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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캣테일 Oct 20. 2019

아빠, 왜 내가 이겨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요?

  서른 하나, 적지 않은 나이이건만 나는 여전히 공부에서 손을 떼지 못하고 있다.

  초등학생과 중학생 때는 공부를 잘 따라갔건만, 고등학생 들어서 공부를 따라가지 못한 나는 속된 말로 공부를 놓아 버렸다. 하지만 비행을 한 것은 아니다. 반에서 꾸준히 10등 안에 들었고 모의고사도 3~4등급을 꾸준히 유지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 당시 나는 공부를 못 했던 것이 아니라, 단순히 공부를 하는 방법을 몰랐던 것 같았다. 아무튼 지금 나는 전문대부터 시작하여 국비유학생이라는, 일본 정부에서 고르고 고른 몇 안 되는 사람들에 운 좋게 선발되어 언어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인문학 연구는 이공계열과 다르게 장비가 필요한 경우가 적고 오롯이 홀로 연구를 하기에, 시간만 허락된다면 한국에 얼마든지 왔다 갔다 할 수 있다. 그렇게 책과 노트북을 한 움큼 들고 한국에 와서 연구와 공부를 하고 논문을 쓰고 투고를 나는 나는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 날에는 늘 아버지에게 찾아간다. 이 모습을 아빠가 봤어야 하는데... 라며 아버지가 있는 유리 벽을 쓰다듬는 내 눈에는, 8년이 지난 지금도 눈물이 맺히곤 한다.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굉장히 든든한 존재이다.

  술과 담배를 매우 좋아하셨지만 큰 교통사고가 난 이후로 술을 끊고 담배를 끊으셨다. 그리고 교회에도 꾸준히 나가시며 교회 일을 도맡아 하셨다. 한식 조리사 자격증을 따신 후 초등학교 급식실에서 일하시며, 일이 끝난 후에는 집에서 책을 읽으셨다. 친구분들 대부분이 술친구였기에 술을 끊자 친구들과의 연락도 자연스럽게 끊겼고, 그런 아버지의 말 상대가 되어준 것은 다름 아닌 나였다. 아버지는 여타 다른 아버지들과 달리 엄하지 않으셨다. 내가 대학에 다녔던 시절에는 방학 때 같이 헬스장을 등록해 다니기도 했고, 이따금 같이 광화문 교보문고에 가서 책을 읽고 커피숍에 가서 커피를 마시고 케이크를 먹으며 온갖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 아버지가 2011년 2월 말, 갑자기 여명 3개월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신 친할아버지 역시, 생전 술과 담배를 그렇게 좋아하셨고 결국 간암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래서 조심해야 했던 것을, 아버지는 <나는 괜찮겠지>라는 생각으로 소싯적에는 정말 매일같이 술을 마셨다고 한다. 뒤늦게 술을 끊었지만 간은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2010년 말 정말 오래간만에 회식에서 마신 소주 한 병이 간을 급속하게 악화시킨 모양이었다. 1월 말 설날 때부터 소화가 되지 않는다고 온갖 동네병원을 전전하던 아버지는 단순히 소화불량이라는 진단만 받으셨고, 한 달 동안 약을 먹었음에도 배는 점점 불러오기만 했다. 이에 이상함을 느낀 어머니는, 초등학교 개학 이전에 큰 병원에서 진단을 받아보자고 하셨고, 아주 잠깐 진단만 받겠다고 간 것이 이내 배에 물이 찼다는 것으로 밝혀져 하룻밤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 간경화가 너무 진행되어 앞으로 3개월 남았다는 잔혹한 진단을 받았다.

  2011년은 개인적으로 참 힘든 시기였다. 아버지가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셨고,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나 일본에 관련된 업종 자체가 전망을 잃기도 했다. 또 아버지 간호와 일을 병행하며 스트레스가 쌓인 어머니도 쓰러지셔서 수술을 받았다. 나는 학교를 다니며 편입 준비를 하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번갈아가며 간호하는, 지금 생각하면 정말이지 체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한 해를 보냈다. 오죽하면 그 1년 간 운동을 하지 않았음에도 살이 10킬로 정도 빠졌다.

