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디 워홀 展을 다녀와서
항상 궁금했었다.
비 온 뒤, 맑게 개인 하늘 저편, 새초롬하게 모습을 드러낸 일곱 빛깔 무지개 그 너머에는 어떤 현실이 펼쳐지고 있을까? 빨간 마을에는 일곱 난쟁이와 백설공주가 욕심의 노예가 된 계모 왕비를 물리치고 맛깔스러운 사과를 재배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을 테고, 노란 마을에는 곰돌이 푸가 벌꿀을 먹기 위해 그의 친구들의 도움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고 있을 테고, 보라 마을 저편에는 우주의 여왕 쉬라가 그의 오빠 히맨과 함께 악당들을 물리치며 사회 정의를 이루는 세계. 무엇이든 될 것만 같은 유년 시절, 무지개 너머 동화 같은 환상의 스토리가 펼쳐지는 바로 그곳으로 나는 항상 가고 싶었다. 내 작은 백팩에 둘러멘 소중한 물음표와 함께
항상 궁금했었다.
네모난 액자 속 만물 상자, 지적거리는 텔레비전 그 너머에는 어떤 현실이 펼쳐져 있을까? 헐크 호건과 워리어가 나를 레슬마니아로 둔갑시키고, 마지막 승부는 다슬이라는 첫사랑의 표준을 구체화시켜주고, 바스켓맨으로서의 자부심을 일깨워 주었으며, 구니스와 쥐라기 공원의 만남은 저 너머 어렴풋한 환상을 선명한 현실로 전환시켜 준 계기가 되었다. 그 뿐이랴… 환희와 쾌락의 유토피아로 인도했던 매우 빨간 비디오는 나를 영험한 카마수트라의 세계로 인도하기도 했다. 무엇이든 될 것만 같던 사춘기 시절, 이제 더 이상 물음표 가득한 무지개 너머 동화 같은 환상의 스토리보다 눈 앞의 보이는 이미지에 매료된 느낌표의 시대를 더 동경하게 되었다.
시간의 흐름… 퇴색
그렇다. 되새김질해보면, 파스텔 톤으로 점철되는 타원의 세계보다, 보다 더 선명하고 목적성 있는 욕망이 현실로 치환되는 네모 속 세계에서 나의 활동이 더욱 붐볐고, 이제 더 이상 무지개 너머의 공간은 신비로운 공간으로 치부되지 않았다. 그렇게 나의 사춘기는 목적과 목표로 인해 퇴색되어 가고, 나의 청춘과 욕망은 텔레비전과 함께 빛바래 져 가니, 비 온 뒤, 무지개를 기다리기보다, 비 오는 오후, 빗소리를 들으며 자꾸만 감상에 빠지는 일이 잦았던 것 같다.
이렇게 하루가 지나고, 일 년이 지나고, 십 년이 지나, 어느새 감당할 수 없는 나이가 되니, 내 머릿속은 오로지 의식주의 테두리 내에서 행동반경은 좁아져만 가고, 어린 시절의 무지개는 어느새 무지해져 버린다. 그렇게 나의 순수성은 시간에 의해 퇴색되어 버리니, 의식주의 노예가 된 이 세상에서 내가 ‘잘’ 살기를 바라는 것은 나의 욕심이요, 세상을 단 한 방, 필살기로 마무리 지어 보겠다는 헐크 호건의 레그 드롭 같은 피니쉬를 만들어내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버린다. 더불어 사는 친구가, 경쟁하는 대중이 되어 버리는 현실, 그런 상대적 불편함이 상대적 불평등으로, 그것이 상대적 불안으로 치환되어 버리니, 나의 인생의 길은 무지개 너머의 보이지 않는 길보다 더 좁고 아득해져 버리는 빈곤한 불행을 초래하게 된다.
책은 왜 읽나, 그림은 또 왜?
이런 빈곤한 삶에서 탈출하고자 나는 여러 가지 잡스러운 시도를 한다. 가장 큰 핵심은 인생에 대한 태도의 변화라고 무수히 많은 삶의 지침서는 나에게 지침하고 있으나, 어디 그게 쉬운 일이랴, 이 태도라는 것이 마음먹는다고 바뀌는 것도 아니고, 또한 마음은 어디로 가서 어떻게 먹어야 잘 먹는 것인지 알 수도 없기에, 나는 책을 읽고 그림을 보고 음악을 듣는다.. 사실, 처음에는 어차피 잊어버리는 지식인데, 왜 책을 읽어야 하는지 잘 몰랐다. 또 그림은 어떤가? 다빈치가 내게 보여주는 균형감이, 카라바조가 내게 설명하는 빛의 움직임이, 마티즈가 읊어대는 색감의 본질이 내겐 그렇게 중요한 요소는 아니었다. 어차피 더 작아져버린 현실의 네모난 핸드폰 화면에 나의 소중한 핑거로 자판만 두드리면 들통나는 지식인데, 왜 책에 얽매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찾기는 어려웠다. 어쩌면 좋은 책과 멀리하겠다, 예술과 멀리하겠다는 보기 좋은 핑계거리를 사춘기 시절에 미리 마음속으로 제작해 놓았었던 것 같다.
