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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캣테일 May 03. 2020

일본에 돌아가지 못하는 박사 유학생의 일상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고, 어떻게든 살아남을 틈새는 있더라

  지난 3월 초, 코로나 바이러스로 어수선한 와중에 나는 봄방학을 맞아 한국에 들어왔다.

  오사카에서 유학 중인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2월 중순 이후로 칩거 생활을 했고, 학교 도서관에 책을 빌리러 가거나 식자재를 사러 나갈 때를 제외하고는 집에 꽁 박혀 있었다. 본디 집돌이이지만 하루에 대여섯 시간은 밖에서 생활해야 하는, 카페에 가서 책을 읽고 노트북으로 논문을 정리하는 일상적인 일을 한다 한들 일단 밖을 나가야 직성이 풀리는 나에게 그 열흘 간은 지옥과도 같았다. 지나친 스트레스로 몸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아 당장 체온계를 사서 매일 아침, 낮, 저녁, 자기 전 체온을 쟀다. 36.2도부터 37.3도까지 다양한 온도들. 37.3도가 나오면 층간소음 때문에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것이 아닐까 할 정도로 심장이 쿵 떨어졌다. 하지만 저녁을 먹고 난 후 두 시간 동안만 이런 패턴이 보였으므로, 괜찮겠지,라고 나 자신을 달랬다.

  한국에 온 이후로도 버릇처럼 체온을 쟀다. 당시 오사카는 라이브 하우스, 즉 좁디좁은 실내 공연장을 중심으로 환자가 퍼져나가던 시기였고, 학교를 가기 위해 지나다니던 길목에도 라이브 하우스가 두 개나 있었으므로 설마, 하는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3월 초는 한국에서 마침 확진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던 시기인지라, 그 스트레스가 내 몸을 더욱 안 좋게 만들었던 모양이다. 귀국 후 2주 동안은 가급적 집에 있거나 집 앞 카페만 들락날락거렸고, 행여나 목이 조금 아프다 싶으면 바로 열을 재고 안정을 취하기 일쑤였다. 예전에 꽃가루 알레르기 대책으로 사서 박아두었던 마스크가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꿈에서 몰랐다. 그렇게 2주가 지나고, 몸에서는 아무런 이상 증상도 보이지 않았다. 확진자 추세도 약간 가라앉는듯했기에 나는 한 시간에 한 번 씩 손을 씻고 카페에서도 음료를 마실 때 제외하고 마스크를 벗지 않는 조건(?)하에, 조금씩 일상을 되찾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일본에서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들을 입국 금지령을 내리는 것이 아닌가!

  사실 이때부터 약간 정신을 놔서 헛웃음을 짓는 일이 많았다. 서둘러 돌아가려 해도 비행기 표가 없었다. 일단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마음에, 그리고 일본에서 생활비 명목으로 받는 장학금을 조금씩 모아둔 것으로 약 반년 동안 집세를 낼 여유는 있었으므로, 일단은 한국에 머무르기로 했다. 이때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했는지 이번에는 또 혀가 만신창이가 되었다. 어찌나 심한지 혀뿌리 쪽 까지 염증이 났고, 이걸 또 목이 아픈 걸로 착각한 나는 정상체온임을 확인한 후 내가 자주 가던 이비인후과를 찾았고, 무엇을 했기에 혀가 이렇게 걸레짝이 되었냐는 비슷한 말을 들었다. 나는 겸연쩍게 웃었고, 병원에서 처방해 준 놀라운 약 덕분에 하루 만에 입 병이 깨끗하게 나았다.

  원래 4월 6일에 일본으로 돌아갈 생각이었거늘,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한국에 갇혀(?) 버리고 만 나는 학교에 장문에 메일을 보냈다. 학교도 이런 사태는 처음인지라 향후 동향을 지켜보자고 하고, 교수님들도 이해해주셨다. 박사 2년 차, 이제 논문을 본격적으로 써야 할 시기이거늘 내 손에 있는 건 학교에서 빌려온 책 두 권이 전부였다. 매일 인터넷을 이 잡듯 뒤지며 자료를 찾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내년 말에는 논문을 제출해야 하는데, 이런 생각에 또 스트레스가 쌓이기 시작한다. 이번에도 위염이다. 하지만 마음을 가볍게 먹기로 굳게 다짐했고, 그 위염은 하루 만에 눈 녹듯 사르르 사라졌다.


