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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붕시인 Feb 10. 2016

티끌 Project #5
힘이 되어주지 못해 미안해

양혜규 “코끼리를 쏘다” 展을 다녀와서

“왜 산에 오릅니까?”

“산이 거기 있으니까(Because it is there).”

그의 이름은 알지 못했지만, 그의 말 한마디는 어느 틈엔가 부지불식간에 내 기억 속에 입력되어 있다. 누군가는 무모한 일이라며 핀잔과 냉소를 냉수 한 사발에 담아, 위와 같이 질문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도 80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의 대답이 여전히 나에게 각인되어 있는 것을 보면, 명언이라는 것은 밤낮을 세워가며 만들어 내는 눈물 나는 억지 노동착취 작업은 아닌  듯하다. 순간적으로 감탄사를 연발하다, 문득 왜 나는 저 대답을 질문과 대구 하며 기억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누군가 회초리를 들고 암기하라고 강요하지도 않았을 텐데, 어떻게 나는 기억하고 심지어 이 글을 위한 모티브를 삼을 수 있었을까?


한마디


우리의 일상은 순간적으로 다양해 보이지만, 매번 같은 순서의 동그라미 틀 위에서 서성대고 있을 뿐이다. 어린 시절 탐구생활에 그렸던 개인 일과표는 어쩜 우리 인생의 시간표와 닮아 있다. 찌뿌둥하게 기상하고, 어정쩡하게 머리를 감고, 퉁퉁거리며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비좁은 버스를 타고, 막막한 회사에 도착하여, 무표정으로 일을 하는 일상다반사는 ‘하루’라는 프레임 안에서 좀체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다 보니, 하루에 대한 존중보다는 한숨과 탄식, 때로는 고성이 하루를 덧칠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매번 하루의 알토란을 찾기 위한 고군분투한다. 하루를 존중하지 못하고 매번 무언가 잡히지 않는 낙을 찾아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현대인에게 오아시스란 뇌리를 스치는 굉장히 평범한 말 한마디, 그것이 주는 하루라는 프레임 안에서의 특별함을 의미할 것이다. 주어진 24시간은  한결같은데, 24시간이 나의 감정을 요동치게 한다면, 그것만으로 오늘 하루는 특별해지는 것. 참 단순하지만, 발견하기 힘든 인생의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대답의 주인공인 영국의 산악가 조지 허버트 리 앨러리도 80년 동안이나 회자될 것이라고 감히 예측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이 무모한 도전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내뱉은 한마디가, 현대인에게 큰 울림을 줬을 뿐이지 않을까? 그렇게 한마디를 남기고 에베레스트 정상 바로 아래에서 자신의 숨을 정산했다.


토크?

88만 원 세대, 취포 세대를 넘어 다포 세대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신조어의 등장과 더불어 세대의 아픔을 위로하고 공감하고자 ‘토크 콘서트’라는 공감각적인 단어 또한 등장했다. 토크와 콘서트라니… 각종 방송이나 기관들은 너도나도 앞서 토크콘서트라는 거대한 명제 아래,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한다. 그러나, 과연 수 백 명, 수 천 명이 모여드는 콘서트 장에서 너와 내가 마주하며 1대 1로 이야기할 수 있는 토크는 가능이나 한 것일까? 그리고 이렇게 암담한 시절에 빛이 되는 단 한마디를 진심 어린 마음으로 우리에게 각인시켜 줄 수 있는 것일까? 아무리 좋은 울림도, 돌아서면 탄식과 한숨 아래에 연기처럼 사라지는 그들을 보며, 이 시대의 진정한 한 마디가 무엇일지 고민스럽다.





Unlearn

올해 5월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리움 미술관에서는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양혜규라는 설치 미술가의 작품 전시회가 열렸다. 전시회의 이름은 “코끼리를 쏘다” 세계적인 설치 미술가로  세계무대를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는 그녀는 현대미술의 심장, 뉴욕 현대미술관을 비롯하여 구겐하임 미술관 소장품 전에도 작품을 전시하는 하루를 스스로 재단하는 대단한 여성이다.

