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자는 취지에 나온 이러한 개념은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많은 사람들이 용기를 내어 자신의 생각을 소신껏 밝히고 그것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사회적으로 과연 그것이 옳은 것이었는가에 대한 토의가 이루어진다. 굉장히 생산적인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국만 참여 민주주의의 진정한 개화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 사람들이 모두 올바른 인문학적 소양과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다는 전제하에 진정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이라는 말이 붙은 시점에서 이미 눈치챈 분들도 많겠지만, 우리 사회는 오로지 자신만에 옳다는 생각에 사로 잠긴 사람들이 아직도 굉장히 많이 존재한다. 어쩌면 <프로 불편러>는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기 자신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양날의 검과 순환 논증의 오류

  이 세상의 이치는 양날의 검과 같고, 꼭 모든 것들이 좋은 점만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불편함을 말하는 현상에도 단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소위 말하는 <프로 불편러>들의 등장이다.

  이 <프로 불편러>라는 말의 정의는, 누군가에게는 불편할 수 있는 내용이 사실은 누군가에게는 용인될 수 있는 수준이라는 것에서 나온 것인 만큼 그 기준을 세우기가 상당히 애매하며 어렵다. 이 <용인되는 수준>이라는 것이 개인 혹은 집단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점에서 <이것이 누구나 불편해야 하는 것인가>라는 논쟁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결국 사회적 혹은 도덕적 기준의 차이인데, 그러면 이 사회도덕적 기준이 과연 옳은 것인가 하는 굉장히 근본적인 질문까지 파고드는 경우가 많다. <프로 불편러>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보통 이러한 근본까지 파고드는 경우가 많고, 그렇기에 논쟁은 더욱 치열해진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국 그들의 말은 <나의(혹은 우리 집단의) 생각이 옳지만 사회적 기준이 잘못되어 있어><사회적 기준이 잘못되어 있으므로 나의(우리 집단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하는 거야><사회적 기준은 나의(우리 집단의) 생각에 근거되어야 해>라는, 순환논리의 오류와 오만함에 빠져있다는 것을 쉬이 파악할 수 있다. 그러므로 더욱더 결론이 도출되지 않는 무의미한 토론(이라기도 부르고 민망한 것들)이 반복된다.


편협한 관점을 가진 사람들

  개인적으로 <프로 불편러>란 문맥을 생각하지 않고 1차원적으로 사안을 파악하는 사람들을 비꼬는 단어라고 정의하고 있다. 2000년도 초반, 대중가요 노래 가사에 선정적인 가사가 많다는 의견이 한때 주류를 이루었고 과연 어떠한 근거로 그런 것인가에 대한 토론이 한창 이루어진 적이 있다. 어떤 노래에 등장하는 <크리스털>이라는 단어가 남성의 생식기를 가리키는 말이며 노래 전반적으로 성행위에 대한 은유가 나타나 있으므로 선정적인 가사라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외국인은 그것이 그냥 단순히 1차원적인 비유일 뿐이며 그 어떤 것도 성행위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못 박았다. 당연히 저 말은 많은 사람들의 비웃음을 샀다. 하지만 그 이후 가사에 스토리성이 거의 없는 후크송이 유행하게 되면서 이러한 논쟁은 사그라들었다.

  대중가요에는 당연히 음란한 요소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전제 하에 가사를 보니 그렇게만 보이지, 라는 의견이 당시 대부분이었다. 설령 그 노래 중 일부가 실제로 성행위를 은유적으로 내비치는 것이라 한들, 문맥을 통해 그러한 느낌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과대해석일 뿐이다. 혹은 작사가의 언어적 능력이 상당히 뛰어나서 그러한 요소를 아주 교묘하게 감추었을 가능성도 있는데, 이러한 수준까지 가면 이미 외설이 아니라 예술이다. 결국 이들도 자신들의 관점에서 어떻게든 트집을 잡기 위해 문맥도 파악하지 않고 1차원적으로만 바라본 <프로 불편러>들이다. 


수많은 관점과 확고한 기준이 사회를 성립케 한다

  사회가 전체주의 사상이 지배하거나 사고방식이 일률적인 로봇 혹은 인공지능으로 바뀌지 않는 이상 절대적인 이상과 진리, 절대적으로 옳은 답, 완벽하게 합일화된 의견은 존재할 수 없다. 그렇기에 그러한 사회적 현상을 관찰하는 인문학은 인간만이 영위할 수 있으며 체득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고차원적인 학문이다. 결국에는 모두의 의견이 다를 수밖에 없고, 다수결로 결정된 사안에 불만을 가지는 사람들은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과정에서 자신의 의견을 어떻게 피력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데 <프로 불편러>들은 중간 과정을 생략한다. 오로지 자신 혹은 자신이 속한 집단이 가지고 있는 것만이 진리이자 정답이라는 편협한 시각 속에 사안을 바라보고 판단하며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지금 세워진 사회적 기준이 옳은가에 대해서는 굉장히 광범위하고 철학적인, 생물학적인 요소까지 개입하므로 함부로 파악하기가 굉장히 어렵다. 여기서 어떠한 애니메이션의 말을 가져오는 것이 상당히 우습긴 하겠지만, 사회 및 사상적으로 나에게 큰 영향을 준 것이므로 가져오고 싶다.

