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관점>을 들이미는 <비지식인>들이 많은 인문학 실태
정말 우수한 연구자란, 하나의 사건을 여러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이러한 점에서 있어서 나 역시 좋은 연구자라고 할 수 없다. 박사 과정을 밟는 지금에서야 뒤늦게 깨달은 나는 아마 다른 연구자들보다 출발이 한참 늦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일본어를 좋아해서 일본어만 공부하고 일본어학만 본 내 졸업 논문은 어찌어찌 넘어갔을지언정 석사 논문에서 커다란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일본의 서브컬처 문화>라는 돌파구를 마련하여, <문화>의 관점에서 일본어를 관찰했다. 그 후 국비유학생 제도에 합격하여 일본으로 건너온 내 앞에는 또 다른 커다란 산이 기다리고 있었다. 제아무리 글을 써도 석사 논문 이상의 글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저 같은 말만 되풀이하며 단어만 바꾸어 쓰는 스스로가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평소에 관심이 있던 게임 시나리오 작법서와 일본 애니메이션의 역사서를 읽고 일본의 대중문화를 고찰하는 글도 읽었으며 나와는 전혀 상관없을듯한 일본어 문법서도 읽었다. 이따금 할인 행사를 하는 리디북스를 통해 새로 나온 인문학 책과 과거 재미있게 읽었던 판타지 소설을 사서 읽었다. 하지만 논문을 안 쓸 수는 없는 법. 특히나 박사 과정은 적어도 한 학기에 두 번의 발표를 해야만 했기에 미룰 수가 없었다. 키보드에 손을 얹기 전까지는 막막했건만, 일단 글을 한번 써 나가기 시작하니 마치 나의 의지가 아닌 것처럼 손가락이 끊임없이 움직이며 글을 자아냈다. 쓰는 도중 번뜩이는 생각이 떠올라 글을 일단 다 쓰고 그 부분을 수정한 적도 있다. 이렇게 완성된 소논문은, 비록 석사 논문에서 크게 나아가지는 않았을지언정 이론적인 부분에서 다소 보완을 이루었다. 실제로 지난 학기(2019년 1학기), 여러 교수님들에게 지적받은 내용도 <이론적인 부분이 모자라다는 점>이었다. 나는 그 이론을 일본어학이나 일본 문화가 아닌 포스트 모더니즘(Post Modernism)이라는 새로운 주류에서 찾아내었다. 그리고 지금은, 나와는 전혀 상관없을 듯싶었던 일본어 논 문쪽에서 새로운 관점을 찾아내려고 노력 중이다.
일본어 논문을 연구하는 분들에게는 참 죄송스러운 말이지만, 현재 일본어(혹은 언어학 전반)의 연구 중심은 <사회언어학>이라는, 커뮤니케이션에서 쓰이는 언어를 기반으로 한 곳에 놓여 있다. 문법은 이미 많은 분들에 의해 기반이 닦여져 있었고, 이제는 그 문법을 이용하고 조합하여 새로운 관점을 찾아내는데 더욱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석사 과정에 재학 중이던 4년 전만 하더라도 문법 분야가 강세였거늘, 작년부터인가 그 세력이 역전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하나의 관점에 집착하면 대상을 올바르게 바라보지 못할뿐더러 시대적으로도, 또 다른 연구분야에서도 배척당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연구자는, 인문학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들은 중심이 되는 확고한 관점을 지니고 모든 사태를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나의 관점이 <절대적>인 것이라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 눈에는 빨간색으로 보이는 물건을 다른 사람은 파란색이라 한다. 또 어떤 이는 초록색이라 한다.
