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은 낮 최고 기온이 33도였는데 다음날은 20도에 머무는 마법 같은 날씨에 차츰 적응하며 우리는 일상의 규칙을 찾아갔다. 매일 도서관과 공원을 가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작은 아이는 한껏 들떠 오늘은 어떤 놀이터가 있는 공원으로 갈지 기대했으나 큰 아이의 표정에는 점점 실망이 묻어났다. 놀이터에서 놀기엔 큰 아이가 부쩍 자라기도 했고, 이곳 놀이터는 자연친화적인 대신 더 많은 신체적 도전을 요구했다. 활동적인 아이가 아닌 큰 아이는 금세 흥미를 잃고, 가져온 초코칩 쿠키만 먹다 흙을 만지작거리다 돌아오곤 했다.
그래서 며칠 동안 현지 어학원을 검색해 보았다. 작은 아이와 놀이터에 있는 시간 큰 아이가 영어를 배우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하지만 예상보다 큰 비용에 조용히 포기하고 말았다.
그날도 간단히 젤리와 초코칩 쿠키 그리고 물을 챙겨서 야라강변 놀이터로 향했다. 여전히 트램 안내방송은 영어 듣기 평가처럼 나를 시험했고, 그날은 정거장을 놓쳐 두 정거장을 지나 내렸다. 그럼에도 되돌아 걸어가는 길이 마냥 즐거웠다. 아름드리나무가 만든 그늘 터널을 지나며 나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이 길 너무 좋다고, 트램을 잘 못 내려서 이 길을 걷는 게 오히려 행운 같다고 말이다. 때마침 적당히 불어오는 바람과 눈부신 여름 햇살 아래 저마다 빛나는 지상의 모든 것들. 분수대에서 흩어진 물방울은 맑은 하늘 아래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을 무지개를 만들었고, 반짝거리는 푸른 강물처럼 우리 마음도 넘실거렸다. 멜버른 시티를 가로지르는 야라강. 특별할 것 없는 장소이었지만 그날의 공기와 빛이 강변을 걷고 있는 우리를 더없이 가볍고 빛나게 해 주었다. 딸아이도 같은 마음인지 자꾸만 걸음을 멈추고 주변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놀이터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늘 그렇듯 작은 아이는 신나게 놀면서도 내 주변을 맴돌며 놀고 있었지만, 큰 아이는 우리 쪽으로 오지 않았다. 대신 또래의 한 아이와 함께 있었다. 큰 아이는 우연히 할머니와 온 또래의 친구를 만났고 둘은 금세 가까워져 미끄럼틀을 오르고 내리며 한참을 함께 놀았다. 그리고 헤어질 때 다음 날 도서관에 행사가 있으니 만나자는 약속까지 하고 말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큰 아이는 다시 수다스러워졌다.
엄마, 클로에 할머니는 러시아어를 할 줄 알고, 클로에 아빠는 영국인이래. 할머니가 러시아어 가르쳐 주려고 했는데 클로에는 어려워서 포기했대. 엄마, 근데 클로에 정말 예쁘지. 내일 도서관 행사 재밌었으면 좋겠다.
한껏 들떠있는 아이에게 나는 이름만큼 얼굴도 예쁜 클로에란 친구를 만난 건 크나큰 행운이라고 말해주었다. 그 친구를 만난 확률을 수치화할 수는 없었지만 범위를 좁혀나가며 설명해 줬다. 이 넓은 지구에서, 수많은 나라 중에 우리가 호주를 선택했고, 호주에서도 멜버른을, 멜버른의 여러 놀이터에 오늘 이곳 야라강 놀이터에 온 우리, 그리고 마침 여름방학이라 이 시간에 이곳에 온 클로에. 삶은 숱한 우연의 연속이지만 여행자인 우리에게 이런 인연은 가벼운 우연으로만 그치기에는 너무도 소중하다고.
다음날 도서관에서 아이들은 다시 만났다. 도서관 구석구석을 다니며 보물 찾기를 하고 잔디밭에서 페이스 페인팅과 비눗방울 놀이를 했다. 한가롭고 평화로운 정경 속에서 아이들이 푸르게 물들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니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이번에도 단기 영어 캠프는 없지만 이런 시간들이 때때로 채워지는 것만으로도 한 달 살기의 의미는 충분했다. 우리의 발길이 머무는 곳은 관광지와 맛집 소개로 가득한 여행 책 너머의 숨겨진 장소였고, 여행 책 본문에 소개되지 않은 보물지도는 우리가 그려 나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다음 날에도 우리는 또 다른 놀이터를 찾아갔다. 함께 놀고 싶은지 중국 아이가 혼잣말처럼 말을 걸어왔다. 곧 그 아이의 형까지 합류해서 아이들은 다 같이 오각형 그네를 타기 시작했다. 불규칙하게 밀려오고 밀려가는 그네를 타면서 아이들은 서로 발끝이 부딪힐까 봐 소리를 질렀다가 천천히 물러나고 나아감을 스스로 조절하며 꺄르륵거렸다. 한국, 중국, 인도의 다섯 아이들이 무리를 지어 술래잡기를 하자 노란 곱슬머리의 꼬마 아이도, 한국에서 영어캠프를 온 2학년 남자아이도 합세했다. 숨이 차게 소리를 지르고 뛰놀며 늦도록 해가 지지 않는 멜버른의 여름 저녁을 밝혔다.
엄마들이 부르는 소리에 나이가 어린아이들은 울음을 터뜨리며 떠밀리듯 먼저 자리를 떠났고, 남은 아이들은 앞으로 영원히 다시 만날 기약이 없는 이 헤어짐을 손을 흔들며 담담히 받아들였다. 아니 어쩌면 아이들은 그저 오늘이 차고 넘치게 즐거워서 아쉬움 없이 돌아설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한국에선 아이들이 없는 오후 4시 놀이터에서 혼자 그네를 타다가 오분만에 집에 가자고 했던 작은 아이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이곳 놀이터에 4시에 나와, 삼십 분만 더, 삼십 분만 더를 외치다 결국 8시에 집으로 갔다.