  <PSYCHO-PASS>라는 애니메이션은 전체적으로, 잘못된 사회적 기준 위에서 성립된 사회 질서를 부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하는 굉장히 철학적인 질문을 던진다. 주인공은 잘못된 사회적 기준 위에 성립된 이 사회 질서가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한편 사회적으로 큰 혼란이 오게 되어 더 많은 피해를 입을지도 모른다는 상황에 끊임없이 고뇌하며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 시즌 1의 빌런은 이러한 사회 기준 자체를 부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주인공은 그를 저지해야 하는 입장에 서면서도 그의 마음을 이해한다. 결국 사회를 지킨 주인공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면서 천천히 바꾸어나가겠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은 주인공이 더욱 성장한 극장판에서 빛을 발한다. <악법은 당연히 사라져야 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토대로 사회가 성장한 것도 사실이며 과거의 사회 구성원들도 그 법을 지키며, 때로는 그것을 수정하고 없애기 위해 분투했어. 결국 사회를 구성하는 법을 따르는 것은 그 법을 따르고 고뇌하며 때로는 저항한 과거 사람들을 존중하는 의미이기도 해. 법에는 경의를 표하도록 해>라는 말은 그간 겪어온 사건을 통해 성장한 주인공을 그대로 보여주는 동시에 이 애니메이션의 관통하는 중심적 사상이기도 하다.

 

틀릴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무조건적인 <프로 불편러>들이 위험한 이유는, 자신들이 편협한 사상이나 관점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그것이 무조건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나머지 다른 관점을 가진 의견을 짓밟고 존중하지 않으며 모든 사안의  문맥을 파악하지 않고 1차원적인 해석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방법을 제시하지 못하는 이유를 사회 구조 탓으로 돌려 어떻게든 자신들이 옳다는 식으로 결론짓는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의견이 틀리다는 가능성을 내포하지 않으므로 토론의 대상 조차 되지 않는다. <나를 성장시키는 성장의 기술>이라는 논리의 기본을 설명한 책에는, 올바른 의견은 틀릴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설령 "내가 어제 어디 있었게"라는 말에 대해, <서울에 있지 않았어?>와 <지구에 있었겠지>라는 대답이 있다고 하면, 후자는 틀릴 가능성이 없으므로(인간이 지구 밖으로 나가서 살지 않는 이상) 애초에 대화로써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개그에서나 통용되는 커뮤니케이션이다. 후자가 이상하다고 대답하면, 정답이기 때문에 인정하지 않는 거지?라고 굉장히 진지하게 되받아치는 사람들이 간혹 있는데, 그러면 조용히 그 사람과의 관계를 정리하기를 추천한다. 


이 세상에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은 없다

  뒤집어 말하면, 불편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으며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면 그 사람들은 <프로 불편러>가 아니라는 것이다. 구체적인 대안이란, 이 사회 질서를 전제로 무작정 틀렸다고만 하지 말고 어떠한 점이 잘못되었으며 어떤 식으로 수정해 나가면 좋겠다는 방향성과 이 사회 질서에 성립한 사회에 살고 있는 여타 구성원들을 존중심과 배려심을 제시하는 구체적인 제시 안이다. 물론 <감정에 호소하는 근거>는 안 된다. 그것은 자신의 의견이 성립된 계기는 제공해줄지 몰라도 의견 자체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단, 근거를 제시할 때 <당연히 그렇게 느껴야 하지 않아요?>, <~라고 생각해보세요>라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 이 말은 토론이나 의견 교류를 감정싸움으로 이끌어가는 악의적이며 잘못된 토론 태도중 하나이다. 이러한 감정적 기준은 개인 혹은 집단마다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감정적인 말은 그러한 의견을 가진 계기는 될 수 있어도 의견을 뒷받침하는 근거로는 절대로 쓰여서는 안 되며 애초에 쓰일 수도 없다는 점을 늘 자각해야 한다.

  만일 자신이 <프로 불편러>라는 말을 들었다면, 그것이 단순히 비하하는 목적으로 쓰였을 가능성도 있을지언정 심호흡을 하고 우선 문맥을 파악하지 않고 1차원적으로만 사안을 파악하지 않았는가, 상대에 대한 배려심이나 대안을 제시하지 않았는가를 파악해야 한다. 그럼에도 프로 불편러라는 말을 들었다면 항의해도 된다. 아니, 당연히 항의해야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을 <프로 불편러>라고 하고 싶다면, 대상이 된 글이 토론이 될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만일 포함하고 있다면, <프로 불편러>는 그 사람들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기 자신일지도 모른다.

  다른 관점을 인정하고 배려하고 그것을 자신의 생각과 대조하며 때로는 생각을 바꾸는 자세도 필요하다. 그것이 인문학의 기본자세이며 기본 토대이기 때문이다. 내가 누군가의 <프로 불편러>가 되느냐 마느냐는, 결국 많은 관점을 인정하느냐는 아주 기본적인 인문학적 소양에 달려있다. 우리가 이토록 당연한 사안에 관련된 생산적인 토론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어쩌면 이성보다는 감정을 앞세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작가의 이전글 돼지갈비찜 그리고 라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