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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환 Jun 11. 2020

"김밥 전문가"로 생각해본 전문직의 미래

어느 날 김밥이 나에게 화두를 던졌다.

몇 년 전 보험사 홈페이지 리뉴얼 프로젝트를 진행했을 때였다.

아침 출근길 지하철역에 올라와 파견지 사무실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데, 몇몇 노점상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중에는 김밥을 팔고 있는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있었는데, '김밥'이라는 품목과 판매자가 잘 매칭이 안되었던 것인지 특히 눈에 띄어 유심히 보게 되었다.


좀 더 살펴보니 더욱 눈에 띈 것은 그 판매자의 나이와 성별이 아니라 전지에 매직으로 쓴 듯한 홍보 문구였다.

"김밥 전문가가 만든 맛있는 김밥... OO김밥 0,000원..." 이런 식이였는데, 무엇보다도 김밥 전문가라는 말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김밥 전문가라니?...


김밥을 만드는 일도 전문 영역인 건가?
나도 김밥을 만들 줄 아는데 그럼 나도 김밥 전문가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엄마가 만든 김밥의 맛 >> 내가 만든 김밥의 맛, 그럼 엄마가 나보다 더 김밥 전문가인가?
김밥을 얼마나 잘 만들어야 김밥 전문가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
김밥의 맛으로만 김밥 전문가라고 판단할 수 있을까? 아니면 재료를 다듬고 준비하는 솜씨, 만드는 속도, 고른 두께로 썰어내었는지까지를 평가 기준으로 삼아야 할까?


"김밥 전문가"라는 말이 가능한 거야?



이렇게 시작되었던 질문들이 결국엔,

"그렇다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전문영역인가? 내가 이 일에 전문가라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으로까지 이어졌다.


수년간 동종의 일을 하며 경력과 실력을 쌓았지만, 내가 과연 지금 하고 있는 일의 전문가라고 말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전문가라는 소리를 듣고, 대체 불가능한 존재이고 싶은 건 아니다. 그냥 나 스스로 내 일에 대해 과연 어느 정도 전문성을 갖추고 있는 것인지 살펴보고 싶었다.

출근길에 김밥이 나에게 큰 생각의 화두를 던진 것이었다.




부모님 세대는 지금처럼 취업경쟁이 치열하지 않았고, 어학, 자격증 등 수많은 스펙을 쌓지 않아도 취업하는데 큰 지장이 없었다. 그렇게 입사한 직장에서 마음만 먹으면 정년까지 일할 수도 있었다.

요즘은, 직원의 정년보다도 다니고 있는 회사의 수명이 훨씬 더 짧다. 직원들은 평생 두세 번, 짧게는 2-3년에 한 번씩 직장을 옮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앞으로는, 직장이 잘 나갈지, 혹은 망할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 있는 직무(Job)가 없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걱정하게 되는 시대인 것 같다.

시대마다 늘 없어지는 직업이 생기고 그만큼, 혹은 그보다 더 많은 직업이 생겨났다.

(나만 하더라도 내가 어렸을 때에는 없던 직업을 갖고 있다.)

그런데 그 주기가 짧아지고 있다. 내가 사는 동안 내가 하는 일이 없어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4차 산업혁명 시대 전문직의 미래"라는 책에서, 전문직을 평가하는 기준에 대해 읽은 기억이 난다.

1) 자격이 있는 자가 할 수 있는 행위인가? (예를 들면 의사자격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의술, 변호사, 회계사 등)

2) 독점적인가?

3) 기술 진입 장벽이 있는가?

등이었던 것 같다.

(일단 이 책을 기준으로 본다면 "김밥 전문가"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자격증도 없을뿐더러, 특정 회사나 계층이 독점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하루만 배워도 김밥은 누구나 만들 수 있다!)


책에서는 이러한 조건의 전문직도 위협받는 시대가 오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미 많은 판례를 근거로 제시해야 유리한 변호의 경우에도 인공지능이 앞서기 시작했고, CT 사진으로 암을 판정하는 것도 일부에서는 인공지능이 앞서기 시작했다. 회계사의 경우에도 앞으로 없어질 직업 몇 위 안에 항상 들어가는 직종이다.


이러한 상황에 10년 후에도 나는 이 일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보는 것, 내가 하고 있는 일의 전문성, 그리고 내가 인정받는 전문성이 얼마나 오래도록 사회에서 인정받고 유지될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할 때인 것 같다.

필요하다면, 지금의 안정적인 직업을 버리고, 사회에 새롭게 필요하게 될 새로운 업(Job)을 스스로 만들고 찾아가는 것을 조금씩 준비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몇 년 전 무더위가 조금 일찍 찾아왔던 5월의 어느 날,

음식을 좀 포장해가려고 분식집에 주문을 한 뒤 잠시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등산복 차림에 배낭, 스틱까지 둘러맨 다른 손님 한 명이 분식집 문을 열고 들어왔다.


"참치김밥 2개만 포장해주세요."


입구에서 김밥을 싸던 아주머니는 손을 멈추고 손님을 한번 쳐다보더니 무덤덤한 표정으로 응대했다.


"참치김밥은 드릴 수 없습니다."


"네??"


놀란 손님에게 아주머니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보아하니 등산 가시는 것 같은데, 이 날씨에 산이면, 참치 김밥 금세 상해서 팔 수 없어요. 야채 김밥으로 드릴게요. 야채 김밥에 들어가는 오이도 상할 수 있으니 깻잎으로 대신 넣어드릴 겁니다...."


"날씨가 더워 산에서는 다른 김밥 쉽게 상하니 야채김밥으로 가져가시는 건 어떨까요?" 라며 조금은 공손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법도 했는데, 아주머니는 단호했다.(멋있었다.)

손님은 '뭐 이런 황당한 경우가 있어?'라고 느낄 때와 먹고 싶은 것을 먹지 못하는 아이의 중간 정도의 표정으로 잠시 고뇌하다가 결국 돈을 건네고 김밥을 받아갔다.


'김밥 전문가'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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