  아버지는 좋아지시는 듯 보였다. 생전 아프셔도 병원도 안 가고 약도 드시지 않았기에 항암 치료 차도가 굉장히 좋다고 했다. 간 기능 자체가 상당히 약해진 터라 지금 상태를 유지할 뿐, 좋아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도 들었지만, 어머니와 나는 혹시 모를 기적을 생각하며 몸에 좋다는 것을 찾아 아버지에게 드렸다. 그리고 아버지를 위해, 우리가 다니던 교회 근처로 집을 옮겼다. 집에 있을 때 언제든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올릴 수 있도록. 비록 집은 상당히 좁아졌지만, 아버지가 편할 수 있다면 뭐든 괜찮다는 생각을, 나와 어머니가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2011년 6월 30일, 하루 종일 잠만 주무시는 아버지 간호를 퇴근하고 오신 어머니께 맡기고 집에 온 나는 정체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 분명 6월 말이었거늘, 온몸이 떨리고 한기가 돌아 몸을 덜덜 떨었다. 밤새도록 추위에 벌벌 떨어 잠을 자지 못한 나는 다음 날 아침 7시, 출근을 하시는 어머니를 대신해 아버지 옆에 앉았다. 그리고 갑자기 아버지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었다. 아침 식사가 와서 아버지를 깨우려 했지만 아버지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몸만 뒤척이셨고, 내가 간호사분께 아버지가 이상하다는 말을 전하자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다. 바로 옆에 계셨던 아저씨가, 내가 오기 직전까지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고 물도 마셨다고 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내가 오자마자 아버지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었다는 것이다.

  온갖 기기에 연결된 아버지는 힘겹게 숨을 내 몰 아쉬시 더니 이내 각혈을 하시기 시작했다. 놀란 내가 다시 간호사 분과 의사 선생님을 불렀고, 그들은 아버지를 중환자실로 옮겼다. 그리고 이내 아버지 주치의가 나를 불렀다. 가족들을 부르는 편이 낫겠다고. 나는 중환자실 입원 서약서에 사인을 하고, 곧바로 모든 가족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막 출근을 끝내신 어머니는 바로 달려오신다고 했고, 동네에 살던 막내 이모와 삼촌에게도 전화를 돌렸다. 애써 슬픔을 참으려 했건만, 아직 20대 초중반이었던 나는 결국 울음을 참지 못했다. 그때가 아침 8시 30분. 내가 온 지 두 시간이 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 짧은 사이에 모든 것이 바뀌어 버렸다.

  9시 30분쯤 어머니가 다시 왔고, 우리는 중환자실 앞에 하염없이 앉아 있었다. 이윽고 간호사분이 나와서는, 몸을 가누시질 못하니 욕창이 생길 수도 있으니 바닥에 까는 매트 등을 준비하면 좋겠다고 하셨고, 나는 지하에 있는 마트에 가서 그것들을 샀다. 채 5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올라오자마자, 주치의가 나와 어머니를 급하게 불렀다.

  마지막이라고 했다. 나중에 들은 것이지만 간경화가 너무 심해져서 이미 간암 말기 상태가 되었고, 그것이 다른 장기나 혈액에까지 퍼져 상태가 급격하게 악화된 것이라고 했다. 산소호흡기를 달고 있어도 생존 가능성은 없다고 하셨다. 나와 어머니는 울지 않고, 천천히 아버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귓가에 말을 했다. 사랑한다고, 그러니까 이제 푹 쉬라고, 우리는 꿋꿋하게 잘 살겠다고. 그러자 눈을 감고 있던 아버지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리고 그 직후, 심장 박동은 0이 되었다. 2011년 7월 1일 오전 9시 55분경. 내가 병원에 온 지 세 시간이 채 되지 않은 시간. 모든 것이 바뀌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날 그토록 추웠던 것은,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본능적인 무언가가 나에게 경고를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간성혼수를 일으키셔서 어머니가 굉장히 힘들어하셨다고 하는데, 그것을 안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그런 아픈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엄청난 노력을 하신 것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나는 그 모습을 보아도 이겨낼 수 있는 강한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그간 아프지 않으려 노력하셨던 것을 놓고 천천히 임종을 준비하셨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그 세 시간 남짓한 시간은 8년 여가 지난 지금도 나의 뇌의 강하게 각인되어 지워지지 않고 있다. 그 후 나는 친할아버지가 힘들어하신 것을 듣고 아버지가 힘겨워하신 것을 보며, 즐겨 마셨던 맥주에 일절 입을 대지 않게 되었다 (담배는 애초에 피우지를 않았다). 하루에 30분 정도 운동을 하고 책을 읽으며 하루하루의 삶에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다.

  나는 아버지가 계신 추모원에 가면 늘 혼잣말로 묻는다. 왜 내가 그것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지. 제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 해도, 부모가 힘겨워하는 광경을 보면 멘털이 버틸 수가 없는데. 왜 나는 그것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지. 그 대답은 적어도 몇십 년 후에 듣게 되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찾아갈 때마다 묻곤 한다. 꿈에서라도 대답해주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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