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를 통한 언론과 사고방식의 획일화 전략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잘 들어맞는 시대가 왔다.
사실 어느 시대에서나 존재했던 말이다. 하지만, 넘쳐나는 정보에 휩쓸려 자신을 유지하지 못할 바에는 내가 가진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보자는 생각이 강한 현대 사회만큼, 이 말이 큰 영향력을 끼친 시대는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말은 유홍준 교수님이 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처음 나왔다. 말 그대로, 어떠한 대상을 보더라도 그걸 바라보는 관점은 다르며, 그것이 어떠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도 내가 가진 정보량에 비례한다는 말이다. 중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으로 질리게 찾아갔던 경주의 문화유산들을 당시에는 그저 먼 옛날의 건물로만 인식했던 것도, 그것들에 관한 커다란 관심이나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설령 국사를 열심히 공부하고 역사에 엄청난 관심을 가진 학생들이라면, 그 여행은 굉장히 큰 의의를 가졌을 테지만 말이다. 이러한 관점은 우리가 평소 나누는 말과 <언어>로도 형성된다. 그 이론이 바로 <사피아 워프의 가설>이다.
<사피어 워프의 가설>이라는 이론이 있다. 이 말은 2010년 중후반, 젠더 이슈가 한창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을 당시 한국인과 결혼한 일본인 여성분이 쓴 에세이를 통해 표 층화 되었다. 간략히 말해 <언어>가 인간들의 <사고방식>을 규정한다는 가설이다. 험한 말을 쓰면 사고방식도 다소 험해지고, 존댓말을 쓰며 상대를 배려하면 생각이나 행동도 그에 맞게끔 순화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이론이 <가설>에 머무르는 이유는, 이를 증명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이 이론의 시비를 따지기 위해서는 실제 사람을 상대로 연구를 진행하는 수밖에 없는데, 이는 윤리적으로도 문제가 될지언정 많은 시간을 소비하게 되고, 워낙에 다양한 변수가 수반되므로 정확한 관찰이 불가능해진다. 하지만 <언어>와 <사고방식> 사이에는 미약하게나마 연결점이 존재함을 전부 부정하기도 어렵다. 소위 <악마의 증명>으로 빠지게 되는 이 이론은, 결국 증명되지 않은 <가설>로써 남아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는 선에서 멈추게 되었다.
이것은 <언어>라는 다소 무거운 영역에만 존재하는 문제가 아니다. <사고방식>을 규정한다는 말은, 곧 내가 사회를 어떻게 바라보느냐 하는 <관점>을 제공한다는 말로 바꿀 수 있다. 늘 부정적인 말을 입에 담는 사람은 무엇을 보더라도 삐딱하고 보고, 긍정적인 말을 입에 담는 사람은 무엇이든 긍정적인 측면으로만 보려는 경향이 강한 우리의 경험으로도 말할 수 있다 (물론 모든 이들이 이렇지는 않다. 하지만 경향적으로, 경험적으로 보았을 때 이러한 경향이 강하다는 걸 부정하기란 또 어렵다).
<사고방식>과 <언어> 사이에는 전후관계가 없다. <사피어 워프의 가설>에서는 <언어>가 <사고방식>을 규정한다고 했지만 이것은 시간적 관계나 인과 관계라기보다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대등 관계로 받아들이는 편이 훨씬 좋다. 그러면, 결국 <사고방식>과 <언어>는 쉴 새 없이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가 된다. <욕설>이나 <비하>적 의미를 지닌 말을 처음 사용할 때에는 다소 거부감이 들고 불편하지만, 그것을 계속 사용하며 다른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을 취하게 되면 그 의식은 무뎌지고 결국 그 말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게 된다. 그 사람은 <비하>나 <혐오>적 의미가 들어있는 말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며 그것이 무엇이 잘못됐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된다. 나만 쓰는 것이 아닌데 뭘. 다른 사람도 다 쓰잖아.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랑 커뮤니케이션이 되는 걸. 이러한 안일한 생각이 결국 그 사람의 언어습관을 바꾸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게 된다.
최근 비난받는 언론의 행태는 바로 이러한 관계를 이용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의도적으로 부정적인 단어를 내세우며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기사들을 보면 우리는 당연히 그 사안을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 사건의 본질과는 관련 없는 사안을 마치 관련이 있는 것처럼 쓴 기사를 반복해서 내세움으로 인해 얻게 되는 부정적 이미지는 우리의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을 정도로 크다. 더욱이 기사를 끝까지 보지 않고 제목이나 헤드라인만 보고 넘기는 최근의 실상을 생각하면 이것은 더더욱 큰 문제가 된다. 부정적인 단어를 사용하여 사건의 본질을 부정적인 것으로 낙인찍고, 결국 그 사안 자체를 보는 관점을 <부정적인 것>으로 바꾸어버리는 힘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단순한 말을 이용한, 실로 무시무시한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사건, 모든 일들은 양면성이 있어야 한다.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고, 좋은 평가가 있으면 나쁜 평가가 있어야 한다. 전체주의가 아닌 이상 모든 사람들이 만족할만한, 혹은 모든 사람들이 혹평을 할 만한 사건은 나올 수가 없다. 논리학에서도, 반증이 불가능한 논제는 애초에 논의의 대상 자체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설령, <어제 어디 있었게>라는 질문에 대해 <서울에 있지 않았어?>라는 대답과 <지구에 있었겠지>라는 대답 가운데 후자가 농담처럼 들리는 이유는, 그 대답이 <항상 정답>일 수밖에 없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완벽한 말이라 할지라도, 항상 빈틈은 존재해야 한다. 어찌 보면 모순이자 역설로도 보이는 이 말은 해당 논제와 그 논제를 사용한 운동을 더욱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부정적인 말만 쏟아져 나오거나 긍정적인 말만 쏟아져 나오는, 혹은 과하게 비판하거나 과하게 칭찬하는 글을 보면 우리는 한 번쯤 의심의 눈초리를 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곳에 쓰인 말들이 우리의 관점을 바꾸려고 하지는 않는지, 또 그 관점이 어떠한 것인지 비판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중고등학생일 무렵, 하나의 기사를 최소 3~5개의 언론사를 통해 보아 그 사건의 장단점과 본질을 파악하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당시에는 같은 기사를 몇 개씩 보라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렇게 십몇 년이 지난 지금 되돌아보면 당시 선생님은 관점의 차이를 명확히 이해하고 또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것이 궁극적으로 어떤 것인지 알고 계셨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몇 번이고 반복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나 그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관한 진상은 <아는 만큼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양한 관점을 가질 필요가 있다. 부정적으로 편향된 기사가 쏟아지거나 칭찬 일색인 기사가 쏟아지면 의심을 해 보아야 한다. 그곳에는 단순한 <기사>를 뛰어넘은 <전략>이 존재할 가능성이 다분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