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
드라마 프로덕션에서 일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매 프로젝트마다
200명 가까이 되는 스텝들을 만나다 보니
다양한 인간군단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생각보다 이 바닥이 좁아서
계속 같이 일했던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많다.
얼마 전 내가 일하는 드라마 촬영 건물에
다른 드라마팀이 들어왔는데
나를 그토록 힘들게 했던 내 상사가
그 드라마에 일하게 됐다고 해서 만나게 되었다.
어쩔 수 없는 사회생활,
엄청 반가운 척을 서로 하는데
나도 나에게 이런 모습이 있구나 싶었다.
마치 아무 일 없었듯이
서로 잘 지낸 듯이 아주 반갑게 말이다.
내가 드라마를 마무리하고 나서도
그 상사 사무실에 찾아가서
아주 반갑게 인사하고 나왔다.
어쩔 수 없이 다시 만나야 하는 사이라면
그래도 어느 정도 사회생활은 필요한 거니까.
그래도 이런 내 모습을 보는 건 익숙지 않았다.
나도 이젠 어쩔 수 없이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 어른이 되었나 싶었다.
생각해 보면 스타일이 잘 안 맞았을 뿐
나를 의도적으로 괴롭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다만 내가 보통 일할 때 해왔던 엄무를
하나도 안 준 점과 사람들이 나에게 와서
무엇이든 물어볼 때
말을 가로채서 사람을 무안하게 만든다던가
그 사람의 성향이지 않았나 싶다.
너무 사소해서 말하기도 애매한 갈등들 말이다.
우리 둘이 사용하기로 했던 사무실을 혼자 쓰기로 하고
나를 작은 구석 사무실로 보낸다던가 별거 같지 않지만
엄청 예민해지는 그런 일들 말이다.
결국에는 얼마뒤 상사가 쓰는 옆 사무실로 옮기는 걸로
일단락했지만 이런 갈등들이 나를 힘들게 했던 것 같다.
물론 사무실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 사람은 나를 막내들과 같이 사무실을 쓰던가 아님
저 작은 사무실을 쓰던가라는 식으로
의도적으로 보냈다는 생각에 더 예민해졌던 것 같다.
전체적으로 사람에 대한 존중과
이해와 포용이 없는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일을 하다 보니 그 사람의 방식이
왜 나를 힘들게 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저런 상사와 처음 일해본 나는
결혼준비까지 겹치게 되면서
원형탈모를 얻게 됐고
그 시간이 유일하게 매일 일하러 나오기 싫었었다.
그래도 그 시간을 버틴 덕분에
그 뒤로도 같은 포지션으로 다른 드라마를 걸쳐
좋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 뒤로 처음으로 영화에 도전할 수 있게 됐다.
이번 팀 상사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항상 먼저 공지를 해주고 공유해 주고
너는 어떻게 하고 싶니
이건 어떻게 생각하니 등등
파트너라는 개념이 확실히 그 상사랑은 차이가 났다.
그래서 내가 일할 때 존중받는 느낌이었고
그냥 밑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 팀을 함께 꾸려나가는
파트너라는 생각이 많이 들게 했다.
이런 사람과 일할 때
그리고 나를 믿어줄 때
더 책임감이 생기고
더 일을 일로만 생각하지 않는 태도가 되어간다.
어쩌면 리더가 갖춰야 할 아주 중요한 덕목인 것 같다.
늘 사람들한테 배운다.
안 좋은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이 거울이 되어
아 나는 저런 사람이 되지 말아야겠구나 싶고
좋은 덕목을 갖춘 사람을 만나면
이런 점은 나도 승진하게 된다면
닮아야 하는 부분이겠구나 싶다.
이번 영화는 이미 드라마로 나와있는 쇼인데
영화 버전을 하나 만들기로 해서
내가 일했던 파라마운트 영화사에
다시 촬영장을 잡게 돼서 돌아오게 됐다.
그때 안 좋은 기억이 있었던
상사와 일하던 같은 사무실 빌딩으로 말이다.
뭔가 익숙하지만 완전히 다른 팀과 함께 하는 영화 작업
드라마 장르만 계속하다가 영화도 계속하고 싶었는데
기회가 닿지 않았었는데 기대가 된다.
정말 낳선 스튜디오, 낳선 플랫폼이라면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겠지만
같은 사무실, 같이 일하던 프로듀서,
한번 일해본 상사랑 같이
새로운 장르에 도전할 수 있어서 다행이고 감사했다.
드라마보다 호흡이 짧다 보니
1월부터 4월까지 준비하고 촬영하고 끝나겠지만
이 기간 동안 좋은 파트너를 만나서
일을 재밌게 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