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터 5
"언니, 음악 하는 남자 조심해!"
지금의 공연 관련 회사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려주자 클래식 음악을 전공한 지인이 축하보다 먼저 경고를 날렸다. 나는 "암 알다마다"하고 웃었다. 음악 하는 남자, 그것도 클래식 음악을 하는 남자의 매력을 나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회사에 들어와서 정말이지 아티스트와 많이 어울려야 했다. 서울대를 수석 졸업한 피아니스트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는 깔끔하게 셔츠나 무지 티셔츠를 주로 입고 다녔는데 주름 없이 다려진 옷만큼이나 잔뜩 사랑받아 온 느낌이었다. 뱅뱅이 안경을 쓰고 있어서 패션에 관심이 있어 보이진 않았지만 TPO는 맞출 줄 알았다. 낯을 가리고 조용히 있다가 한 번씩 순수한 질문을 던졌다. 대학을 이미 졸업한 나이임에도 시골에서 갓 상경한 청년 같았다.
까마득하게 어린 친구를 보면서 '으구, 귀엽네'라고 생각했다.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곱게 자라서 '세상에, 이런 애를 누가 괴롭히진 않을까' 걱정이 들었다. 보호해줘야 할 꼬꼬마, 귀요미였다. 일하던 중 그 친구가 내 앞에서 처음으로 피아노에 앉게 됐고, 사람 좋게 웃으며 "듣고 싶은 곡 있으세요?"이라고 물었다.
그 당시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 빠져있을 때라 나는 슈만의 어린이정경을 외쳤고 그 친구는 씨익 웃으며 피아노 의자의 높이를 조절했다. 건반 위에 긴 손가락이 올라가자마자 정원에서 실컷 놀다 골아떨어진 아이의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연둣빛 웃음소리가 포근한 흰색이 되었다. 연주는 그 친구처럼 예쁘고 착했다.
음악은 짓궂은 마녀의 주문 같다. 온실 속 화초의 길고 곧은 손가락에서 섹시함이 읽히고 뱅뱅이 안경도 사색의 흔적으로 보였다. "생긴 대로 연주한다"는 유명한 말이 있지 않은가. 예쁘고 착하게 연주하니까 그 사람도 그럴 것이라는 음성이 울리는 듯했다. 저런 음악을 하는 친구가 나쁜 친구일리 없어라는 비논리의 주문.
사실 비논리의 주문은 그전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내가 공연계 종사자임을 숨기고 아직까지도 공연이 끝나면 얼굴 한 번 더 보기 위해 공연장 로비에서 기다리는 바이올리니스트를 실제로 봤던 공연을 아직까지 기억한다. 그때 그는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1번을 연주했다. 작고 왜소한 체격으로 혼자 무대 위에 올라와 오로지 바이올린 소리 하나만으로 극장을 가득 채웠다. 그 소리는 마치 눈보라 치는 날 남자 혼자 주머니에 손 딱 찔러 넣고 꿋꿋하게 길을 걷는 모습이었다. 무대 위 그의 모습은 더 이상 왜소해 보이지 않았다. 눈보라를 있는 그대로 맞으며 나아가는 쓸쓸하고도 강한 남자였다.
소리가 전하는 이미지를 보면서 그 역시 인생을 혼자서 치열하게, 눈이란 눈은 다 맞으며 살아왔을 거라 짐작했다. 손끝이 아리는 것만은 어쩔 수 없어서 무심한 척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을 수밖에 없는 그런 삶. 어떤 음은 눈송이가 앉은 듯 여리게, 어떤 음은 눈덩이에 맞은 듯 아프게 연주해 나갔다. 어느덧 무대는 무채색을 자랑하는 골목길이었고 그렇게 그의 인생을 보았다.
클래식에 대해 어렵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사랑에 빠지듯 클래식을 들을 수도 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요동치게 만드는 연주자들을 만나서 그저 들리는 대로 내 마음이 울리는 대로 그렇게 듣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조금 더 음악이 궁금해지고 더 알아보고 싶고, 더 들어보고 싶어진다.
가사도 없고, 시선을 사로잡는 화려한 뮤직비디오도 없는 클래식이지만 연주자는 그림을 그려주기도 하고, 온도를 전해주기도 한다. 동시에 관객들은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실제 연주자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 길은 없지만, 우리는 음악에 홀려 그 사람까지 한꺼번에 사랑해버리곤 한다. 이쯤 되면 음악이 사람을 홀리는 마녀의 주문가 아니고 무얼까.
음악 하는 남자를 조심하라던 지인은 이렇게 덧붙였다. ”음악 잘하잖아? 그냥 바로 콩깍지인 거야.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그냥 사랑에 빠진다니까” 그러나 우리가 언제 누군가를 명확하게 알고 사랑에 빠진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나? 첫눈이 아닌, 첫 귀에 반해버린 경험이 지금 내가 있는 자리로 이끌었는 지도 모르겠다. 잘 모르는 채 홀려 버린 거다. 그저 사랑해 버린 거였다. 지인의 말은 어쩌면 이랬던 걸 수도 있다. “음악이 좋잖아? 그럼 바로 콩깍지인 거야. 어떤 음악인지도 모르고 그냥 사랑에 빠진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