보통 이럴 경우 말싸움으로 번지기 십상이다. 그러면 나는 그것과는 다른 대상을 바라보자고 제안한다. 내 눈에는 주황색으로, 파란색으로 보인다는 사람은 녹색으로, 초록색으로 보인다는 사람은 연구 색으로 보인다고 한다. 그제야 나는, 내가 <붉은색> 안경을 끼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첫 번째 대상은 사실 하얀색(에 가까운 것)이었고 두 번째 대상은 노란색(에 가까운 것)이었다고 판단하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쓴 색안경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철학적으로 들어가면, 저 하얀색이나 노란색이 실제로 하얀색이나 노란색이 아닐 가능성도 충분히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가진 관점만이 정답이 아니라는 점을 늘 인지하고, 다른 관점이 있음을 인정하며 그것들을 종합하여 대상을 가능한 올바르게 파악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잘못된 관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질문을 하고 그 관점을 수정하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잘못된 관점>이란, 관찰하는 대상의 색이 하얀색과 노란색임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그 두 색이 모두 분홍색이라고 주장하는 관점을 뜻한다. 다른 수많은 관점들과 비교해보았을 때에도 섞이지 아니하고 분명하게 틀린 것으로 보이는 관점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물론 이것을 구별해내고 판단하는 것 또한 인문학을 배우는 사람들의 기본 소양이며, 그것을 자신 있게 주장하는 것이 바로 인문학을 배운 연구자들이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한다.
최근 인터넷 뉴스나 논설, 연설 등을 보면, <빨간색>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파란색>, <초록색>으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왜 <파란색>이나 <초록색> 안경을 쓰고 물체를 보냐>는 식으로 화를 내는 경우가 많이 보인다. 자신이 쓴 <빨간색> 안경만이 올바른 것이며 다른 관점은 인정하지도 않고 도리어 <틀린 것>으로 치부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다. 그렇다고 그들이 인문학적 소양이 떨어지느냐. 그것도 아니다. 내가 더 괘씸한 것은, 자신이 그런 안경을 쓰고 있다는 점을 알면서도,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이러한 기본 소양이 아직 잡히지 않은 사람들에게 마치 그 관점만이 올바르다고 설파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이러한 언설을 한다는 점이다.
나는 이것이, 이제껏 인문학 교육을 등한시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인문학적 지식을 단순히 <시사 상식>을 암기하거나 철학자의 말을 외우거나 시를 암송하는 정도로 생각하는 <지식인>들이 만들어 낸 결과이다. 돼지고기 찜을 만들고 싶다는 사람에게 감자나 당근의 효능, 돼지고기의 부위 이름과 효능만 잔뜩 알려주고는 <자 이제 만들 수 있겠지>라며 으스대는 꼴이다.
기계와 AI가 인간의 영역에 들어온다는 것은, 더 많은 인문학적 지식을 필요시 된다는 것을 나타낸다. 하지만 인문학 교육은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다. 그리고 그 인문학적 소양을 충분히 지니고 그것을 활용해야 할 사람들이, 도리어 그것을 악용하고 있으니 고구마 열댓 개는 먹은 듯한 기분이 든다.
이 글의 초두에, 정말 우수한 연구자란 하나의 사건을 여러 관점에서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적었다. 나는 아직 그런 경지에 다다르지 못했다. 하지만, 내 생각과 관점만이 <정의>이자 <진리>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늘 가슴 한구석에 가지고 있다. 인문학을 제대로 배운 사람이라면, 다른 관점이 있을 가능성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 관점을 가능한 많이 긁어 모아 추상적인 <인문학적 사상>들을 최대한 올바르게 표현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만일 그것을 할 수 없다고 한다면, 나는 그들이 <지식인>이라 불릴 자격이 없다고 감히 단언하고 싶다. 모든 사건을 <빨간색>으로만 보고 그것만이 정답이라고 외치는 사람들은, 이 세상이 온갖 색으로 넘쳐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거나, 알고 있더라도 애써 눈을 돌리고 있는 <비지식인>이다. 나는 그들을, 혹은 그 사람들이 쓴 글을 보며, 그러한 관점을 인정을 하면서도 왜 이렇게밖에 보지 못할까 라는 안타까움에 사로잡힌 채, 나는 저렇게 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