그러나 앞선 티끌 프로젝트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설치 미술이라는 것이 추상 미술보다 훨씬 더 난해하다. 마르셀 뒤샹의 변기통 (실제 작품 이름은 ‘샘’)이후 ‘레디메이드’라고 일컬어지는 일상의 오브제를 활용한 작품 전시는 도무지 해설을 듣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렵다. 작가의 순수한 상상력과 작가 자신이 지니고 있는 의식의 흐름으로 전시를 이끌어 간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 작가의 고된 노력에 박수를 아껴서는 절대 안되지만, 그럼에도 나 같은 미술, 전시 문외한에게는 공감의 부재가 큰 숙제로 남는다. 이번 전시회의 제목을 보면  눈치채셨겠지만, 코끼리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조지 오웰의 소설 ‘코끼리를 쏘다’에서 영감을 받아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인류학적 보편성과 민족적 개별성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담은 작품이라는 데, 총에 맞은 코끼리는 보이지 않고, 짚과 맥주 박스 책상, 의자 등이 배치되어 있을 뿐이다. 세심히 관찰하다 눈에 띄는 문구 하나가 보인다. ‘Unlearn’ 배운 것을 일부러  잊어버린다는 뜻으로 작가의 생각이 담겨 있는 단어다. 앞서 말한 하루라는 기계적인 프레임 안에서 너무나 많은 정보의 홍수 시대에, 우리의 서사는 망가질 대로 망가져, 한숨만이 새어 나오는 시대, 이런 암담한 현실 속에서 진정한 현대 사회의 리얼리티는 이질적인 시대와 장소의 재배치를 통해 서사를  제거했을 때, 실현될 수 있다라고 믿고 표현하는 작가의 생각이 나를  한숨짓게 했다. 서사를 제거했을 때, 리얼리티가 표현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현대사회는 파편화 된 조각의 나열이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서 또 한 번 한숨을 쉬었고, 그것을 이해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을 사유한 나 자신에게 탄식을 뱉었다.

그 한마디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책이 있다. 언어학을 현실 정치에 적용해 큰 호평을 받은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의 저서에서 프레임의 역설을 생각해 본다. ‘코끼리를 생각하지마’라고 히틀러가 강요를 한다 해도, 우리 머릿속을 가장 먼저 제압하는 것은 코끼리의 이미지일 것이다. 우리는 미디어가 쏟아내는 단편적인 정보의 홍수 속에서 끊임없이 노출되고 위협당하고 있다. 매일 쏟아져 나오는 각양각색의 살인자 몽타주, 세대들 간의 불화, 노사 간의 절규,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린 청년들, 이런 정보의 노출 속에서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서러워져 버린 현실이 개탄스럽다.

그렇기에, 공감과 서사가 존재하는 하루의 일상, ‘개콘’으로 해소되지 않는 진정한 웃음과 ‘슈스케’로 해소되지 않는 진정한 성공이 우리 모두에게 부지불식간에 스며들길 기대한다. 나도 모르는 어느 산악인의 대답을 여전히 기억하듯이, 나도 모르게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우리들  가슴속에 새겨져, 희망을 노래하는 세대가 도래하길 진심으로 빌어본다. 누구나 내뱉을 수 있는 말 한마디가 우리를 울고 웃기게 할 수 있게끔, 긍정적 창의성의 진화를 꿈꾼다. 창의적인 일을 한다고 자부하는 광고회사의 일원으로서 하루에도 열두 번씩 한숨을 쉬는 일의 반복이지만, 그것을 잠 재워야만 할, 위대한 한 마디를 위해 지금도 끊임없이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어 본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그 한 마디가, 누구나 움직일 수 있는 단 한 마디가 되길 기대하면서 성철 스님의 한 마디를 끝으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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