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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실의 어둠은 일찌감치 찾아들고

by 캐서린의 뜰


어린 준영이 눈에 비친 외할머니 모습을 두 걸음 물러나 바라본다. 빈 병상에 걸터앉아 카스텔라를 먹던 아이는 들것에 실려온 할머니를 보고 손에서 빵을 내려놓았다. 낯설고 두렵고 한 발짝 다가서기에 멈칫하게 만드는 공포스러움에 어쩔 줄을 몰라하며. 어른인 나 역시도 눈물이 핑 돌았다. 엄마의 온몸엔 주렁주렁 수액과 혈액, 소변주머니 같은 것들이 어지럽게 매달려있었다. 진작 할머니 하고 품에 달려들었을 준영이는 차가운 철제 침대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그만 얼음이 되어버렸다.


40여 년 전 어린 내가 전남의 한 대학병원에 누워계신 나의 외할머니를 뵈러 간 날이 떠올랐다. 고속버스를 타고 도착한 그곳에서 우리를 맞이했던 외삼촌이 기억 속에 살짝 스치는 듯하다. 그 사이 부쩍 노쇠해진 할머니를 마주하는 건 어린 나에게 용기가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두 눈 가득 차오르는 눈물을 들키지 않고 삼켜내는 용기, 강아지들 왔냐는 할머니의 반쯤 잠긴 음성에 떨리지 않는 목소리로 네 라고 대답하고 침착하게 한 발짝 할머니 곁으로 나아가는 용기, 그리고 달콤한 삼육두유 한 포를 다 마시지도 못한 채 결국 병실에 계신 할머니를 남겨두고 등을 돌려 병실밖으로 나아가는 용기. 이 병실문을 나서서 집으로 돌아가면 다시는 할머니를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어린 내 발목에 쇠구슬처럼 무겁게 따라왔다.


점심을 건너뛰고 할머니 병문안을 다녀온 준영이는 외가로 돌아가 수술 전 할머니가 끓여놓으신 전복 황태 미역국에 밥을 말아 저녁을 먹었고 자기 전 그림일기를 그렸다 한다.


이모가 보내준 사진 속 그림일기에는 준영이가 삼십여분 머물다 간 삭막하고 조금은 살벌한 병실 풍경이 하나하나 손바닥만 한 종이에 채워져 있었다. 벽에 걸린 달력과 금식 (물도 안 돼요) 안내판과 엉켜있는 수액 호스들, 이불 사이로 빠져나온 알록달록한 할머니의 양말은 물론 몸을 움직일 수 없고 겨우 실눈을 뜨고 있는 할머니와 굳어버린 나와 준영이 자신의 표정까지 놓치지 않고.


훗날 이 광경은 오래도록 준영이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중년의 나이에 할머니를 기억하려 할 때 떠오르는 장면 중 하나로 남겠지. 애쓰지 않아도 어떤 기억들은, 설령 그것이 원치 않는 슬픔이나 괴로움 같은 것이라 하더라도 싸늘한 쓰라림으로 마음에 머물다 딱지처럼 굳어 버리기도 하니까.


오늘 밤은 유독 전남의 한 요양병원에 계시는 나의 외할머니가 보고 싶다. 딱딱한 보호자 간이침대에서 쉽게 잠들긴 글렀다.


날은 더디 밝아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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