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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캣테일 Oct 28. 2019

부정적 언어, 부정적 사고방식

언어를 통한 언론과 사고방식의 획일화 전략

<아는 만큼 보인다>가 잘 들어맞는 시대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잘 들어맞는 시대가 왔다.

  사실 어느 시대에서나 존재했던 말이다. 하지만, 넘쳐나는 정보에 휩쓸려 자신을 유지하지 못할 바에는 내가 가진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보자는 생각이 강한 현대 사회만큼, 이 말이 큰 영향력을 끼친 시대는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말은 유홍준 교수님이 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처음 나왔다. 말 그대로, 어떠한 대상을 보더라도 그걸 바라보는 관점은 다르며, 그것이 어떠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도 내가 가진 정보량에 비례한다는 말이다. 중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으로 질리게 찾아갔던 경주의 문화유산들을 당시에는 그저 먼 옛날의 건물로만 인식했던 것도, 그것들에 관한 커다란 관심이나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설령 국사를 열심히 공부하고 역사에 엄청난 관심을 가진 학생들이라면, 그 여행은 굉장히 큰 의의를 가졌을 테지만 말이다. 이러한 관점은 우리가 평소 나누는 말과 <언어>로도 형성된다. 그 이론이 바로 <사피아 워프의 가설>이다.


언어와 사고방식을 잇는 <사피어 워프의 가설>

  <사피어 워프의 가설>이라는 이론이 있다. 이 말은 2010년 중후반, 젠더 이슈가 한창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을 당시 한국인과 결혼한 일본인 여성분이 쓴 에세이를 통해 표 층화 되었다. 간략히 말해 <언어>가 인간들의 <사고방식>을 규정한다는 가설이다. 험한 말을 쓰면 사고방식도 다소 험해지고, 존댓말을 쓰며 상대를 배려하면 생각이나 행동도 그에 맞게끔 순화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이론이 <가설>에 머무르는 이유는, 이를 증명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이 이론의 시비를 따지기 위해서는 실제 사람을 상대로 연구를 진행하는 수밖에 없는데, 이는 윤리적으로도 문제가 될지언정 많은 시간을 소비하게 되고, 워낙에 다양한 변수가 수반되므로 정확한 관찰이 불가능해진다. 하지만 <언어>와 <사고방식> 사이에는 미약하게나마 연결점이 존재함을 전부 부정하기도 어렵다. 소위 <악마의 증명>으로 빠지게 되는 이 이론은, 결국 증명되지 않은 <가설>로써 남아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는 선에서 멈추게 되었다.

  이것은 <언어>라는 다소 무거운 영역에만 존재하는 문제가 아니다. <사고방식>을 규정한다는 말은, 곧 내가 사회를 어떻게 바라보느냐 하는 <관점>을 제공한다는 말로 바꿀 수 있다. 늘 부정적인 말을 입에 담는 사람은 무엇을 보더라도 삐딱하고 보고, 긍정적인 말을 입에 담는 사람은 무엇이든 긍정적인 측면으로만 보려는 경향이 강한 우리의 경험으로도 말할 수 있다 (물론 모든 이들이 이렇지는 않다. 하지만 경향적으로, 경험적으로 보았을 때 이러한 경향이 강하다는 걸 부정하기란 또 어렵다). 


<언어>과 <사고방식>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사고방식>과 <언어> 사이에는 전후관계가 없다. <사피어 워프의 가설>에서는 <언어>가 <사고방식>을 규정한다고 했지만 이것은 시간적 관계나 인과 관계라기보다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대등 관계로 받아들이는 편이 훨씬 좋다. 그러면, 결국 <사고방식>과 <언어>는 쉴 새 없이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가 된다. <욕설>이나 <비하>적 의미를 지닌 말을 처음 사용할 때에는 다소 거부감이 들고 불편하지만, 그것을 계속 사용하며 다른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을 취하게 되면 그 의식은 무뎌지고 결국 그 말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게 된다. 그 사람은 <비하>나 <혐오>적 의미가 들어있는 말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며 그것이 무엇이 잘못됐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된다. 나만 쓰는 것이 아닌데 뭘. 다른 사람도 다 쓰잖아.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랑 커뮤니케이션이 되는 걸. 이러한 안일한 생각이 결국 그 사람의 언어습관을 바꾸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게 된다.


<언어>를 통한 <사고방식>과 <관점>의 획일화 전략

  최근 비난받는 언론의 행태는 바로 이러한 관계를 이용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의도적으로 부정적인 단어를 내세우며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기사들을 보면 우리는 당연히 그 사안을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 사건의 본질과는 관련 없는 사안을 마치 관련이 있는 것처럼 쓴 기사를 반복해서 내세움으로 인해 얻게 되는 부정적 이미지는 우리의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을 정도로 크다. 더욱이 기사를 끝까지 보지 않고 제목이나 헤드라인만 보고 넘기는 최근의 실상을 생각하면 이것은 더더욱 큰 문제가 된다. 부정적인 단어를 사용하여 사건의 본질을 부정적인 것으로 낙인찍고, 결국 그 사안 자체를 보는 관점을 <부정적인 것>으로 바꾸어버리는 힘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단순한 말을 이용한, 실로 무시무시한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획일화된 관점과 평가는 의심해야 한다

  세상에 있는 모든 사건, 모든 일들은 양면성이 있어야 한다.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고, 좋은 평가가 있으면 나쁜 평가가 있어야 한다. 전체주의가 아닌 이상 모든 사람들이 만족할만한, 혹은 모든 사람들이 혹평을 할 만한 사건은 나올 수가 없다. 논리학에서도, 반증이 불가능한 논제는 애초에 논의의 대상 자체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설령, <어제 어디 있었게>라는 질문에 대해 <서울에 있지 않았어?>라는 대답과 <지구에 있었겠지>라는 대답 가운데 후자가 농담처럼 들리는 이유는, 그 대답이 <항상 정답>일 수밖에 없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완벽한 말이라 할지라도, 항상 빈틈은 존재해야 한다. 어찌 보면 모순이자 역설로도 보이는 이 말은 해당 논제와 그 논제를 사용한 운동을 더욱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부정적인 말만 쏟아져 나오거나 긍정적인 말만 쏟아져 나오는, 혹은 과하게 비판하거나 과하게 칭찬하는 글을 보면 우리는 한 번쯤 의심의 눈초리를 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곳에 쓰인 말들이 우리의 관점을 바꾸려고 하지는 않는지, 또 그 관점이 어떠한 것인지 비판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중고등학생일 무렵, 하나의 기사를 최소 3~5개의 언론사를 통해 보아 그 사건의 장단점과 본질을 파악하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당시에는 같은 기사를 몇 개씩 보라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렇게 십몇 년이 지난 지금 되돌아보면 당시 선생님은 관점의 차이를 명확히 이해하고 또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것이 궁극적으로 어떤 것인지 알고 계셨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몇 번이고 반복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나 그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관한 진상은 <아는 만큼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양한 관점을 가질 필요가 있다. 부정적으로 편향된 기사가 쏟아지거나 칭찬 일색인 기사가 쏟아지면 의심을 해 보아야 한다. 그곳에는 단순한 <기사>를 뛰어넘은 <전략>이 존재할 가능성이 다분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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