30과 40의 중간에서 갈팡질팡하는 지금, 주변과 비교했을 때, 내가 가진 것은 하나도 없다고 느끼는 바로 그 순간, ‘나는 여태까지 뭘 한 거지?’라는 절박함이 나의 감각을 확장시켜준다. 정신없이 산을 올라가 보기도 하고, 운동에 미친 듯이 집중해 보다가, 그래도 안 되겠다 싶어서 그렇게 책을 먹어치워 봤지만, 비 오는 날 오후에 음악을 들으며 낭만에 빠져 있는 시간만이 나를 현실에서 잠시 대피시켜 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고는 문득 하늘을 쳐다보니, 여전히 나의 하늘 위에는 무지개가 놓여 있었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순수성으로의 회귀, 우주의 여왕 쉬라와 대면하고, 곰돌이 푸우의 꿀단지를 나눠 먹고 백설공주의 미모에 반할 수 있는 세계가 바로 내 머리 위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책을 읽는 이유, 그림을 보는 이유를 음악을 듣는 이유를 눈치챌 수 있었다. 감각의 확장, 이를 통한 풍성한 하루의 시작, 사소한 것에 대한 감상은 바로 어린이의 마음속에서 비롯되었다.
앤디 워홀,
나의 감각을 조금 더 색다르게 감상하게끔 해 준 장본인, 시대의 흐름에 올라타서, 누구보다 유명해졌으며 누구보다 부를 많이 소유하고 누구보다 많은 창작을 대량화시켜버린 현대 미술의 아이콘 앤디 워홀, 이미 많은 누군가가 그에 대한 메시지를 평가했던 그에게 내가 확장시킨 감각을 대입해 본다.
“나는 신비로운 존재로 남길 바란다.”
자신의 예술을 ‘세상의 거울’이라고 믿었던 시대와 문화와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존재로 사람들에게 가슴 울리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런 그에게 나는 네모난 액자를 들이대 본다. 베이비 부머의 시대, 대중문화의 시대, 누구나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질 수 있던 대량화 시대에 그는 감성의 경종을 울린다. 그리고 그것을 비판하고 그것을 이용하고, 그것을 메시지 화하여 자신이 그렇게 꿈꾸던 대중문화의 아이콘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다. 한 단계 높은 예술의 경지로 자신의 작품을 대중에게 내놓으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를 신랄하게 비웃는 그의 작품에 대해서 나 또한 부끄러워질 수밖에 없다.
아무것도 아닌, 캠벨 수프 캔을 어느 새 주인공의 반열에 올려놓은 그의 영험함. 그 영험함의 도구는 바로 네모난 액자 그 자체가 아닐까? 상품의 이미지 자체, 상품의 모양 자체를 예술로 승화시킨 데에는 액자의 영향이 컸다. 캠벨 수프 캔뿐이랴, 야한 바나나, 섹시한 메릴린 먼로를 실크 스크린이라는 대량화 방식을 통해 제작 공급하여 액자에 걸어 둠으로써, 사람들을 주목하게 만들고 이것이 바로 너희들이 원하는 무지개 너머의 판타지의 끝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신랄하게 비웃고 있지는 않을까? 그의 자화상을 면밀히 관찰한다.
하지만 어떤가? 잃어버린 순수성에 대한 무지개다리를 냉철하게 놓아주는 앤디 워홀의 실력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잃어버린 예술에 대한 불편한 대중과의 교감. 그것을 이루고자 하는 도구는 실크스크린이라는 대량 제작 방식뿐만 아니라, 폴라로이드를 활용해서도 극명히 나타난다. 유명인의 사진을 폴라로이드로 찍어주고 그것을 초상화로 제작하면서 남기는 한마디는 나에게 꽤 큰 울림을 준다.
"누구나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다. 누구나 사진을 찍을 수 있으니까…"
흔해 빠진 명언이라고 치부하기엔 그 울림이 크다. 누구에게나 어린 시절은 있기 마련이고, 누구에게나 꿈꿔오던 판타지가 존재하니까, 예술의 순수성이 나의 감각을 확장시키고 목적 없는 나의 삶에 한줄기 빛이 된다.
무지개 너머로 가는 길
다시 돌아가 보자. 일상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우리는 주변의 사소한 행복함을 쉽게 느끼지 못한다. 프레임에 갇혀서 제대로 볼 수 없기에, 자꾸자꾸 어린이의 순수성에 감탄하고, 자꾸자꾸 비 오는 날 음악을 들으며 추억에 사로잡혀 혼자만의 시간여행을 떠나게 된다. 이 프레임을 깨부수기 위해, 자꾸자꾸 좋은 그림 좋은 책으로 나의 마음을 깨부수어야 한다. 그래야 나에게 덧씌워진 이 많은 프레임이 누군가에게는 앤디 워홀의 액자만큼이나 소중해 보일 수 있는 가치를 지닐 수 있으니까. 어느 순간, 우리는 부모님의 건강보다 재산에 관심이 더하고, 이성과의 사랑보다 섹스에 더 관심을 가지는 일상을 살아가고, 그런 자극적인 기사와 뉴스에 만성화되어 있다. 이것을 깨부수기 위해서 더 나은 무지개다리를 건너, 백설공주와 신데렐라가 함께 공존하는 그곳에 단 1미터라도 가까이 가기 위해서라도 DDP로 지금 당장 발걸음을 1 밀리미터 옮기길 권한다. 그곳에는 흔히 이마트에서 볼 수 있는 야한 바나나와, 캠벨 수프 캔, 그리고 섹시한 연예인들이 액자 속에서 당신의 액자를 부수려고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