  원칙적으로 본인이 직접 교무과를 찾아가서 생존 신고를 한 후 사인을 하면 장학금을 주는 방식이었거늘, 지금 내가 다니는 학교는 원칙적으로 등교 금지령이 내려졌기에, 담당자분이 보낸 메일에 답을 하면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특례 조치가 세워졌다. 수업도 이번 학기는 전부 화상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지난 화요일 처음으로 연구실 분들 그리고 교수님들과 마주했는데 그렇게 어색할 수가 없더라. 다들 일본에 있는데도 자료를 구하러 나가지 못해 연구를 제대로 할 수 없다고 걱정을 늘어놓았다. 심지어 이번 학기부터 오기로 한 중국 국적 연구생 한 분은 아직도 입국을 못 했다고 한다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한국은 빠르게 확진자 수가 줄고 있고 제한적이나마 일상을 되찾고 있는데, 일본은 이제부터 시작인 듯하여 참 마음이 복잡 미묘했다.

  원래는 5월 6일에 일본으로 돌아갈 생각이었거늘, 일본은 당연하게도 입국 금지를 한 달 더 연장했다. 어차피 이번 학기 수업이 전부 온라인으로 진행되는터라 일본으로 돌아간다 해도 아마 한국에서와 같은 일상이 반복될 뿐일 것이다. 냉정하게 말하면 한국에 있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하겠지.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논문을 쓰고 자료를 찾으며, 추후 일본에 돌아가서 못 했던 것들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도록 목록을 작성하고 있거늘, 이것이 또 어마어마하더라. 이 막대한 정보를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더라.

  또 논문을 영 쓰질 못하니, 그래도 일단 프로그래밍 언어는 하나쯤 배워두는 게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재난지원금으로 받은 돈을 책에 쏟아부었다. 소싯적에 홈페이지를 운영한다고 HTML이니 PHP니 깨작깨작 건드렸는데 그것이 약간이나마 도움을 주더라. 사실 그 당시에는 그것이 프로그래밍인 줄도 모르고 무작정, 소위 야매로 배웠던 것들이라 크게 도움은 되지 않지만, 그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을 1그램 정도는 얹어 주었다. 코로나로 빼앗긴 너무나도 당연한 일상 사이로, 나의 건강염려증과 프로그래밍, 논문이라는 다소 이질적인 것들이 비집고 들어와 자리 잡았다. 만일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면 이런 것들에 도전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겠지. 또, 내 건강이 나빠지는 패턴(?)도 눈치채지 못했으리라. 인생, 꽉 막히고 도무지 답이 없을 것처럼 보이더라도 어떻게든 길이 하나씩은 뚫리더라. 이번 코로나 사태로 내가 배운 가장 큰 교훈 중 하나이다.


  하지만 또 하나,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다. 일본에 재류할 수 있는 허가 기간이 7월 2일까지이고, 원칙적으로는 3개월 전에 서류를 작성하고 갱신 신청을 해야 하거늘,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더라. 학교에서는 재류기간이 만료되더라도 비자를 새로 발급받으면 되니 걱정하지 말라는 답을 했는데, 일본에 있는 내 집 계약이 문제다. 법무부 홈페이지를 뒤져보니 3, 4, 5, 6월에 재류기간이 만료되는 사람은 우선 그 기간을 3개월 연장해준다는 말이 있는데, 7월은 아직 아무 말도 없더라. 이것도 지금까지 사건들처럼 잘 해결되길 바랄 뿐이다. 이것이 필시 나의 위장이나 혀를 괴롭힐 것이겠지만, 이번에는 마음을 다잡아 최대한 막아볼 생각이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가 빨리 종식되거나 치료제가 나와 제어할 수 있는 정도가 되어서, 당연했던 일상을 되찾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법이라 생각한다. 나도 한국과 일본을 자유로이 오가며 연구와 일상을 영위할 수 있는 날이 조만간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며, 지금 이 순간 건강을 챙기며 한국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최선을 다해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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